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주어는 어디에 있는가

주어가 뭐였지

친구네 개를 산책시키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다른 개와 그 보호자를 마주칠 때가 있다. 개들끼리 서로 냄새를 맡고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면 보호자들은 개들에게 사회생활 할 시간을 주는 동안 자연스럽게 상대 개의 정보에 대해 묻게 된다. 여기서 조금 묘한 대화가 오가곤 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유~ 이쁘네, 넌 몇 살이니? 이름은 뭐야?” 

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건네는 이런 질문을 받은 상대편 보호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다. 

“열네 살이에요~ 이름은 이에요~” 

개들이 너무 흥분하거나 이제 갈 길을 가야 할 때가 되면 보호자들은 줄을 잡아당기며 이렇게 말한다. 

“자 그만 가자, 안녕~해! ‘안녕~’” 

“안녕~”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길 때면 나는 방금 나눈 대화에서 주어는 누구일까 싶어 웃음이 나온다. 분명 처음 만난 낯선 사이에서 말을 놓는 것은 한국사회의 예법상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개 보호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개에 빙의하여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보통 보호자들끼리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고 개만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묘한 대리 커뮤니케이션, 또는 통역 상황이 벌어진다. 복화술 같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상 최초로 탄핵 심판을 받고 파면된 전직 대통령은 이른바 ‘유체이탈화법’으로 이름났었다. 

“사고의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원인 규명 하겠습니다. 만약에 지금 오늘 여러분들과 얘기한 게 지켜지지 않으면 (손짓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여기 있는 사람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됩니다.” 

실제 그분이 한 말이다. 앞 문장에서는 자신이 원인을 철저히 조사하고 규명할 주체인 것처럼 말했지만 뒤 문장에서는 그 책임이 본인을 빼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듯이 말한다. 본인도 ‘여기 있는 사람’이지만 마치 본인이 거기에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유체이탈화법의 요체다. 주로 책임을 회피하거나 남 탓을 하면서 본인만 쏙 빠져나갈 때 쓰는 화법이다. 사돈 남 말하듯 하는 것이다. 영어로 ‘사돈 남 말하시네’는 ‘Look who’s talking’이다. 직역하면 ‘누가 말하는지 봐라’라는 뜻이다. 남 탓하고 있는 주어를 보라는 말이다. 



수동태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울 때 수동태라는 개념을 접하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있다. 주어 자리에 무수히도 많은 사물이 놓였다. ‘책을 읽는다’라고 하지 않고 ‘책이 읽힌다’, ‘바닥을 청소했다’ 또는 ‘바닥이 깨끗하다’라고 하지 않고 ‘바닥이 청소되었다’라고 표현했다. 영어에서는 관념이나 사물이 쉽게 주어 자리에 놓였다. 영어는 명령형을 제외하면 꼭 주어가 있어야 하는 언어고 한국어는 주어가 곧잘 생략되는데, 한국어 사용자는 은연중에 주어를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어에서는 피동 표현보다는 능동 표현을 선호한다고 한다. 

한국어 사용자뿐 아니라 영어권에서도 여러 작가들이 수동태 사용을 자제하기를 권한다. 윌리엄 스트렁크 주니어의 『영어 글쓰기의 기본』은 1918년 초판이 나오고 백여 년간 천만 부 넘게 팔린 전설의 책으로,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불린다. 이 책에서는 영작문의 기본을 열여덟 가지의 원칙으로 제시하는데 그중 11번 원칙이 ‘능동태를 사용하라’다. 

“능동태는 보통 수동태보다 더 직접적이고 힘이 있다. 

 ‘나는 보스턴 첫 방문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나의 보스턴 첫 방문은 항상 나에 의해서 기억될 것이다.’

첫번째 문장이 두번째 문장보다 낫다.” 

작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체가 부엌에서 옮겨져 거실 소파 위에 놓였다’보다는 ‘프레디와 마이라는 부엌에서 시체를 들어다가 거실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가 더 마음에 든다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체를 문장의 주어로 삼는단 말인가? 시체는 어차피 죽은 게 아닌가! 집어치워라!’ 이런 문장도 있다. ‘수동태는 나약하고 우회적일 뿐 아니라 종종 괴롭기까지 하다.’ ‘수동태는 안전하다. 골치 아픈 행동을 스스로 감당할 필요가 없다.’

어슐러 K. 르 귄도 『글쓰기의 항해술』에서 비슷한 말을 한다. 

“사람들은 수동태를 종종 쓴다. 수동태는 간접적이고, 정중하고, 공격적이지 않고, 마치 아무도 직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생각을 잘 맞출 수 있고, 아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을 잘 맞출 수 있어서, 마침내 아무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동태는 관료들과 소심한 학자들에게 사랑받고, 책임을 지기를 원하는 작가들에게는 대체로 외면받는다. 비겁한 작가는 “존재란 추론에 의해 구성된다고 믿어진다”라고 말한다. 용감한 작가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시작할 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하지메사세테 모라이마스始めさせてもらいます.” ‘시작하겠습니다’ 정도의 뜻이지만 직역하면 ‘시작하게 하는 것을 해 받겠습니다’ 같은 뜻으로서, 내가 능동적으로 뭔가를 시작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작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돌려돌려 말하는 것이다. 일본어를 공부하던 내 친구는 이런 표현을 배우면서 유체이탈이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번은 국어 문법 수업시간에 앞에 나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어떤 용법에 대해 ‘쓰여지다’라는 표현을 썼더니 교수님이 되물었다. “자네, 뭐라고?” “~라고 쓰여진다고 말했습니다”라고 내가 대답하자 교수님이 말했다. “우리말에 ‘쓰여진다’는 말은 없어. ‘쓰인다’라고 해야지.” 이때 나는 이중 피동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배웠다. 요즘은 영어나 일본어 번역 어투의 영향인지 이중 피동 표현을 마구 쓰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나는 그때마다 얼굴이 빨개지던 이십 년 전 그 순간이 떠오른다. ‘사용되어지다’ ‘생각되어지다’ 같은 꼬이고 꼬인 말들을 보면 뭐가 덕지덕지 붙은 것 같아서 견디기가 힘들다. 물론 ‘잊혀진 계절’이라는 이중 피동 표현의 노래 제목이 ‘잊힌 계절’로 교정된다면 그 말맛 또한 어색해서 견디기 힘들 테지만. 


여러 개의 주어 

전설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발행인이었던 고 한창기 선생은 외국 한 번 안 나가고도 영어를 기가 막히게 잘했다고 하는데, 언어 재능이 뛰어나고 언어에 대한 관심도 많은 준 언어학자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말글의 아름다움을 무척 사랑해서 어문법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는 주어가 여럿일 수 있는 게 한글의 고유함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개는 꼬리가 검다’ 같은 말을 보면 ‘그 개’도 주어지만 ‘꼬리’도 주어라는 것이다. ‘나는 네가 좋아’ ‘우리 학교는 운동장이 넓다’ 같은 말도 서술어는 하나인데 주어가 둘이다. 내가 앞서 썼던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한창기 선생은 이렇게 썼다. 

“(…) 그래야만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도, 이를테면 “우리 마을은 들머리가 길이 넓이가 좁다”는 영어와 다른 표현을 두고 주어가 여럿이어서 비논리적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세계문화가 세로 서 있어야 할 ‘하나’가 아니라 가로 펼쳐져서 서로 화합해야 할 ‘여럿’임을, 곧 이 나라도 그 본부가 되고, 이 나라 사람도 그 주인이 되고, 이 나라의 글이나 말도 재산이 되는 그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줄로 압니다.” 

예문이 참 재미있다. 마을 입구 도로의 폭이 좁은 것을 ‘우리 마을은 들머리가 길이 넓이가 좁다’라고 표현하면 대체 주어가 몇인가? 마을도 주어고 들머리도 주어고 길도 주어고 넓이도 주어다. 여러 개의 주어가 등장하는 말로부터 문화의 다양성을 옹호하는 철학까지 펼쳐놓은 주장을 보니, 역시 어떤 말을 골라 쓰느냐는 어떤 생각을 지키느냐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국어학계에서는 이중 주어를 국어의 독특한 문법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저께 미국 대선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조 바이든이 대통령, 카멀라 해리스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특히 인도계인 카멀라 해리스는 미국 최초의 여성이자 흑인-아시아계 부통령으로서 선출의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그는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성으로서 처음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이 되었지만 마지막 여성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소녀들이 이 나라가 가능성의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당선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또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지 세력’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치의 ‘주어’가 될 가능성을 열어보인 것이다. 주(主)어 자리에 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민주(民主)주의라는 말은 비로소 제 뜻을 찾아갈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