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Wisdom Teeth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허깨비 같은 세월 속에서 수도 없이 그려온 순간.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죽음이 죽음의 일을 하듯 나는 내 일을 하면 된다. 읽고 해독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일. 내 부고의 내용을 한 자, 한 자 뜯어본다.


  빈소: 서울중앙병원 장례식장 2층 2호실

  발인: 7일 오전 8시


서울중앙병원이라면 암호 해독 열쇠는 성경책이었다.

첫 줄 숫자는 목차에서의 순서. 스물두번째라면 욥기.

두번째 줄 첫 숫자는 장, 다음 숫자는 절 번호이니 7장 8절.

부고에 감춰진 메시지를 상기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성경책을 펼쳐보지 않아도 됐다.


  나는 이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게 되어

  당신의 눈이 나를 찾으신다 하여도

  이미 자취도 없을 것입니다.



내 이름은 라이터.

아니, 라이카.

아니, 아니, 내 코드 네임은 라이카.

무의식 깊숙이 묻어둔 세 글자가 기어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오고야 말았다. 그분이 이 몸을 부르시는 날이.



라이카는 독일의 에른스트 라이츠사에서 1925년 출시한 35밀리 카메라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이 혁신적 제품은 기존 카메라들과 달리 휴대가 용이했다. 금속 재질로 마감되어 내구성이 뛰어났지만 무겁지 않았다. 필름 한 통으로 서른여섯 장이나 찍을 수 있었고 웬만한 확대 인화에도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스파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대도 과언이 아니다. 첩보의 역사에 완전히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내 코드 네임이 된 그 물건을 정작 나는 가져본 적도, 다뤄본 적도 없었다. 사진 찍기라면 사진 찍히는 것만큼이나 관심 없다. 사진을 공해로 여기는 사람이 바로 나다. 뱃속에서 결국 꿀꿀이죽이 될 음식은 왜 그리 찍어대는지. 불꽃놀이든, 벚꽃 터널이든 들춰보지도 않을 휴대폰 사진첩이 아니라 눈동자에 꼭꼭 담아둘 일 아닌가. 폭죽 타는 냄새, 꽃송이를 흔드는 바람의 감촉과 함께.

긴말 필요 없고 나에겐 카메라라는 물건 자체가 필요 없었다. 눈이 렌즈요 뇌가 필름이었다. 금속탐지기 할애비도 내 눈썹 밑에 대놓고 붙어 있는 고성능 카메라는 잡아내지 못했다. 실오라기 하나까지 벗겨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항문까지 샅샅이 훑는 보안검색이라도 무사통과였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해장국을 한술 떠 넣고 씹는데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앞접시에 뱉어냈다. 알곡 크기로 누르스름하다. 뼛조각일까. 손끝으로 집어 올려 자세히 보니 거뭇거뭇한 얼룩도 있다. 나도 모르게 혀를 상악 안쪽에 대봤다. 맨 끝 어금니가 날카로웠다. 언제 빠졌는지 금 보철물은 온데간데없이, 분화구처럼 팬 본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나마 분화구 테두리의 거진 절반이 떨어져나갔다.

뼛조각이 맞았다.

돼지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었지만.

정확히는 나의 18번 치아였다.



인간 카메라.

햇병아리에 불과했던 사십팔 년 전, 평양 밀사 수행원으로 차출된 이유도 압수될 위험이 없는 카메라였다. 적의 심장부를 에워싼 공기까지 뇌리에 고스란히 담아오는 게 내 임무였다. 회사에서 특별히 촉각을 곤두세운 대목은 김일성의 건강이었다. 건강 이상설이 해외 첩보망을 심심치 않게 흔들었지만 매번 진위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최고지도자 동지의 몸 상태는 일급 중에서도 일급 기밀인데다 사진 한 장 입수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게다가 흑백사진으론 혈색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다.

“고혈압과 당뇨, 각종 심혈관계 질환의 가능성이 의심됩니다.”

그때도 의사들은 하나 마나 한 소리만 뇌까렸다. 그러다 결론은 혈액검사를 하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

용하기로 소문난 관상쟁이, 점쟁이들도 회사에 불려왔다. 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관상은 얼굴 생김새가 아닌 몸의 기운이라며 입을 다문 자도 있었고, 곧 죽을 사람 운은 왜 묻느냐며 돌아나간 자도 있었다. 한번은 김일성 사진을 보자마자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보란듯 밟고 지나간 자도 있었다.

김일성 피를 몰래 뽑아오거나 태어난 시를 알아내는 건 내 임무가 아니었다. 내 목표물은 김일성의 오른 뒷덜미에 난 혹이었다. 핵미사일 버튼을 이식했다는 둥, 죽은 김일성을 대신하는 카게무샤라는 둥, 젊은 피로 피갈이하다 부작용이 왔다는 둥, 첫 포착 이래 타블로이드판 기사의 단골 소재가 된 바로 그 혹.

회사는 그것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정보력을 집중했다. 크기는? 형태는? 색깔은? 특이점은? 공산주의자들이 친절히 알려줄 리 없었다. 외국 정상과 악수하는 사진에서조차 김일성은 혹이 노출되지 않는 자리에만 서 있었다. 감추려는 쪽과 들추려는 쪽. 혹을 둘러싼 숨바꼭질이 십 년 넘도록 치열하게 펼쳐졌다. 소문과 억측 속에서 혹은 바깥 세계의 관심만큼 커지고 있었다. 탁구공에서 테니스공으로, 테니스공에서 야구공으로.

평양행을 앞두고 나는 혹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머릿속에 구축했다. 갖가지 혹 사진을 수 백, 수천 장 들여다봤다. 김일성을 직접 보게 되더라도 혹을 제대로 관찰하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전모를 한눈에 파악하는 훈련도 병행했다. 정지한 구체부터 시작해 움직이는 구체로, 움직이는 속도를 점점 높이는 방식으로 난이도를 높여나갔다.

나는 완벽히 준비가 돼 있었다. 얼마나 멀찍이 떨어지든, 얼마나 빨리 이동하든, 얼마나 짧은 순간이든 내 조리개에 잡히기만 하면 정확한 숫자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김일성의 우측 후방, 경호 역량이 집중될 라인으로 파고들어야 했다. 혹을 눈에 한 번 담으려다 영원히 눈감게 될 수도 있었다.

죽기를 각오한 삼 박 사 일. 만일에 대비해 청산가리 캡슐을 어금니에 심었다. 정확히는 썩은 사랑니를 갈아낸 자리에 끼우고 골드 크라운을 씌웠다. 자백 주사가 정맥을 찔러오기 전에 터뜨려야 했다. 목을 내줄지언정 기밀은 넘겨줄 수 없었으니까. 미국 탁구선수들이 북경에서 스포츠 외교를 펼친 게 한 해 전이고 몇 달 전에는 닉슨 대통령이 만리장성까지 올랐다지만, 평양은 북경이 아니었다. 여러 면에서 북경보다는 북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가까웠다.

이십 년 가까이 이어져온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의 승리 선언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미국은 주먹을 거둬들였고 남베트남은 수건을 던질 적절한 때만 찾는 듯했다. 아니, 남베트남은 다리가 풀린 지 오래였고 수건을 던진 건 미국이었다. 그러니 닉슨의 북경행은 자기 선수를 향해 주심이 열을 세고 있는데 상대 세컨드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한 격이었다.

베트남 적화는 역설적으로 남한 내부를 결속시킬 호재였지만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헛된 꿈에 불을 지필 불똥일 수도 있었다. 김일성은 전면전이라는 도박에 또다시 나설 것인가. 호찌민이 거머쥔 판돈을 강 건너 불길로 치부할 것인가. 북한 최고 권력자의 의중에, 건강에, 혹의 크기에 그 어느 때보다 안테나를 높이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심장부는 의외로 선선히 우리를 맞이했다. 환영 브라스밴드는 없었지만 알몸 수색도 없었다. 능라도가 내려다보이는 모란봉초대소 객실에 짐을 풀었다. 주요 외빈들을 묵게 하는 최고급 국영 호텔이었다. 만경대, 을밀대, 부벽루, 평양대극장.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다는 점만 빼면 관광이라도 간 것 같았다. 식사도 매번 진수성찬이었다. 냉면처럼 익숙한 메뉴부터 토끼탕, 꿩 백숙같이 생소한 메뉴까지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였다.

“남조선 동무, 왜 안 드십니까? 아, 청산가리라도 탔을까봐 그럽니까? 내래 먼저 시범을 보이면 안심하시갔습니까?”

청산가리라는 말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시라요. 일없습네다.”

뭐가 우스운지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꿩은 길들여지지 않는 짐승이라 꼭꼭 씹어 드셔야 합네다. 기래 설렁설렁 삼켰다가는 똥구녕에 홰를 치는 수가 있습네다.”

우리 내부에 빨대가 있었던 걸까. 공산주의자들은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번번이 질긴 고기가 나오는 것도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평양까지 어둠을 틈타서만 이동한 건 인간 카메라를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게 할 때도, 개성에서 난데없이 헬리콥터로 갈아 태울 때도? 밤이 아니었다면 최전방 적군의 배치 현황과 동태가 낱낱이 포착됐을 텐데.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음씨 좋은 사촌 형제처럼 웃고 있는 이자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남한 어느 은밀한 구석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을까. 혹시 잠들어 있는 틈에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예측 불가능성. 일 분, 일 초 뒤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 최악의 적이었다.

김일성과의 면담도 그랬다. 사선을 넘어 거기까지 가는데 적어도 한 번은 만나주겠거니,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 물밑 협상 때부터 확실한 언질은 없었지만 불가하다는 뜻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공산주의자들 특유의 연막전술에 놀아난 걸까. 위장 평화 전술의 병풍으로 이용되는 건 아닐까. 짙은 안개에 갇힌 기분이었다. 김일성이라는 안개. 실제로 수많은 김일성에게 둘러싸인 하루하루였다. 만수대 언덕에 우뚝 선 동상으로, 건물마다 걸린 사진에서, 항일 빨치산 투쟁 선전영화 속에서, ‘지상낙원’ 건설 과정이 담긴 기록영화 속에서, 수천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려내는 카드섹션으로. 하지만 진짜 김일성은 그림자조차 구경할 수 없었다.

예정된 일정이 끝나갈수록 피가 말랐다. 내 임무까지 새나갔나. 혹은커녕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인가. 만에 하나 그랬다면 진즉 눈알이 뽑혔겠지. 부장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김일성을 접견하지 못하는 건 직이 날아갈 수도 있는 실패를 의미했다.

환송 만찬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다음날 새벽 어스름이 걷히기 전 평양을 떠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문자 그대로 최후의 만찬인 듯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노동당 실세들이 대거 참석한 자리였지만 김일성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찬은 가벼운 술자리로 이어졌다. 카운터파트를 자처한 조직지도부 사람들이 숙소까지 따라와 마련한 자리였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김일성에게 데려갈 일은 없다는 선언 같았기 때문이었다.

“수상(김일성의 공식 직함이었다)께선 많이 바쁘신가봅니다.”

부장이 술잔을 드는 시늉만 하며 넌지시 물었다.

“술이나 드시라요.”

부장에게 술을 따른 공산주의자(조직지도부 부장이라 했다)가 대꾸했다.

“먼 길 떠날 사람이 무슨 술이겠습니까.”

“먼 길 가시니 목을 축이셔야지요.”

“허허. 성의는 고맙지만 일할 때는 안 마십니다.”

“부장 동무는 이거이 모두 사무로 보이십니까? 서울깍쟁이가 헛말은 아닌가봅네다.”

부장이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공기가 일순 냉랭해졌다. 내 맞은편에 앉은 공산주의자가 자꾸 벽시계를 흘긋거리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데이트 약속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상황이었으니까.

맞은편 공산주의자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TV 쪽으로 갔다.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익숙한 시그널 뮤직이 귓전을 울리자 온몸의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브라운관에 펼쳐지던 오프닝 타이틀 역시 너무나 익숙했다.

‘미 제국주의 앞잡이 남조선’의 범죄 드라마 <수사반장>이었다.

“동무도 알다시피, 우리 위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범죄라는 사회악은 구경할래야 구경할 수가 없디 않소. 어캅네까. 불평등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부패한 남조선 연속극이라도 관람해두어야디. 어데까지나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말이오.”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일어난 공산주의자가 말했다. 시선은 화면에 붙박인 채였다. 다른 공산주의자들도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들 듯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손목시계로 향했다. 20시 정각. 최고 인기 프로그램만 차지할 수 있는 안방극장 황금시간대. 서울과 일 초도 어긋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가깝지만 먼 곳인 줄 알았는데 멀지만 가까운 곳이었다(실제로 서울은 북위 37도, 평양은 북위 39도다). 시차가 있을 수 없다는(서울은 동경 126도, 평양은 동경 125도) 논리적으로 당연한 사실도 낯설기만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우리가 눈뜨는 시간에 이미 일어나 있고, 우리가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똑같은 프로를 들여다보고 있다. 생김새는 물론 언어조차 다르지 않은 가장 치명적인 적들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수사반장>이, ‘자본주의 모순을 성과적으로 자백하는 연속극’이 방영되는 동안엔.



“BTS도 몰라? 할아버지 간첩이야?”

아직 초등학생인 손녀 아이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알거렸다.

모르는 게 없는 척하는 저 어린것들은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 간첩들은 남한에 대해 남한 사람들보다 더 잘 안다. 뭘 모르는 사람은 아예 간첩일 수 없다. 모르는 게 없는 자가 바로 간첩이다.


구겨진 양복 차림으로 새벽녘 하산하는 자.

특별한 벌이가 없는데도 고급 담배를 즐겨 피우는 자.

오래도록 연락이 끊겼다 갑작스레 찾아온 친척.


남한 사람이면 누구나 줄줄 외던 간첩 식별 요령이야말로 간첩들의 제1행동수칙이었을 것이다.


구겨진 양복 차림으로 새벽녘 하산하지 말 것.

오래도록 연락이 끊긴 친척은 방문하지 말 것.

고급 담배를 피우고 싶다면 특별한 벌이가 있는 척할 것.


“요새 양복 차려입는 사람이 어딨어? 울 담임도 안 입는 양복을. 담배 피우면 간첩이 아니라 야만인이지. 갑자기 찾아오는 친척은 돈 빌리러 오는 거고.”

손녀 아이는 벌써부터 할애비를 가르치려 들었다. 그러면서 휴대폰 터치 몇 번으로 새로운 답을 찾아냈다.

“CCTV를 흘긋거리는 남자. 현금만 쓰는 남자. 병원 가기를 꺼리는 남자.”

영락없이 내 얘기였다. 그 기준대로면 나야말로 백 퍼센트 간첩이었다.

나는 간첩인가? 이 어린것들 눈에 나는 적대적 세계에서 침투한 간첩 같은 존재인가? 냄새난다며 곁을 내주지 않는 건 핑계에 불과했던 건가?

나도 방탄소년단은 안다. 영문 약자로도 불린다는 사실까진 몰랐을 뿐. 보이 그룹이니 소년단이겠지만 왜 방탄일까. 방탄조끼가 연상되는 그룹명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지만. 혹시 ‘방송 탄’의 줄임말인가? 손녀 아이에게 물어보느니 차라리 간첩에게 묻는 편이 낫겠다.

“요번 회부터 연기자 동무들이 진짜배기 형사들과 일과적으로 한솥밥을 먹는댔지?”

“글티요? 연기가 전보다 현실적이지요?”

“스타니슬라프스키 동무 이론이야 미 제국주의자들도 인정하지 않았소. 말론 브란도 같은 연기자들도 메소드, 메소드 한다는데 것도 모르고 딴소리면 간첩이지.”

<수사반장>에 이목을 모은 채 공산주의자들이 떠들어댔다.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배우들이 현직 형사들과 함께 숙식했다는 얘기는 거짓에 오염된 정보가 아니었다. 서울로 살아 돌아와 사실을 확인하고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을까? 돈 벌 궁리 할 새도 따로 없이 오로지 적을 연구하는 데 모든 걸 쏟아붓는 자들을? 평양에서 그 얘기를 들은 시점은 남한 언론에도 사실이 공개되기 전이었다. 공산주의자들도 다 아는 얘기를 모르는 나는 그들 기준에도 간첩이었다.

남과 북 모두에서 간첩이라면 나는 이중간첩인 셈이었다. 매 순간 사선이라는 외줄을 타온 나는 삶과 죽음의 이중간첩이었는지도 모른다. 삶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죽음에도 깨끗이 녹아들지 못하는.



의사들에게 이제껏 들은 흰소리 중 넘버원은 단연 이거였다.

“가급적 햇볕을 많이 쬐도록 하세요.”

하마터면 내 직장명을, 회사 슬로건을 내비칠 뻔했다.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指向한다.’

이제야 하는 말인지만, 처음부터 거슬리던 문구였다. 부훈部訓이 검정 글씨로 음각된 거북이 모양의 새하얀 화강암을 의구심 없이 지나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음지에서 일하는 것에 긍지를 갖지 못할망정 왜 딴 세계를 마음에 두나. 음지식물이 볕을 쬐면 말라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새벽은 어둠이 녹슬어가는 시간이라지 않는가. 내게 권한이 있었다면 마지막 대목에 붓을 다시 댔으리라.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止揚한다.’

얼마나 철학적인가.

나는 의사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러면 의사들은 잘 보이려 한다. 권위를 인정받으려 묻지도 않은 말들을 술술 분다. 무심해 보이는 심문자를 더 두려워하는 피심문자처럼. 방법적 부정을 통해 더 높은 단계의 긍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노라고 강변할수록 뒤에 오는 예스는 치명적이게 마련이다. 빨갱이들에게 저들이 죽고 못 사는 변증법을 돌려주자는 취지다.

이십오 세기 전, 중국의 한 병법가도 이르지 않았나.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다.



그나저나 그분은 어떻게 찾아간다?

청송교도소 앞에서 그분을 마지막으로 뵌 지 어언 스무 해. 빨갱이들을 잡아들였다는, 훈장을 받아도 모자랄 업적이 억울한 옥살이의 구실이 되었다. 내란 모의의 수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결과였다.

출소일은 영혼마저 녹아내릴 듯한 삼복염천의 한복판이었다. 교도소 철문을 걸어나오던 그분은 수감 당시 겨울 코트 차림 그대로였다. 그분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땀범벅이 된 얼굴로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우리는 그분 주위를 빙 둘러 인의 장막을 치고 우리가 준비한 모시 적삼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두부 한 모를 천천히 씹어 마지막 한입까지 다 삼킨 뒤 마침내 그분이 입을 뗐다.

모두들 출옥 일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숨소리를 죽였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인간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매미들이 예포라도 쏘아올리듯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바람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문맥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라다크라는 인도의 어느 지방에 전해져오는 경구임은 나중에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의 속뜻을 그 자리에서 간파했다. 그것은 한 치의 굽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내면을 호랑이로 가득 채워야 한다. 줄무늬를 안에 감춘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송곳니와 발톱이 떼인 우리가 견지해야 할 투쟁 노선이기도 했다. 나는 호랑이를 대면한 것처럼 전율했다. 이르고 늦은 개인차는 있었으되, 그늘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땡볕 속에서 호랑이 줄무늬를 마음 깊숙이 새겼다는 점에는 예외가 없었으리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호랑이 기운으로 충만해 가까운 계곡으로 차를 달렸다. 이끼 낀 자갈밭에 모닥불을 피웠다. 너울거리는 불꽃 위에 무쇠솥을 걸고 계곡물을 펄펄 끓였다. 삼나무에 누렁이를 산 채로 매달고 돌아가며 빨랫방망이를 휘둘러 천천히 숨통을 끊었다. 모닥불에서 빼낸 장작으로 몸뚱이를 그슬리고 된장을 발랐다. 다음부터는 그분이 모시 적삼 소매를 걷어붙였다.

“영혼을 칼날에서 건져주시고, 목숨을 개의 아가리로부터 구해주소서.”

시편 22장 20절. 그분이 손수 끓인 보신탕을 입에 대려면 들어야 하는 기도였다.

변함이 없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감옥살이도 그분의 손맛을 교정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맛이 더 깊어진 느낌이었다.



내 시선은 뼈와 살점이 담긴 앞접시로 내려갔다. 접시에서 건져 냅킨 위에 올려놓은 어금니 조각이 어떤 계시처럼 보였다.

“나를 찾지 마라. 때 되면 내가 너희를 부를 것이다.”

출옥 기념 회합을 파하고 각자의 음지로 돌아가던 즈음 그분이 말했다.

간밤의 꿈은 부르심의 전조였다. 아둔한 내가 알아채지 못하자 헷갈릴 수 없는 메시지를 손에 쥐여준 것이다. 신문 부고와 함께.

저것은 단순한 이 조각이 아니라 내가 선을 대야 할 점이 누구인지 가리키는 암호문이다.

깨진 치아는 18번.

“한국에서는 사랑니라고 부르지만 영어로는 위즈덤 티스wisdom teeth지. 서양인들이 역시 리즈너블해. 러브 티스라니, 코리언은 투 머치 센티멘털이야.”

위즈덤 티스. 개의 맛을 같이 본 사람들 중 그 단어를 일깨워준 존재는 오직 하나였다.

내 어금니 조각을 입안에 넣고 물과 함께 삼켰다. 비밀 전문이 적힌 쪽지를 라이터의 도움 없이 인멸할 때처럼.



접선의 기본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다. 자가용은 노출되기 쉽다. 특히 주차된 차량은 동선을 알리는 광고판이나 다름없다. 언제 도착해 언제 떠났는지 타임라인이 초 단위로 특정된다. 꼬리가 붙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도 어렵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운전자들은 부지기수고, 암실을 방불케 하는 선팅된 차창으로는 운전자 인상착의는커녕 탑승 인원조차 파악할 수 없다.

택시는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 범인 검거율이 세계 최고인 건 빼어난 목격자들 덕분이다. 택시 기사란 자들은 룸 미러만으로도 완벽한 몽타주를 출력해낸다. 게다가 그들이야말로 신문訊問의 기술자들 아닌가. 웬만해선 그 집요한 유도신문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다른 점으로 가기 위해 나는 지하철이라는 익명의 혈관에 녹아드는 방법을 택했다. 플랫폼에서든, 차내에서든, 심지어 계단에서도 행인들의 시선은 손에 쥔 휴대폰 화면에 붙박여 있다. 바닥에 드러누워 비명만 지르지 않는다면 무사히 목적지로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경계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때가 때이니만큼 돌다리도 두드려보아야 했다. 무임승차할 권리를 잠정적으로 포기하고 일회용 패스를 끊었다. 게이트 전자 패드에 댈 때 나는 소리로 65세 이상이라는 신상정보가 노출되기 때문이다. 일반 패스는 삐, 하고 정상 처리 알림음이 한 번이지만 시니어 패스는 삐삐, 두 번 울렸다. 선심 쓰듯 무료 패스를 발급하는 이면에는 반정부 성향이 강한 노인층을 감시하려는 속셈이 깔려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노약자 우선석도 다르지 않았다. 요주의 대상들이 알아서 한데 모여 있으면 대처가 얼마나 용이하겠는가. 대학로 곳곳에 산개해 있던 서울대학교 단과대학들을 관악산 자락에 몰아넣은 이유가 신선한 공기나 마시며 면학에 힘쓰라는 것이었을까. 지도만 봐도 답이 나왔다. 대학로는 청와대와 정부 청사가 지척이고 시위대를 저지하기 위해 차단해야 할 길목이 너무 많았다. 관악산은 대학교 정문과 후문, 두 군데만 틀어막으면 됐다. 그렇게 구석에 몰린 줄도 모른 채,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관악을 보게 하라’ 어쩌고 으스대며 화염병을 들고 나대는 꼴이 같잖았다.

전동차에 오른 뒤에야 휴대폰에 생각이 미쳤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껐다. 이동통신 기지국이라는 그물망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예전 같지 않은 무릎에 내내 노약자석으로 눈이 갔지만 그물 속으로 자진해 걸어들어가는 꽃게가 될 수야 없었다. 마음을 다잡듯 쇠기둥을 움킨 다섯 손가락에 힘을 주는데, 앞에 앉은 젊은 놈 하나가 쭈뼛쭈뼛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했다. 나를 흘끗거리는 주변 시선이 느껴졌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감사 인사와 함께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재촉했다. 더더욱 앉기 싫어졌다. 쓸데없는 짓으로 이목을 모은 녀석에게 짜증이 났다. 아직 내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는 녀석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젊은것들의 공손한 당당함에는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바다 쪽으로 밀어붙이는 장강의 냉혹함이, 꿀벌이 내려앉은 꽃만 정확히 땅에 떨구는 나무의 잔인함이 서려 있다. 몸이 늙는다고 자존심마저 주름이 지는 건 아니다. 몸이 쭈글쭈글해질수록 자존심은 팽팽해진다.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

얼마나 장엄한 진실인가.

‘서로 부둥켜안은 젊은것들 (……) 물고기, 짐승, 새는 여름 내내 잉태되어 태어나는 온갖 생명을 찬미하지. 관능의 음악에 사로잡혀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업신여기지.’

예이츠를 읽었대도 값싼 동정을 동전 한 닢처럼 던졌을까? 김일성을 만난 적 있다고, 김일성을 직접 보았을 때 너희 나이였대도? 내가 그런 사람이래도? 그땐 네 아빠가 네 엄마를 알기도 전이었대도?

나는 시선을 더 끌지 않기 위해 젊은 놈이 비워준 자리에 앉았다. 확실한 한 가지는 그놈이 모른 척 궁둥짝을 좌석에 붙이고 있었대도 언짢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는 사실. 젊은것들이 노인들에게 바칠 수 있는 예우는 눈앞에 얼쩡거리지 않는 것뿐이다. 젊음이라는 과분한 외투가 해져 빛이 바랠 때까지.



어찌 나이를 먹을 수 있으랴. 그날 밤의 기억이, 소설 같은 내 인생에서도 백미로 꼽힐 장면이.

긴장과 낙담 속에서도 얼핏 선잠이 들었던가. 노크 소리에 화들짝 눈뜬 나는 손목을 들어 시계부터 찾았다. 자정을 일 분여 앞둔 시간이었다. 불길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움직여야 할 일이라면 좋은 소식일 리 없었다.

탕탕, 탕탕, 탕탕.

문을 부술 듯 이어지는 노크 소리 또한 우리 편이 아니었다. 부장과 약속한 노크 방식은 길게 세 번, 짧게 한 번, 다시 길게 세 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은 느릿느릿 시간을 끄는 것, 자정 넘겨 새날의 일진으로 문을 여는 것뿐이었다.

“날래 옷 갈아입고 나오라요.”

전날 <수사반장>을 틀던 공산주의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살인 현장을 지키는 경찰처럼 굳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디 좀 가셔야겠습네다.”

“오밤중에 어딜 갑니까?”

“가보면 압네다.”

호텔 정문에는 검정 벤츠가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님은요?”

북측 요원 둘 사이 뒷자리에 낀 내가 물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어디 소속일까. 못 보던 얼굴들이었다. 여러 벌 구운 벽돌 같은 근육이 마주댄 어깨로 고스란히 전해왔다.

앞에서 똑같은 차가 출발하더니 내가 탄 차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부장은 앞차에 있는 것 같았다. 따로 태운 이유가 뭘까?

후득후득 무언가가 차창에 들러붙었다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눈깨비였다. 5월 봄밤의 불청객이 몰고 온 짙은 어둠으로 사위는 겨울밤만큼이나 칠흑 같았다. 거기가 북쪽임을, 시차로는 측량할 수 없이 머나먼 땅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차는 대동강변을 쏜살같이 달렸다. 강물은 보이지 않았다. 희뜩희뜩 새의 날개처럼 한 점으로 접히며 사그라지는 진눈깨비로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차가 갑자기 방향을 획 꺾더니 울퉁불퉁 비포장길로 접어들었다. 오르막이었다. 모란봉 쪽인가? 이 시간 이 날씨에? 적어도 평양의 야경을 보러 가는 길은 아니었다.

연전에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특수부대를 내려보낸 자들이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우리는 여기 발을 들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연기처럼 증발된대도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외빈들을 맞는 양탄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겠지. 한밤의 산속이라면 고문이라는 애피타이저는 생략한다는 얘기인가. 그날 밤의 첫 희소식이었지만 엄습하는 한기는 어쩌지 못했다.

사형수들에겐 매일매일의 복도가 생사의 갈림길이라던가. 길고 어둑한 복도 끝에서 왼쪽으로 잡아끌면 운동장, 오른쪽이면 형장. 서울구치소 형장에는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했다. 목이 매달린 사형수들 눈에 정면으로 담기는 자리라고.

새삼 궁금해졌다. 구치소가 먼저 세워졌을까, 미루나무가 먼저 뿌리를 내렸을까. 그리고 또 궁금했다. 이 차갑디차가운 메인 디시는 언제부터 정해졌는지. 밀사 제안에 응할 때부터?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의 영웅적 항일투쟁을 그린’ 오페라를 보다 내 입에서 하품이 비어져나오던 순간? 부장 입에서 수상이 바쁘냐는 술자리 사담이 튀어나온 직후?

“담배 좀 얻어 피웁시다.”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나는 안간힘을 썼다.

“건강에 해롭습네다.”

왼쪽 요원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게 해달라는 사형수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는 간수 같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담까지 잔인했다. 총으로 끝내겠지? 청산가리 캡슐로 선수를 쳐야 할까? 청산가리보다 총알이 덜 고통스러울까? 죽을 때 죽더라도 당장은 뜻대로 되는 불씨 하나가, 한 모금의 온기가 절실했다. 더이상 누릴 수 없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되새기니 다가올 죽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며칠째 씻지 않은 몸에서 냄새가 났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면…… 긴장이 풀어질까봐 모란봉 초대소 객실에 비치된 욕조를 한 번도 쓰지 않은 것까지 후회스러웠다.


  목욕물 버릴 곳 없다

  온통 진눈깨비 울음소리


준비해간 청산가리 캡슐이 활약해도 이상할 게 없는 최악의 순간, 내 뇌리를 때린 건 토카레프 TT-33이 아닌 어느 하이쿠였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원문 그대로도 아니었다. 원문은 ‘진눈깨비’가 아닌 ‘벌레’였다. 한 번도 깨어난 적 없던 내 창작 충동이 첫 눈을 뜬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두개골 속까지 스며든 바로 그때.

덜컹대던 차가 돌연 얌전해졌다. 다시 포장도로에 올라선 것이었다. 목적지가 산속은 아니라는 얘기. 안도하기엔 일렀다. 고문이라는 애피타이저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는 어두컴컴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두 팔을 붙들린 채 불 꺼진 석조건물로 끌려갔다. 나는 새도 감시한다는 보위부인가? 청와대를 습격했던 정찰국? 남파 간첩의 본산인 대남선전·선동부? 나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몇 걸음 뒤 출입문 너머가 희끄무레한 윤곽을 드러냈다.

대리석 계단이 위아래로 나 있었다. 위층과 지하실. 복도 끝에 다다른 사형수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위는 고문, 아래는 총살. 쿵에 고문, 쾅에 총살.

역시나 깔끔하게 끝내줄 자들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나온 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지만 빛나는 장면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로 터널 같은 인생이었다. 서울구치소에 미루나무가 서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지막 순간 꺼내볼 얼굴 하나 변변히 없는 자들을 위해서였다.

“밤늦게 미안합니다. 만주 시절부터 제국주의와 싸우느라 야음에만 움직인 버릇이 여태 남아 있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이층에서 삼층으로 꺾어 올라가는 계단참을 지날 때였다. 몇 계단 더 오르니 악수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부장과 손을 맞잡고 있는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전동차에서 내렸다. 때맞춰 반대편에서 달려온 전동차로 옮겨 탔다가 출발 직전 도로 내렸다. 꼬리가 붙었다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으리라. 플랫폼 반대편 노선으로 복귀했다. 한 박자 늦춰 닫히는 출입문 사이로 몸을 던졌다.

달리는 전동차에서도 계속 움직였다. 빈자리를 찾는 사람인 양 두리번거리며 다른 칸으로 건너갔다. 그러다 환승역이 나타나면 역시 닫히는 출입문 사이로 몸을 던져 교차 노선 플랫폼으로 향했다. CCTV가 지키고 있으니 엘리베이터는 피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될지 모르니 에스컬레이터(한 줄 서기에서 두 줄 서기로 캠페인이 바뀐 게 정말로 고장을 줄이기 위해서일까)와 무빙워크(어김없이 CCTV가 굽어보고 있는 건 우연일까)도 버렸다.

계단만 고집했다. 오르는 계단은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내려가는 계단이 무리였다. 한 칸, 한 칸 내디딜 때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철제 봉에 매달린 채 게걸음으로 내려가야 했다.

다시 전동차에 뛰어들고 환승역을 기다렸다 한번 더 노선을 바꿨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발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남단에서 북단으로 한강을 가로질렀다. 강철 바퀴와 강철 레일이 맞물리며 철교가 철컹거렸다. 언제부터였나. 한강 북쪽으로 건너갈 때마다 전쟁이 터지는 상상에 빠져든 것은.



환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김일성은 활력이 넘쳤다.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진 면담 내내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격식을 차리지 않는 환담이었다. 녹음은 할 수 없고 메모만 허락되었다. 펜을 놀리는 건 부장 곁에 앉은 나의 몫이었다. 숨은 혹에 정신이 팔려 놓친 대목도 더러 있었지만 김일성 입에서 제국주의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는 점은 확실했다. 그리고 외세라는 말도.

“부장 선생, 통일 문제에 외세가 끼어드는 거 재미없습니다.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방침입니다.”

6·25와 베트남전이라는 통역을 중간에 세우면 그 발언은 이렇게 번역될 것이었다.

“부장 선생, 통일 전쟁에 미 제국주의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민족끼리 끝장을 봐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전략입니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유엔군의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밀렸던 아쉬움을 잊기엔,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거둔 승리를 덤덤히 바라보기엔 그는 너무 원기왕성해 보였다(전쟁을 두 번은 거뜬히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세계 최강 군대를 몰아냈을 때 호찌민은 여든을 넘긴 나이였다. 남북 전쟁에 관한 한 호찌민은 김일성에게 롤 모델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민족 통일의 아버지. 미 제국주의에 일격을 가한 아시아의 호랑이.

“라이카.”

김일성의 목소리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내 코드 네임을 어떻게……

면담을 마치고 부장이 기념촬영을 제안한 직후였다.

“인물 사진은 라이카 M3가 최곱니다. 극적인 걸음 하셨으니 극배우처럼 찍어드려야 손님 대접이 옳습니다.”

김일성이 사진사들 중 하나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그 사진사의 손에 들린 카메라에 익숙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겨우 숨을 쉬고 보니 김일성의 오른편이었다. 혹이 코앞에 있었다. 너무 지척인데다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정확진 않지만…… 그것은 모양도 색깔도 지극히 평범한 혹이었다. 제2의 6·25를 막아줄 희망의 지름은 한 해 전 북경에서 미국 선수들이 중공 선수들과 주거니 받거니 했던 탁구공보다 작았다.



인민군 전차 부대가 밀고 내려오면 남한 군대는 한강 다리부터 끊겠지. 6·25 발발 사흘 만에 그랬듯. 강 밑으로 뚫린 5호선 터널도 멀쩡히 남겨둬서는 안 된다. 나라면 맨 먼저 강물로 채워버릴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두더지 같아서 땅굴이라면 환장할 테니. 이 시간에도 군사분계선 지하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지 누가 알랴.

다리가 끊겨 발이 묶이게 된다면 어찌할까. 이제라도 수영 기초반에 등록해야 하나. 뚝섬유원지 오리배로 한강을 건널 수 있을까.

한강 이남에 거처를 정한 건 전쟁과 상관없었다. 일과 생활, 두 세계를 완벽히 나눠주는 경계선이 필요했다. 물리적 의미뿐 아니라 심리적 의미로도. 한강을 북으로 건너는 차로에는 말 못할 임무를 맡는 내가 있었고, 중앙분리대 너머 남으로 건너는 차로에는 일과에 찌든 평범한 샐러리맨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내게 한강은 데일리 플래닛의 회전문이 되어주었다. 실제로 나는 퇴근길 다리를 건널 때마다 도수 없는 뿔테 안경을 일부러 꺼내 쓰곤 했다. 클라크 켄트로 복귀하는 슈퍼맨처럼.

또다시 환승역이었다.

계단.

계단.

계단.

세 차례 환승으로 속옷이 땀에 푹 젖었다. 이렇게까지 혼선을 줬는데도 꼬리가 붙은 느낌이라면 접선을 깨끗이 포기하고 왔던 길을 되짚어가야 한다.

내 뒤로 전동차에 올라타는 사람은 없었다. 옆 칸에서 건너오는 기척도. 클리어. 실전 감각은 아직 죽지 않았다. 대견한 무릎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나는 자리가 난 노약자석에 몸을 부리고 가빠진 숨을 골랐다.

여유를 찾고 보니 사방이 등산복 차림 노인들이었다. 임진각과 백운봉 사이를 세월아 네월아 느린 속도로 오가는 노선. 이 노선만 타면 마음이 편했다.

뭐랄까. 내 영역에 들어선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