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마지막 유배일기-끝, 그러나 새롭게 시작될 이야기

오늘이 유배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모레 미국으로 떠나는 특별 전세기 티켓을 구했다. 원래 미국 시민 구출용 비행기인데 미국 도착 후 24시간 이내에 출국한다는 조건으로 탑승이 허락됐다. 공항은 아직 공식적으로 폐쇄 상태다. 몇 시간 후, 새벽 5시에 특별 통행권을 가진 개인 차량으로 과테말라시티에 있는 공항으로 간다. 오늘은 파나하첼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마음이 요동쳐 어젯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곳에서 보낸 50일 동안 정이 많이 든 것 같다. 오늘은 보이는 것마다 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하루가 휘청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크로스로드 카페에 갔다. 마이클은 선물이라며 박스에서 머그잔을 꺼내 보여줬다. 그리고 박스 네 면에 작별인사를 빼곡하게도 적었다. 읽으면 울컥할까봐 읽지 않았다. 마이클이 같이 사진 찍자며 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사진 찍고 나가려는데 갑자기 너를 위해 기도해도 되겠느냐며 양손을 내 어깨에 올렸다. 우리가 만난 것에 감사하며 안전하고 건강하게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는 짧은 기도였다. 방으로 돌아오며 내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건, 치성이건, 마음속 바람이건, 간절히 드린 적이 과연 언제였나 생각했다.

 

내일 떠난다니 카페 로코 식구들이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일주일에 한 번 놀러가서 점심 같이 먹고 수다 조금 떨다가 돌아오는 것이 다였지만, 로코 식구들은 마음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도움을 받았다. 내일 공항으로 가는 차량도 수소문해서 잡아줬다. 김진영 대표와 여섯 명의 멤버들. 아무리 생각해도 싹 다 제정신이 아니다. 과테말라 파나하첼까지 와서 카페를 열다니. 대단한 용기와 신뢰, 희생, 비전이 없으면 못할 짓들을 벌이고 있는 집단이다. 존경하고 응원한다.

 

숙소로 돌아와 성당에 갔다. 웅장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수수한 성당이다. 의자에 앉아 짧게 기도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과 내가 받은 따듯함에 감사합니다.” 성당에는 오늘따라 아무도 없어 고요했다. 거의 매일 왔지만 정작 머무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의자에 앉아 느꼈던 매일의 평온함과 평화는 내게 하루하루의 의미가 되어 반짝였다. 누군가 켜놓은 촛불 앞 헌금함에 100케찰을 넣고 나왔다.

 

자주 가는 구멍가게에서 환타와 감자칩을 샀고 늘 하던 대로 테라스에 앉아 먹었다. 내가 이곳에서 누렸던 이 작은 사치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북을 켜고 밀린 메일에 답을 한다. 성가시다. 해야 하는 일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냥 이곳에서의 마지막 하루에 좀더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알마가 지나가다 나를 보고 걸어온다.

“내일 아침 일찍 5시에 떠납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내년에 돌아올게요.”

“떠난다니 슬프네요. 나도 고마웠어요. 안전하게 잘 돌아가고 내년에 다시 만나요. 내년에는 새로 짓는 숙소에 머무르게 될 거예요. 차오!”

나는 돈 내고 이곳에 머무는 손님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알마가 나를 손님으로 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알마는 언제나 나를 헤아리고 보살폈다. 아침에 마이클한테 산 커피 원두 한 봉지를 드렸다. 커피에는 마음을 담을 수 있으니까.

 

, 저녁때가 되었으니 이제 유배 식당으로 간다. 마지막 요리다. 채소, 양념, 스파게티면, 계란, 우유까지 남은 재료가 많다. 새로운 손님들이 곧 해치워주겠지. 양배추, 마늘, 호박, 감자, , 버섯을 썰어넣고 된장과 간장으로 간을 맞춰서 한 사발 가득 먹었다. 특별할 것 없지만 여기서 가장 많이 해 먹었던 음식이다. 간단하지만 늘 만족스러웠다. 설거지하고 모카포트로 커피를 뽑아 알마에게 줄 커피를 잔에 따라놓고 유배 식당을 나왔다.

 

공작새 호르헤와 앵무새 아르투로야, 내년에 보자. 시끄럽고 또 시끄러웠지만 예쁜 녀석들아. 이곳의 파수꾼 멍멍이들아, 너희들도 참 시끄러웠지. 그래도 내년에 만날 때 날 잊고 짖으면 안 돼. 알마 곁에서 건강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으렴.

 

유배지에서의 마지막 밤이 흐른다. 바람이 불고 모기가 날고 멀리서 개들이 짖는다. 내가 처음 이곳에 온 날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 마음의 지분을 얼마간 이곳에 두고 떠난다. 다시 찾으러 온다. 차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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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팀 버튼 감독의 <빅 피시>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허풍쟁이였는데 아들은 그의 이야기가, 아니 삶 전체가 허구와 사실의 구분이 안 된다며 불평한다. 하지만 결국 아들도 삶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의 마지막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낸다.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는 아들의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죽어서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되고 아들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예정된 10회의 연재가 끝났다. 연재를 시작하면서허술하고 긴가민가한 커피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켰다. 부끄럽다.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며 그 시절의 배역으로 돌아가 충실하려고 했다. 환희와 설렘, 무안함과 후회 모두가 생생하다. 내 이야기는 이렇게 매듭짓는다. 이제 독자들 저마다의 이야기가 펼쳐질 시간이다.

연재 마지막 회차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