0회

연재를 시작하며: 아이돌은 아티스트다

한국 대중음악이 현대적인 제작방식과 글로벌한 접근방식을 내세워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이 단순명료해 보이는 명제의 당위를 입증하는 일에는 여전히 많은 설명과 노력이 필요한 듯 보인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BTS가 미국 빌보드 차트의 정상을 잇달아 점령하고, 수년 전부터 외신들이 한국어로 된 그들의 음악에 담긴 의미와 상징을 분석하고 있지만, 국내 언론은 여전히 그들을 국가주의적인 자긍심, 쉬운 말로 ‘국뽕’의 대상 그 이상으로 다루기를 꺼려 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BTS의 어떤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들의 음악에 어떠한 메시지와 가치가 담겨 있느냐보다는 미국에 사는 평범한 외국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혹은 그들의 성공이 얼마만큼의 경제적 효과로 치환될 수 있느냐와 같은 지엽적인 문제들에 집중되어 있다. 그저 사람들이 대중음악에 관심이 없어서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기본적으로 ‘아이돌’이라 칭해지는 케이팝에 대한 반감과 폄하의 정서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케이팝 아이돌들의 상업적 파워와 전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적인 지배력과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는 오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아이돌을 인기 스타일지언정 한 명의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로 인정하기를 꺼려 하고 있다. 물론 아티스트로서의 아이돌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 내지 회의적인 시각 그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돌’의 예술성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 실체를 의심하는 생각의 바탕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성 혹은 음악성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러니까 순수하지 못한 ‘가공품’이라는 개념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리 오래지 않은 현대 대중음악 담론의 역사에서 매우 빠르고 공고하게 구축되어온 관념이기도 하다.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예술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의 기저에는 필연적으로 대중음악을 ‘창작자’ 중심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하나의 관성이 자리해 있다. 그리고 이 관성은 우리가 듣는 음악이 온전히 아티스트의 본 모습을 표현한다는, 혹은 그래야 한다는 아티스트적 ‘진정성’이라는 요소에 크게 의존한다. 역사적으로 평론가들은 예술로서의 대중음악이 갖는 진정성에 대해 종종 지나치리만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다. 그리고 이는 한편으로 동시대 대중음악평론가의 태도를 규정지어온 로키즘rockism, 그러니까 록 중심주의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밴드의 멤버들이 스스로 곡을 쓰고 함께 연주하며, 최소한의 ‘제작’만이 개입되는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록 음악은 가수 혹은 광의의 퍼포머와 뚜렷이 구분되는 창작자로서의 뮤지션을 음악의 가장 중요한 주체로서 부각시켰으며, 그와 동시에 기획되고, 제작되고, 다양한 주체가 개입해 만들어내는 ‘팝’ 음악과 그것을 부르는 퍼포머로서의 아티스트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격하되기 시작했다. ‘록’이라는 순수한 예술과 대비되는 상업적이고 인위적인 ‘팝’에 대한 편견은 그리로부터 비롯되었다. 가창이나 춤이 연주나 작곡에 비해 덜 예술적인 행위로 평가받게 된 것이나, 기교나 완성도보다는 태도나 정신 같은 요소가 더 중요한 음악적 가치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 역시 바로 이 같은 로키즘의 부상이 가져온 결과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미권이 만들어낸 현대 록 비평의 방법론을 그대로 흡수한 한국 대중음악 평단이 전통적으로 아이돌의 음악이나 퍼포먼스에 짐짓 무관심하거나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평론의 대상은 당연히 작품과 그 작품의 주인인 아티스트인데, 프로듀서와 전문 작곡가들이 만든 ‘팝’ 음악은 그 비평의 대상이 불분명할 뿐 아니라, 에이전시 기획의 산물인 ‘아이돌’에 이르면 칭찬이나 비판의 대상이 정작 해당 아티스트를 향하지 못하는 곤란함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평론가들의 입장에서 아이돌은 단순히 마뜩치 않은 존재라기보다는 평가하기 껄끄러운 존재, 다시 말해 뮤지션 혹은 아티스트라는 관점으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그러고 싶지 않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작가주의 싱어-송라이터들과 홍대발 인디 펑크가 전성기를 누린 1990년대에는 국내 시장만으로도 더없이 활발했던 대중음악에 대한 평론이나 리뷰가 아이돌을 위시한 케이팝 산업이 본격적으로 득세해 글로벌한 산업으로 성장한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오히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케이팝이나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덕후’들을 위한 맞춤형 담론으로 자리잡아 그들만의 맞춤 언어를 통해 소비될 뿐, 뮤지션이자 아티스트로서 아이돌의 음악을 둘러싼 보편적인 평가는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다. 동시에 주류 대중음악 평론은 글로벌 케이팝 산업에서 가장 큰 파이를 점한 아이돌을 아티스트로서 정당히 평가하지 못하고 사실상 방치한 채 수년간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재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정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와 상관없이, 아이돌 음악의 상업성과 아티스트십의 관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 내지는 변명이 필요할 것 같다. 누구나 공히 인정하듯, 아이돌 음악은 분명 프로듀서들에 의해 기획되고 제작된다. 그 과정에서 회사와 프로듀서의 의도가 종종 아티스트의 선택보다 우선시되는 것도 사실이며, A&R*의 정교한 코디네이팅은 작곡가의 음악적 선택을 좌우한다. 하지만 아이돌이 음악적 행위나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채 피동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은 다분히 편협한 판단이다. 소위 1세대 아이돌로 구분되는 H.O.T. 시절부터 케이팝 아이돌은 유독 작곡과 편곡 등 일련의 음악작업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관여해왔다. 물론 모든 아이돌이 ‘뮤지션’으로서의 능력이나 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며, 충분한 재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예술적인 선택을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는 위치나 주도권을 얻어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아이돌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예술적인 선택과 참여를 제한당한 채 마치 꼭두각시처럼 만들어진다는 편견에서 우리가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돌로서 길러지고 훈련된 많은 이들이 결국 자신들의 음악을 셀프-프로듀스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으며, 현재 성공한 아이돌의 상당수는 바로 이 같은 뮤지션의 역량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돌이라는 산업과 포맷을 취하고 있을 뿐, 아티스트적인 역량을 가진 아이돌들이 더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또 하나, 아이돌이 가진 무대의 완성도, 쉽게 말해 그들의 ‘퍼포먼스’는 대단히 과소평가된 요소 중 하나로 보다 정당한 평가가 요구된다. 이는 음악에 있어 춤의 중요성을 높게 보지 않거나 댄스 음악을 록 음악에 비해 진지하지 못한 음악으로 폄하하는 로키즘적인 태도와도 무관하다 할 수 없을 텐데, 무용이 중요한 현대예술 장르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다소 모순된 태도다. 현재 케이팝에서 춤이나 퍼포먼스의 역할은 단순히 가수의 무대를 보충해주는 백업 무용단의 역할을 넘어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인 견지에서나 모두 음악의 존재감에 준하는, 종종 그것을 능가하는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그룹의 경우, 댄스 퍼포먼스는 그들의 음악이 내세우고자 하는 새로운 콘셉트와 지향점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음악의 정체성과 내러티브 그 자체를 구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현대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제작은 ‘송 캠프song camp’라고 하는 일종의 균질화된 프로듀싱 시스템에 기반해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흔히 음악의 주체로 삼는 전문 작곡가나 편곡가의 역할은 기획사 혹은 아티스트가 원하는 무대와 퍼포먼스를 사운드적으로 구현하는 여러 요소 중의 하나로 그 역할이 제한되기 일쑤다. 게다가 현재 아이돌 음악을 이루고 있는 그룹 퍼포먼스의 경우 팝 음악에서 솔로 가수들의 무대와는 달리 특별한 장치나 대규모 무용단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그룹의 퍼포먼스만으로 대부분의 음악적 의도가 충실히 구현된다는 점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 같은 케이팝 산업의 특징을 고려해볼 때 아이돌의 퍼포먼스는 공연을 위한 부가적인 장치나 음악이 만들어진 뒤 고려되는 추가적인 옵션이 아니라 아티스트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음악적’ 요소가 된다. 가사, 곡, 편곡, 연주 등 전통적인 음악 비평의 평가 기준만으로 아이돌 음악을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획된 음악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돌 음악의 예술성을 의심하기에 이미 케이팝 아이돌 음악의 수준은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케이팝 아이돌의 독특한 면모 중 하나는, 이들이 산업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모델로 삼아왔던 영미권의 보이밴드/걸그룹 의 음악이라든지 일본의 아이돌 산업과는 전혀 다른, 다양하고 실험적인 음악적 시도들이 가능한 신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현재 케이팝 아이돌 산업에는 국내외적으로 가장 앞선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 있는 다국적 뮤지션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은 케이팝 아이돌 음악을 통해 다른 음악 신에서는 하지 못했던 예술적 자유를 통해 케이팝의 트렌디하면서 과감한 음악적 도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제도권 대중음악 신에서 가장 훌륭한 만듦새를 갖춘, 가장 예술적으로 비범한 곡들의 상당수는 다름 아닌 아이돌 신에서 나왔으며, 이 음악들의 완성도는 국제적인 반응이나 외신들의 호의적인 평가로도 고스란히 입증된다. 히트곡에 철저히 의존하는 제도권 가요들과 달리, 케이팝 아이돌은 충성스러운 팬덤을 대상으로 그들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특징으로 삼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아이돌 음악이 ‘대중성’에 대한 압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들은 단순히 히트를 위한 곡보다는 세계관이나 예술적으로 차별화 될 수 있는 곡, 당대의 트렌드를 리드할 수 있는 곡,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곡을 내세워 시장에서 승부를 건다. 만들어진 아티스트라는 이유 때문에 이들의 음악이 가진 다양함과 진보적인 면모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풍성한 음악 담론의 가장 큰 부분을 영원히 봉인시키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적인 케이팝 담론의 주도권은 한국이 아닌 미국이 쥐고 있다. 미국의 저널리즘은 특유의 상업적인 관용도를 앞세워 케이팝을 그들의 산업 안에 적극적으로 껴안고 있다. 정작 우리가 그 평가를 보류하거나 주저하는 사이 중요한 흐름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앞으로 연재될 이 글에서 현재 한국 제도권 대중음악 신에서 유의미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열 팀의 아이돌과 그들의 음악을 평가하고자 한다. 익히 알려졌거나 아직은 대중들에게 낯선 이들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들여다봄으로써 그 안에 담긴 예술적, 미학적 매력과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 이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나는 굳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케이팝 아이돌이 아닌 ‘지금 여기의’ 아이돌만을 따로 다루고자 하는데, 바로 지금 우리가 각각의 이유로 주목해야만 하는 아티스트들을 통해 역사 속의 케이팝이 아닌 지금 막 벌어지고 있는 케이팝 산업 전반의 여러 면모를 조금더 역동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분석들에서 나는 아이돌vs.아티스트 혹은 상품vs.예술과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적인 구도를 거부함은 물론이요, 지극히 아이돌 산업의 논리에만 국한된 마니악한 분석 역시도 지양하고자 한다. 결국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은 아티스트로서 아이돌의 매력과 의미를 지극히 평범한 음악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작업을 통해서 나는 지난 세월 ‘아티스트’라는 칭호와 거리가 멀었던 아이돌 음악의 예술적 가치에 정당한 평가의 기회를 제공함은 물론, 케이팝 산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 동안 여러 이유로 봉인되어왔던 한국 대중음악 담론의 많은 부분들이 더 자유롭게 풀어져 펼쳐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