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밤의 가로수는 당신은 다른 삶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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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부산에서 알게 된 사람은 물론 최명환이다. 최명환은 나의 집주인으로 그는 여상을 졸업한 후 미문화원 근처 무역회사에 경리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그는 돈을 모으고 또 모았고 여러 방식으로 불렸다. 발 빠르게 돈을 빌려 집을 사고 갚고 또 돈을 모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뭔가를 어디서 가져와 팔고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또 집을 사고 오르면 팔고 그리고 또…… 그것은 모두가 아는 돈을 모으고 불리는 방법이고 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때의 최명환은 가능했고 나는 아직 가능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가능할지 자신이 없었다. 아무튼 그는 경리로 일하며 비서가 따로 없는 작은 회사에서 비서가 할 만한 일들을 하였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고 한다. 


―나는 경제신문을 매일 읽었다.

―집을 사려면 저도 좀 읽어야겠네요. 


어느 날인가 최명환과 함께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였다. 최명환과 비교하면 나에게는 살아온 이야기랄 만한 것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와 마주하면 종종 그가 지나온 시간들 그가 한 것들 가지고 있는 것들 뺏겼던 것들 할 수 있었던 것, 모르게 혹은 알면서 저지른 일들 그중 몇 가지는 확실히 어두운 일들이었고 그런 것이 그 사람을 마주할 때 하나의 에너지로 팽팽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이 부담스럽거나 싫지는 않았다. 그의 에너지를 내가 받아내기 힘들어 지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에게는 흐르고 있는 오늘의 지금의 시간을 물방울처럼 튕겨져나가게 하는 자신 나름의 시간의 막이 있었고 그것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가끔은 나를 얹고 때로는 손을 흔들며 갈 길을 가는 것이 다였다.


부동산에서 헤어진 최명환을 다시 만난 곳은 차이나타운이었다. 그는 내게 부산에 오는 날 한번 연락을 하라고 하였고 나는 이것이 정말 연락을 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의례적인 인사인지 다소 고민을 하였으나 약속도 없고 크게 할일도 없어서 그에게 연락을 하였다. 여전히 나는 목욕탕에서 만난 사람이 소개해준 집을 아무 생각 없이 임대하게 된 과정에 대해 나 스스로 결정한 일이면서도 의심스러워하며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이 사람이 나를 속이려 드는 것은 아닐까. 나는 돈도 별로 없는데 내게서 뜯어갈 건 거의 없을 텐데 생각하며 우리는 일품향에서 깐풍새우와 오향장육을 먹었다. 이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도 이건 맛있으니 어느 정도 감안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혹은 여기서 내가 돈을 내겠다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것일까 뭐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잠시였고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먹는 일에 열중할 정도로 음식은 맛있었다. 말없이 먹기만 하는 시간이 흐르고 그는 집은 괜찮은지, 거기서 사는 것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아직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산책하고 책 읽기를 반복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하였다. 산책하기 좋고 별문제는 없어요. 


―저도 다음에 뭔가 다른 것 사드리고 싶어요.

―위스키를 사세요 그럼.


최명환은 높은 지대로 올라가 술을 마시고 다시 천천히 걸어내려와 술이 깨면 좋다고 했다. 아직 낮이었고 관광객들은 차이나타운의 유명 중식당들과 안 유명 중식당들을 살피며 줄을 서고 들어가고 주문을 하고 밥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었다. 나는 관광객은 아니지만 관광객이라고 해야 할까 출장자라고 해야 할까의 마음으로 다음에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산에 왔으니 오늘은 집중해서 뭔가를 일기가 될지 소설이 될지…… 아니면 가져온 책을 집중해서 읽을지 무언가를 하자. 오늘 열심히 하면 내일은 술을 마셔도 가벼운 마음일 것이다. 


―저 모레 서울로 가니까 내일 가는 것 어때요?

―내가 그럼 예약해둘게. 저녁 먹고 여덟시에 보기로 합시다.


최명환은 근처에 사무실이 있다고 거기서 커피를 마시자고 하였다. 중앙동 큰길가에 그의 사무실은 있었는데 건물 폭이 좁고 오래되었지만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의 건물이었다. 사무실은 작고 아늑했다. 넓은 사무용 테이블 하나와 손님용 소파와 낮은 테이블 하나가 들어가니 꽉 차는 공간이었다. 최명환은 커피를 내려주었고 잔을 건네주는 손가락에는 묵주반지가 보였다. 반지가 예쁘네요. 나는 세례명을 묻고 어디로 성당을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국 이름을 말하고 영도로 성당을 다닌다고 하였다. 


―근처에도 성당이 있지 않나요? 지나가면서 본 것 같은데.

―응, 근처에도 있어요. 원래 다니던 데가 거기라서 계속 거기로 다니는 거지.


커트 머리의 최명환은 가볍게 머리를 손으로 빗고 그럼 내일 만나자고 하였다. 그래요. 나는 열심히 무언가를 해보겠어요. 집중이라는 것을 혹은 몰두라는 것을 시도와 노력이라는 것을 해보겠습니다. 그날은 배가 불러 근처를 걷다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부산타워는 어디든 나를 따라다니는 것 같다. 중앙동을 걸을 때면 코모도호텔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길을 건너면 다가오는 바다는 나를 휘감고 어쩐지 너는 이렇게 걷다가 사라지게 될 거야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처럼 잠이 들게 될 거야 말하는 것 같았다. 잠이 들면요? 눈을 뜨면 다음날이 되고 다시 걷고 너는 그 일을 반복하게 된다. 대체 어디서요?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남포동을 걷다가 중앙성당 앞에 섰을 때 문득 성당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아주 어릴 때 내가 살던 집 근처에는 성당이 있었다. 그곳의 건물은 당시 내 주변의 낡은 건물들과는 달랐다. 붉은 벽돌은 오래되었지만 낡거나 초라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놀았을지 모르겠다. 그 이후 유럽 여행에서 성당에 들어갔던 것 명동성당 안에 들어갔던 것을 제외하고는 성당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들은 바닥에 붉고 노란 그림자를 만들었고 동으로 된 피에타상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녹음된 오르간 소리는 끊어지다 이어졌다. 앉아 있던 세 사람과 잠시 뒤 조용히 들어온 두 사람은 손을 모아 기도를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손을 포개 허벅지 위에 두었다. 조용히 뭔가를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였고 그러다보면 내가 소망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그러나 잠시 다른 사람이 된다면 부산에서 살며 이 근처의 회사에서 근무하며 중앙성당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면 무엇을 기도할 것인가. 그 사람은 당신처럼 아이가 없고 남편이 없고 일을 하며 혼자 살고 큰 희망은 없지만 큰 불만도 없다. 그러나 당신보다 일을 많이 할 것이며 신을 믿을 것이고 어떤 중요한 순간에 타인에게 헌신적일 것이고 그들을 도우려 할 것이다. 그는 내가 타인에게 주었던 결정적인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나 내가 하지 않았던 큰 후회를 그는 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마주앉아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는 나를 차갑고 냉정하다 여길 것이고 나는 어쩌면 그를 참을 수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마주 앉는다면 각자의 손을 내려다보던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본다면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을까. 그럴 수는 없다. 

먼저 앉아 있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조용히 일어나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갔다. 앉아 있는 사람들의 조용한 기도는 계속되었고 나는 나와 비슷하지만 어딘가는 무척 다른 그가 이제는 볼 수 없는 친구처럼 그리웠다. 서울을 걸을 때엔 그런 존재들에 대해 생각할 때가 드물었다. 부산에서는 그런 이들이 어딘가 몇 명쯤 살고 있을 것이라고 등뒤에서 신호등 맞은편에서 그들을 생생하게 느낄 때가 있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을 때 오후의 태양은 선명했고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최선생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의 세례명은 마르타라고 하였다. 음식을 차려주는 성녀 남을 먹이는 성녀라고. 나는 그가 먹인 칼국수와 빵과 여러 잔의 커피, 튀긴 새우와 오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또 무얼 먹었더라. 왠지 더 많은 것들이 더 많은 먹을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먹일 것이고 우리는 더 많은 식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왜인지 그런 것이 보였다. 다음에는 내가 먹을 것을 맛있는 것을 우리를 먹이고 키울 것을 사야지 생각하며 걸었다. 시장에서 칼국수를 사 먹고 좀더 걷다가 이전에 지나가다 들어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던 카페로 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좀더 걷다 내일 아침에 먹을 빵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지는 태양은 하늘을 서서히 붉게 만들었고 나와 비슷한 그는 퇴근을 하며 이 빛 속에서 이 어둠 속에서 함께 걸을 것이다. 그는 나와 어디서 헤어질까 어디서 엇갈릴까 어쩌면 나의 옆집에 사는 그에게 인사를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서울로 출근하면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는데 어제 오늘은 그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장소를 옮기면 의외로 많은 것들이 바뀐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테이블에 앉았을 때 텔레비전은 없지만 신문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고 내일 아침에는 신문을 사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씻고 책을 보다 잠을 잤다. 


아침에는 커피와 어제 산 빵을 조금 먹다가 집 근처 편의점에서 신문을 샀다. 가끔 기사를 챙겨보던 중앙지 하나와 부산 지역신문 하나를 샀다. 부산 지역신문에는 코모도호텔 대표의 인터뷰가 있었다. 코모도호텔은 늘 멀리서만 봐서인지 내게는 부산타워처럼 멀고 높은 느낌을 주는 건물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언덕을 걷다보면 종종 어깨 뒤쯤에서 갑자기 등장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의식하게는 되지만 현실감은 없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오늘 호텔을 운영하는 대표의 인터뷰를 읽다보니 이전보다는 구체적인 실체로 가깝게 다가왔다. 대표는 여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힘들 때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헤치며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호텔의 음식에 특히 정성을 기울인다고 말하며 늘 신선하고 좋은 재료를 구입하고 있다고 했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지면서 언제 묵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 나는 부산에 집이 있는 사람인데 웬 호텔인가. 아니 서울에서도 가끔 호텔에서 묵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당분간은 안 돼, 안 돼라고 생각하며 신문을 넘겼다. 테이블을 창문 아래에 바싹 붙여두어서인지 테이블 위 신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신문의 반을 비추고 있었다. 두 개의 신문을 대충 훑었을 때 찬송가가 시작되었고 어제 들어갈 때 보았는데 그 집에는 작은 마름모가 반복되는 형태의 철제 창이 복도 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찬송가를 세 곡 부른 후 설교가 시작되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나가 걷다가 차이나타운의 식당에서 중국식 데운 두유와 튀긴 빵을 사서 먹었다. 점심까지 배가 고플 것 같지 않았다. 두유를 다 먹긴 힘들어 남겼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나는 이제 음식을 남기는 것이 싫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설교 말씀이 끝나고 신앙 상담이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여성 진행자가 고전적이고 차분한 목소리로 사연을 읽고 답을 해주고 있었다. 열쇠로 문을 열고 문손잡이를 돌릴 때 그 순간 그 진행자에게 강렬하게 의지하고 싶어졌고 나의 고민은 이대로 나의 인생이 변함없으리라는 것이에요라고 나조차도 생각지 못한 나의 고민이 쉰 목소리로 들려왔다. 문을 잠그고 옷을 갈아입고 물을 끓이자 그런 감정과 목소리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오늘 저녁 약속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아직 몇 장 넘기지 못한 책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뭔가를 조금씩 쓰기도 했고 배가 고프면 어제 산 빵을 먹었다. 삼십 분쯤 낮잠을 잤고 일어나서는 책을 마저 읽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기도 했다. 이를테면 읽고 있는 책의 번역자에게. 당신이 번역한 이 작가의 책을 모두 찾아서 읽었습니다. 한 권을 빼고는 옮긴이의 말이 없더군요. 저는 당신의 옮긴이의 말을 읽고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앞으로 저는 당신이 번역을 할 때마다 옮긴이의 말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지금 어디인가 하면, 잠시 서울의 집을 떠나 부산에 있는데……


―어디예요?

―저 아파트예요. 방에 있어요.

―여덟시에 데리러 가면 될까. 지난번 본 부동산 앞에 나와 있을래요?

―네 그럴게요.

―편한 신발 신고 와요.


그러고 보면 이번에 올 때 가져온 옷과 지난번 두고 온 잠옷 말고는 옷이든 신발이든 가져다놓은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 안심해서 짐을 마구 늘려버릴 테지만 아직은 무엇이 벌어질지 몰라 겁을 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 같다. 책을 좀더 읽다가 옷을 챙겨 입고 충무김밥을 사 먹고 커피를 마시고 조금 걷다 여덟시에 맞춰서 부동산 앞으로 갔다. 최선생은 네이비 퀼팅 코트에 회색 숄을 걸치고 있었다. 검정 부츠가 예뻤고 신어보고 싶군 생각하며 인사를 했다.


―멋있으신데요?

―그런가. 평소랑 똑같은 것 같은데?


그는 웃으며 앞장섰다. 별로 춥지 않으니 걸을까 했지만 아무래도 힘들어서 차를 타고 가자고 말하였다. 선생의 옆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우리는 왜 이렇게 금방 아니 나는 왜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이 사람을 따르고 있지. 나를 어디로 끌고 가 팔지는 않겠지 뒷좌석에 숨어 있던 누군가가 내 목에 칼을 들이밀지 않겠지. 나는 그걸 의식해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다음에는 친구들이 부산에 놀러오기로 했으며 오늘 가는 곳도 친구들이 데려다달라고 했다고 했으며 내가 오늘 어디로 향하는지 나의 주변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래 친구들 오면 좋지.

―그죠.


어렵고 긴 아파트 이름을 지나고 밤의 가로수는 당신은 다른 삶의 한가운데로 향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고 봄이 되면 이 주변에는 벚꽃이 핀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꽃이 피지 않아도 충분히 좋아요.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를 주차하고 선생님은 손잡이를 잡고 뒤돌아 물었다. 당신 술을 잘 마시니? 잘은 못 마셔요. 바 주인도 최선생을 최선생님이라고 불렀고 그는 왼쪽 바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주인이 추천해주는 대로 네 잔씩 마셨다. 주인은 매 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고 모두 맛있는 술이었다. 약간 취했지만 기분 좋게 흔들흔들거리는 정도였고 다 마시고 일어났을 때 가게 밖은 그새 비가 왔는지 젖어 있었다. 화장실에 갔다 왔더니 술은 또 최선생이 사고 나는 무얼 사야 할까 무언가 사자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나 일단 기분이 좋았고 젖은 물냄새와 비 냄새가 낙엽과 섞여 영원히 걷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차는 두고 가실 거예요?

―아 우리가 친한 사이거든. 나중에 저 사람이 타고 올 거야. 


나와 선생님은 비에 젖은 내리막길을 걷고 어떤 집에서는 색소폰 연습을 하고 있었고 고양이들은 담장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밤은 선생님 집으로 가 물론 나의 집도 어떤 의미에서는 선생님 집이긴 했으니 굳이 선생님 집이라고 하는 것이 우스울지도 모르겠다. 앉아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보니 몸을 일으키기가 귀찮았고 그는 잠옷과 칫솔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씻고 나와 다시 차를 마시고 서서히 술이 깨어 다크초콜릿을 먹으며 방금 텔레비전에서 시작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와 영화 사이 광고는 길고 나는 저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며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려 하였지만 이미 본 영화의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간단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그런 영화예요라고 말하려 하였으나 시작부터 막히자 설명이 길어지고 누구였더라 그다음에는 그래서……라고 이야기는 덜컹거리고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았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막다른 골목 앞에 서 있거나 지나가는 사람과 함께 사라지거나 눈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광고는 곧 끝이 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얼버무리다 영화는 다시 시작하였다. 차를 마시며 영화를 집중해서 보다가 다음 광고쯤 이를 다시 닦고 이어서 보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가끔 내가 그 영화를 지어냈다면, 그 여자는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내가 보았던 것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면…… 생각한다. 최선생은 언제쯤 없는 영화를 지어낸 나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게 될까.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에 거짓말을 지어내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지 아니면 조금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지.  

최선생은 싱글 침대와 오래된 책이 있는 작은 방을 내어주었다. 나는 책을 조금 볼까 했으나 핸드폰을 체크하다 잠이 들었다. 최선생과 함께 술을 마신 이야기까지는 친구들에게 했으나 집주인의 집에서 잔다는 이야기는 역시 조금 이상한가 싶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내일은 무얼 할까 잠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생각하다 어느 샌가 잠이 들었다. 꿈을 꿨는데 내가 설명하려 애쓰던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내 친구와 같이 구내식당 같은 데서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배우는 나와 친한 사이였는데 그 순간 왜인지 나는 내가 그를 보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서 뒤를 돌아 식당을 나갔다. 내 옆에는 나의 남편이라고 하는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꿈속에서 남편으로 설정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내가 남편이 있다는 사실을 그 배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그 배우를 끊임없이 의식하며 나는 길을 걸었다. 그는 왜 내 친구와 같이 밥을 먹었을까. 내 친구는 그를 어떻게 알며 둘은 왜 사이가 좋아 보였을까. 나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그럼에도 그에 대한 그리움, 친구에 대한 질투가 뒤섞여 복잡하고 괴로운 마음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휴대폰 메모장에 ‘다음에 쓸 것―불륜’이라고 적고 다시 잠들었다. 


내가 보다가 잠이 든 영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아침에 최선생과 빵을 먹으며 들었다. 우리는 커피와 빵 치즈와 사과를 먹었다. 최선생은 나와는 반대로 두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남자는 좋은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을 챙기는 일에 자신이 가진 많은 시간과 돈을 써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망했던 운동선수로의 과거를 그것이 과거임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그것이 그의 약점이었다. 그의 연인이자 능력 있는 직장인인 여자는 자신의 능력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던 전 상사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여자는 다른 직장으로 다른 일을 찾아서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던 사람 밑에서 함께 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자는 능력이 있고 새로운 일 맡은 일 모두 꼼꼼히 처리해내는 사람이고 사업을 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은 누군가를 돕고 그 사람이 계획을 잘 펼쳐나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 여자가 참 이해가 가.

―선생님은 사업을 하시잖아요.

―결국에 그 여자가 사업을 하게 될까? 나는 할 것도 같고. 그런데 그 대표 회사의 한 지점을 맡는 그런 식의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 그렇게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참 드문 것이거든. 


여자는 여동생을 챙기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챙긴다. 집에 급한 일이 생길 때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 가져다준다. 여동생은 불량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밤에 몰려다니는 청년들과 노는데 여자는 그들과도 함께 어울린다. 여동생은 또래들과 빈 빌딩에서 지내는데 빌딩 옥상에서는 커다란 전광판이 보였다. 손을 뻗어도 전광판을 만질 수 없지만 사진을 찍는다면 전광판 앞에서 찍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어젯밤 보다가 잠든 영화 속 도시의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나는 마천루라는 말을 고가도로라는 말을 그런 단어들이 가져오는 시원한 공기를 아주 어릴 때부터 동경해왔다는 것이 기억났다. 마천루라는 말은 이제 더이상 쓰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어제 본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쓸 것 같았다. 사람들은 마천루 아래를 걷고 우울한 표정을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 미래는 밝기만 한 것처럼 여길 것이다.  


선생님은 다음에 부산에 올 때 시간이 나면 꼭 또 연락하라고 하였다. 꼭 또. 나는 정말로 다음에는 제가 뭔가를 대접할게요 대답했다. 제가 너무 받아먹기만 한 것 같아요, 너무 감사해요. 고개를 여러 번 숙이고 문을 닫고 아파트를 나왔을 때 이 길을 이렇게 내려오고 꺾고 올라가고 오른편에는 아직 공사중인 건물이 있고 맞은편에는 은행 간판이 보이는 것을 어째서인지 집중해서 외우고 있었다. 근처를 조금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 대충 청소를 하고 남은 빵을 가방에 넣고 버릴 쓰레기들을 내놓았다. 영화 속 여자는 남자를 깊이 사랑하고 둘이 만들어갈 미래를 꿈꾸지만 남자도 같은 것을 꿈꾸는지 알 수는 없었다. 최명환은 여자와 여동생이 서 있던 그 전광판이 도쿄 긴자의 한복판에 있는 전광판과 비슷하다고 하였다. 긴자에도 꼭 그런 전광판이 있거든. 나는 대전역 근방의 커다란 서울우유 전광판과 종각역 근처의 빠이롯드 전광판을 떠올렸다. 그것과 이것은 비슷하지만 사실 비슷하지 않다. 서울의 집은 집을 비울 때도 보일러를 켜두고 나갔는데 부산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좋았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때 조금은 춥겠지만 참을 만할 것이다. 문을 닫고 자물쇠를 잠그고 밖으로 나갔을 때 나는 어젯밤 내가 본, 오늘 아침 최선생이 들려준 영화 속 여자처럼 당당한 자세로 그러나 어느 순간 쓸쓸한 눈으로 걷고 또 걷고. 최선생은 그러나 자신은 그 여자처럼 가족들을 챙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챙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해달라는 대로 해주지 않았고 더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래서 미움을 받았던 거야. 나는 정말 많이 미움을 받을 때가 있었어.

―지금은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시고. 부모님은 그러니 다 돌아가셨지. 가족들을 그래서 자주 안 봐. 


돈을 모으고 또 모으고 벌고 모으고 혼자서 돈을 모아서 미움을 받던 최명환. 내가 부산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은 최명환이고 가장 자주 만난 사람도 최명환이었다. 지난번과 다름없이 이번주에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바의 주인과 만나 이야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를 밝은 곳에서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내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와 비슷하지만 내가 아닌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곧 사라질 사람들이 된 것처럼 스스로를 여기며 걸었고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는 생각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이 늘 때로는 그것만이 생생했다. 기차를 타기 전 돼지국밥집에서 수육 백반을 먹었다. 맛있었고 마늘과 양파를 생으로 잔뜩 씹어 먹었다. 배가 부르니 다음날 출근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준비도 안 되었고 자신도 없었지만 그냥 이제 가는구나 갑시다의 마음이 되었고 커피를 사서 기차에 올랐다. 먹다 남긴 이틀 전에 산 빵도 먹었다. 내가 알게 될 뻔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일들을 입안에 머금은 채 가끔 침을 모아 삼켰다. 삼켜지지 않으면 괴로운 표정으로 걷다 물을 마셨다. 그러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가끔 이전처럼 음악을 듣고 싶다고 생각한다. 조용한 곳에서 플레이어에 음반을 넣고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내가 알게 될 뻔한 사람들 중 한두 명은 그렇게 음악을 듣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이런 것이 쓰여 있었다.


다음에 쓸 것들


1. 불륜물

2. 범죄를 저지른 사람―탐정들과 함께 갱생하기


서울의 집으로 가 씻고 책을 보다 잠이 들었다. 부산에서의 시간은 늦여름 오후처럼 늘어졌고 그럼에도 가끔은 무척 생생한 순간들이 있었다. 다시 부산에 가기 전까지 서울에서의 시간은 압축적으로 흘러갔다. 연말의 해야 할 일들 해치워버려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주일에 하루이틀은 무척 추웠고 무척무척 춥다고 말하면서도 연말의 약속들과 남은 일들을 해나갔다. 그래도 몇 년 전보다는 약속이 줄었고 들뜬 기분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가까운 친구가 입원을 했고 병문안을 다녀왔다. 연말이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잠이 들기 전 사람들에게 실수를 했거나 갑자기 화를 냈던 일들이 떠오를 때가 많았다. 집에는 짐이 늘어갔고 연말과 신년에는 냉정한 마음으로 많은 것을 버리고자 하였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한 달여의 시간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