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당신과 나의 거리


높고 낮음 

후배에게 축하할 일이 있어 문자를 보냈더니 답이 이렇게 왔다. 

“아유 쇤네가 뭘 알았겠어요. 운이 좋았지요. 고마워요!” 

축하할 일이 무엇이었는지는 잊었지만, ‘쇤네’라는 말은 너무 웃겨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쇤네는 ‘소인’을 조금 더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소인’도 스스로를 낮추어 이르는 말인데 거기다 더 낮추는 의미의 접미사 ‘-네’를 붙여 ‘소인네’가 되고 그것이 줄어 ‘쇤네’가 된 것이다. 남편은 그냥 남편인데 여편은 ‘여편네’라고 낮추어 부르던 것과 ‘-네’의 쓰임이 같다. 주로 마당쇠 같은 사람이 주인나리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때 쓰던 표현이라 현대사회에서 만난 우리들로서는 너무 뜬금없어서 재미있다. 

높임말과 낮춤말은 상하의 위계를 반영한다. 나를 낮추어서 상대를 높이기도 하고, 상대를 낮추어서 나의 높이를 확인하기도 한다. 높은 것이 더 강하고 중하다는 개념은 본원적일 것이다. 작은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튼튼해지고 키가 커진다. 눈에 보이는 풀이나 나무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이 자란다. 해와 달은 저 높은 하늘에 걸려 있고 천둥번개와 비를 내리는 신도 저 높은 곳에 있다고 믿게 된다. 인간계의 신이라 할 왕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왕을 부르는 ‘전하殿下’라는 말에서 ‘전’은 ‘궁궐 전’ 자다. 높고 큰 궁궐 아래 조아린 자신을 보아달라는 뜻이다. 영어로도 높음을 뜻하는 ‘하이니스(your) highness’라고 부른다. 신이나 왕은 백성을 ‘굽어살피고’ 백성은 ‘우러르며’, 왕이 상을 ‘내리면’ 신하는 ‘받잡는다’.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왕에게 하는 말은 거리만큼이나 자꾸만 길어진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등등. 그렇게 긴 높임말을 쓰지 않는 요즘도 ‘너 말이 짧다?’라고 하면 ‘내게 제대로 된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상대에게 쓰는 낮춤말은 높임말에 비해 길이면에서 훨씬 경제적이다. 

신과 왕으로부터 쇤네와 여편네에 이르기까지, 신분제 유교 사회 안에서 계층과 나이에 따른 존댓말의 차등은 계단식으로 촘촘하고 복잡했다. 잠깐 일별해보자면, 


  합쇼체- 상대편을 아주 높임. ‘어서 오십시오’ 

  해요체- 상대편을 보통으로 높임. 비격식체. ‘안녕히 계세요’ 

  하오체- 상대편을 보통으로 높임. ‘이쪽으로 나오시오’ 

  하게체- 상대편을 보통으로 낮추면서 약간 대우해줌. ‘좀 도와주게’ 

  해체- 상대편을 높이지 않음. 비격식체. ‘밥 먹어’ 

  해라체- 상대편을 아주 낮춤. ‘저리 가라’ 


이와 같다. 게다가 이 안에서도 얼마나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만들어지는가! ‘아침은 드시었소?’라든가 ‘그렇게 하시어요’, ‘자네 먼저 하시게’처럼 어미 ‘-시-‘나 ‘시어요’가 개입하는 순간 높낮이의 느낌은 또 달라진다. 사전은 ‘-시-‘의 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동작이나 상태의 주체가 화자에게 사회적인 상위자로 인식될 때 그와 관련된 동작이나 상태 기술에 결합하여 그것이 상위자와 관련됨을 나타내는 어미. 

그러니 보통 낮춤체인 하게체와 높임의 어미 ‘-시-‘가 결합한 ‘자네 먼저 하시게’ 같은 말은 높임과 낮춤이 묘한 비율을 이루며 또 다른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공연한 신분제 유교 사회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후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동기인데 한 살 차이가 나요. 말을 놓아도 될까요?’ 등등 관계에 적절한 말을 사용하기 위해 주의한다. 높임과 낮춤은 여전히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에 아주 중요하다. 


현대사회 

내가 어렸을 적엔 학교에서 부모님의 밥은 ‘진지’라고 해야 하고 ‘어머니’ ‘아버지’ 뒤에는 ‘께서’를 붙여야 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에 만약 누군가가 ‘아버지께서 진지를 잡수셨다’라고 한다면 듣는 사람은 ‘부모 자식 사이가 어지간히 먼가보다’라고 느끼거나 ‘사극 대본인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부모에게 깍듯한 경어를 쓰며 예를 갖추는 것은 요즘 시대에 어색할 뿐 아니라 권장되지도 않는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기껏해야 ‘아버지(아빠)가 식사하셨다’ 정도로 높인다. 부모와 자식 간의 위계나 거리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외국에서 살다 왔거나 영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한국의 높임말 체계에 대한 성토도 늘어난다. 어떤 사람은 높임말이 이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수직성을 강화한다며 모두 반말을 써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내어놓기도 한다. 영어 ‘you’에 해당하는 이인칭 대명사가 없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바다. ‘너’는 가까운 친구 사이에 또는 나이가 더 어린 사람에게 쓰는 말로, 그렇지 않은 사이에서 쓰면 큰 결례가 된다. 그런데 ‘너’라고 말할 수 없는 사이에서는 쓸 수 있는 말이 없다. ‘당신’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내가 한국어에서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말 중 하나다. 사랑하는 사이나 다정한 편지에서는 아끼는 마음으로 애틋하게 부르는 말이고 부부 사이에서는 서로를 높이는 공식(?) 호칭인데, 교통사고가 나서 양측의 운전자가 뒷목을 잡고 내렸을 때 상대편을 ‘당신’이라고 부르면 대번에 “뭐? 당신?! 언제 봤다고 당신이야!! 너 몇 살이야!”라며 고성이 오가게 되니 말이다. 사전에도 이 경우에 쓰이는 ‘당신’은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라고 나와 있다. 정말 신기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상점이나 공공기관에서 응대할 때도 상대편을 지칭할 말이 적당치 않으니 ‘선생님’ ‘사장님’ ‘사모님’ ‘어머님’ ‘학생’ 등등을 끌어다 쓰게 된다. 이쯤 되면 한국의 이인칭 대명사 문제는 점점 골치가 아파지는데, 그에 비해 할아버지에게도 어린아이에게도 무례하지 않게 쓸 수 있는 ‘you’란 얼마나 편리한 말인가 싶어지는 것이다. 

수직적 위계 사회에서 벗어나 평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 복잡한 한국어의 높임말을 좋아한다. 말을 잘 못 놓는 성향도 있거니와 정교한 높임말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것이 말의 재미를 높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는 늘 높임말을 쓰는데, 앞서 말한 ‘합쇼체’와 ‘해요체’를 잘 섞어서 너무 딱딱해지거나 너무 편안하지만은 않으면서도 예의바른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다. 내게는 또래지만 오랫동안 서로 말을 높이며 깍듯하게 지내는 관계들이 있는데 친하면서도 일정한 거리감과 예의를 유지하는 게 좋다. 옷깃이 빳빳한 셔츠를 입고 만나는 것처럼 서로 적당한 긴장감이 있달까. 물론 허물없이 편안하게 말을 놓는 관계도 좋지만 말이다. 높임말을 쓰다가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말투가 조금씩 편안해지는 것도 미묘한 재미를 준다. “지난번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가 “지난번에 그렇게 말했잖아요”가 되었다가 “지난번에 그래놓고는” 하는 식으로 이른바 ‘말이 짧아’지면서 둘 사이의 거리도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다. 


반존대의 세계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재미있어하는 높임법은 ‘반존대’다. 시장통이나 계모임에서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모여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신세계가 펼쳐진다. 

“점심 잡쉈어? 뭐 좀 드릴까?” 

“형님 잠은 좀 주무셨어?” 

“으잉, 들어가셔잉~” 

이것은 무엇인가? 반말인가 높임말인가? 합쇼체도 해요체도 해체도 아닌, 그야말로 해체주의적인 언어 사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정겹다. 분명 말을 놓았는데 영 놔버리지 않았다. 말이 짧아서 서로의 거리도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지는데 존중은 끝내 놓지 않았다. 기존의 높임법에서 존중은 가져오되 거리감은 버리는 취사선택을 거쳐, 높임법의 관습적 구분에 편입되지 않는 창의적인 언어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반말을 하는 사이에서는 예의도 놓치기 쉽다. 그러나 반존대의 세계에는 예의의 그물망이 탄탄히 드리워져 있다. 

조금은 다르지만, 중노년 여성들 말고 요즘 어린 세대도 반존대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반존대의 설렘’을 장르화하여 소비한다. 깍듯이 존댓말을 쓰던 사람이 갑자기 반말을 하면 그 거리감이 교란되며 일종의 ‘심쿵 효과’가 생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늘 옷깃이 빳빳한 셔츠 차림이던 사람이 맨팔이 드러나는 슬리브리스 차림을 잠깐 보여주는 것과도 비슷한 효과다. 

“어제는 왜 인사도 없이 갔어요. 기다렸잖아.” 

같은 말에는 예의를 넘어 관심과 친근함이 점점 커지는 관계의 양상이 포착된다. 웹소설이나 아이돌 팬덤 문화에서 반존대는 하나의 장치로 쓰인다.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에게 ‘반존대로 설레게 답해달라’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이 또한 높임말 문화권의 재미 중 하나다. 

나는 생일이 반년 차이 나는 동성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데, 평소에는 반말로 편안하게 대화하지만 이상하게 명령형을 쓸 때는 서로 반말이 안 나온다. “수저 좀 놔줘요” “문 닫아주세요”라는 식이다. 생활을 함께하는 사이이다보니 명령형 말투가 혹시라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다툼으로 이어질까봐 무의식적으로 조심하게 되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술이 많이 취했을 때도 꼬박꼬박 높임말을 쓴다고 한다. “나 안 취했구요, 맥주 한 잔만 더 마실 거라구요” 하면 많이 취한 것이다. 취해서 귀찮게 하는 것에 대해 사전에 양해를 구하려고 무의식중에 상대를 높이며 아부를 떠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평등과 상호존중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 살고 있다. 엄격한 위계 속에 만들어졌던 높임과 낮춤의 복잡한 법칙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옛날에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고 그에 따른 관계의 예법도 다 정해져 있어 따라야만 했다. 그러나 요즘은 관계를 우리 스스로 설정할 수도 있다. 반말의 친근함과 높임말의 존중함을 다 이용하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처럼,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우리만의 관계를 반영하는 말을 취사선택해 재창조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엔 그것이야말로 현대적인 태도 같다. 


이 작품은 격주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