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유배일기2-평범하게, 위대하게

이곳에 유배 와서 가장 흡족한 것 중 하나는 아침잠을 핸드폰 알람 소리에 깨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물론 아침마다 방문 앞에서 울어대는 공작새 호르헤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매일 반복하는 이곳의 일상에서, 크로스로드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마이클과 짧은 안부를 주고받는 일은 내게 꽤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별것 아닌데 늘 기다리고 설렌다. 지난주에 마이클은 내게 뜬금없이 좋아하는 색깔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보라색이라고 답했다. 무슨 심리테스트 같은 건가 했는데 별 얘기 없길래 그냥 지나갔다. 며칠 전 더블 에스프레소 두 잔과 당근 케이크를 먹고 일어서는데 마이클이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그는 마대자루 같은 것을 주섬주섬 꺼내더니 펜으로 그 위에 무언가를 써서 바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커피 생두 담는 포대에 이 지역 마야족의 전통 문양을 덧댄 가방이었다. 가방 안쪽에 자기 메시지를 적었다며 선물이라고 건네줬다. 정말 뜻밖이었고 고마웠다. 나는 해준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는데. 고맙다는 말만 몇 번이고 반복하다 여느 때처럼 미소!”라고 외치며 카페를 나왔다.

 

크로스로드에서 파나하첼 성당까지는 한 블록이 채 되지 않는다. 나는 성당 의자에 앉아 가방 안감을 뒤집어 마이클이 써준 문구를 살폈다. 보라색 천이라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올해 우리를 만나게 해준 코로나바이러스를 기념하며라고 쓰여 있었다. 별것 아닌 말인데 읽다가 순간 뭉클해서 혼났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더 지혜로워진다거나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에야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다. 내가 가진 대부분의 긍정적인 것들이 내가 타고나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보다는 내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기도와 응원, 지원과 연대에 힘입은 것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바보같이 이런 것을 당연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감사하며, 돌아보며 살아야겠다고 마이클이 준 가방 덕분에 생각해본다.

 

마이클은 젊은 시절 심각한 마약·알코올중독이었고 오토바이광이었는데 죽을 뻔한 사고를 몇 번이나 당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나하첼에 여행 왔다가 아름다운 아티틀란 호수와 소박하고 따듯한 마을에 마음을 뺏겨 아예 눌러앉게 되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그의 사연을 듣고 나니 마이클과 크로스로드의 커피가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크로스로드에는 오늘따라 손님이 많다. 마이클은 혼자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눈인사만 하고 나는 바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마이클이 내 주문을 받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그가 에스프레소 기계의 레버를 활시위처럼 잡아당겨 커피 만드는 모습을 지켜보길 좋아한다. 마이클은 내가 주문도 안 했는데 에스프레소를 내 앞에 불쑥 내밀었다. 

“치즈케이크도 줄까?” 

“그럼.”

“오늘은 이게 아침이야?”

“응.”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감탄과 반성을 오가며 홀짝이다보면, 어라! 잔이 비어간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마시고 있는 아이스 라테가 맛있을 것 같아 두번째 커피를 주문한다. 그사이 손님들은 하나둘 인사를 남기며 떠나고 나 혼자 남았다. 아이스 라테가 나왔다. 여기서는 처음 먹어보는 메뉴다. ‘왜 이것도 맛있지?’ 계산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100케찰quetzal 지폐를 내밀었다.

 

오늘은 너한테 돈 안 받을 거야. 내일이 내 생일이거든. 내일이면 쉰다섯 살이야. 그리고 이곳에 온 지 딱 20년 되는 날이지. , 너는 커피 일한 지 얼마나 됐어?”

“16.”

나는 32년째야. 스물두 살 때 처음 샌프란시스코에 작은 카페를 냈었지. 그때는 지금처럼 카페가 많지 않았어.”

32년이면 1988. 지금까지 내가 커피 일 한 시간의 딱 두 배다. 나는 마이클이 32년 동안 현장에서 바리스타와 로스터로 일해온 것도, 아직도 일하며 저렇게 즐겁고 생생한 것도 신기했다. 깊이 존경한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너도 로스팅한다고 했지? 내 로스터 보여줄게. 이리 와봐.”

엄청 엉성하고 낡은 기계였다. 브랜드도 없고 그냥 동네 공방에서 뚝딱뚝딱 만든 것 같았다. 10킬로그램짜리 로스터이고 자기가 계속 고쳐서 쓰고 있는데 이번에 자기가 새로 아이디어 내서 고친 부분을 보라며, 신이 나서 자랑하는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로스팅중 원두를 꺼내보는 샘플러가 망가져서 플라이어를 물려 뽑아 쓴다며 껄껄 웃는다. 로스터는 총 3500달러 주고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 가격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다. 낡고 조악한 로스터로 그렇게 맛있는 커피를 로스팅하다니, 32년 업력이 괜한 것은 아니다. 비싸고 유명한 커피 기계 브랜드의 최신 모델 아니면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없다고 믿는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마이클은 자리로 돌아와 에스프레소 기계 아래 연결된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 이 기계는 모터가 따로 없어서 보일러에 물을 넣으려면 매번 페달을 밟아야 한다. 보일러 가열은 요즘 모델처럼 전기가 아니라 가스버너로 한다. 20년 전 전기 없는 오지에서 작동할 수 있게 만든 에스프레소 기계다. 마이클은 이 기계도 자기가 직접 고쳐 쓰고 있는데 자신처럼 아직 건재하다며 웃었다. 요즘 한국에서는 쿨하고 힙한 인테리어와 고가의 커피 기계, 패셔니스트 같은 바리스타 아니면 커피숍 운영이 힘들다는 분위기다. 그리고 그는 이 작은 동네의 허름한 카페에서 낡은 에스프레소 기계와 로스터로 20년째 파나하첼 사람들이 사랑하는 커피를 만들고 있다. 처음 그의 커피를 마셨을 때 맛있어서 적잖이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내가 마이클 커피에서 느끼는 이런 만족과 감동을 나는 우리 고객에게 주고 있는 걸까?’ 자문해보면 자신이 좀 없다. 그의 커피에는 내게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 비밀이 알고 싶어 나는 매일 이곳을 찾는다.

 

마이클이 갑자기 물었다.

너 커피에서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한 단어로 말해줄 수 있어?”

글쎄……

나는 관계라고 생각해. 손님과 나, 나와 커피 생산자, 나와 커피로 만나고 이어지는 모든 것들.”

이것은 불교의 연기설인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의 타자성, 주체구성론인가, 인도 구루의 지혜인가.

마이클, 생일 축하해. 커피 고마워. 즐거운 주말 보내. 미소!”

미소, .”

나는 오늘도 마이클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마이클에게 줄 생일 선물이 마땅히 없어서 나는 그에게 어울릴 법한 헌사를 하나 지어봤다.


평범하게, 위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