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회



*


덜커덩. 열차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눈을 떴다. 바깥은 온통 어둠이라,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객실 역시 불을 꺼놓은 탓에 어두컴컴했는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그새 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승객들이 기차가 왜 섰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지 벌써 스물두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안내방송이 나왔다. 순록떼가 이동하며 철로를 건너는 바람에 정차했으니, 안전한 객실 내에서 기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난 잠시 팔짱을 낀 채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잘만 하면 천천히 움직이는 아름다운 동물들을 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열차는 한도 끝도 없이 길었고 저 앞 어딘가에서 철로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순록 무리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철로를 건너 어느 먼 툰드라의 벌판을 달려가고 있고, 열차는 그저 잠깐의 휴식을 더 취하기 위해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아까 식당 칸에서 가져온 커피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시 가서 뜨거운 커피를 사올까 고민하다가 그냥 앉아 있기를 택했다.

엑스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그래선지 내 주위에도 흑암이 잔뜩 깔려 있었다. 깊고 거대한 물에 잠긴 듯 몸 전체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과연 엑스는 저 죽음의 시간에서 벗어나 그가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창밖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듯하여 나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는 샤프카와 검은 가죽 잠바 차림에, 한쪽 다리가 약간 불편해 보였다. 가만있어봐, 저 남자, 혹시 와이 아닌가? 눈을 지그시 뜨고 다시 한번 자세히 쳐다봤지만, 어느새 남자는 사라지고 차창 밖은 그저 밤의 적막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하긴, 와이가 여기 나타날 리가 없잖아. 그는 모스크바 루뱐카광장의 비밀스러운 석조건물 안에 있으니까. 설령 그가 거길 떠났다 해도 사방에 인가라곤 없는 이 쓸쓸한 밤의 초원에 서 있을 일은 없지. 그래, 난 헛것을 본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객차와 객차 사이에 있는 통로로 나갔다. 거기 매달려서 밖을 내다보자,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오더니, 마치 오래전의 어떤 약속을 상기시키듯 얼굴을 스쳐갔다. 낮게 자란 관목들이 드문드문 무리를 지어 자라고 달빛이 울퉁불퉁한 지형의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초원은, 어느 외계 행성의 표면 같았다. 한동안 객차 문에 매달린 채 별빛에 희뿌옇게 빛나는 지평선을 바라봤지만, 와이는 없었다.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오려는데, 하늘에서 뭔가가 나풀나풀 떨어져내렸다.

“눈……인가? 이 계절에 눈이 내리다니.”

중얼거리며 손을 허공으로 뻗고서야, 나는 그 희고 팔랑이는 작은 빛덩어리들이 나비라는 것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었다. 날개를 뒤덮은 가루들이 별빛을 반사하며 오색으로 반짝이는 것이었다. 손을 내밀자, 나비들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마치 브라운운동을 하는 입자처럼 움직였다. 그들의 날갯짓을 보고 있노라니 가만히 정지해 있는 건 나비들이고, 위로 아래로 혹은 좌우로 둥실둥실 떠다니는 건 나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문득 나비들 사이에 기묘한 난기류가 형성되는 게 보였다. 날개를 스쳐가던 공기의 흐름은 수십, 수백 개의 조그만 소용돌이를 만들어냈고, 각각의 소용돌이들은 상쇄되어 사라지거나 혹은 합쳐져 더 큰 소용돌이로 자라났다. 그중 유독 크고 빠른 하나의 소용돌이가, 모든 공기의 움직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소용돌이는 점점 커져 회오리처럼 하늘까지 뻗어가고, 나비들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춤추며 그 중심부를 향해 날아들어갔다. 별까지 닿을 듯 빠르게 자라난 회오리바람이 툰드라의 지평선을 따라 멀리 사라져가는 모습을, 나는 넋을 놓고 가만히 보고 있었다.  

드디어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승무원이 다가오는 걸 보고, 난 그에게 말했다.

“저걸 보셨습니까? 저기, 지평선 쪽을 보세요!”

그러나 승무원은 바깥의 풍광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는 흰 장갑을 낀 채 내 티켓을 다시 한번 검사했고, 위험하니 빨리 객실로 돌아가라고 주의를 줬다. 객차 안으로 들어오기 전 뒤를 돌아보았지만, 밖엔 오직 어둠뿐, 나비떼도 회오리바람도 하다못해 열차를 멈추게 했던 순록떼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트를 펼치고 뒷부분을 이어 읽으려 했지만, 어두워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방을 뒤지니 다행히 챙겨온 손전등이 담겨 있었다. 왼손으로 불을 밝히고, 오른손에 노트를 든 채 어둠 속으로 침잠해버린 엑스를 다시 찾아갔다. 그는 조용해졌고 말이 없어졌으며 살아 있다는 신호조차 보내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귀 기울이고 노트의 행간을 샅샅이 뒤져도, 엑스를 찾을 순 없었다. 혹시 죽은 건가……? 이런 의문이 퍼뜩 머리를 스쳤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가 세계를 떠나지 않을 거라는 이상한 확신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엑스를 어둠으로 이끌고 간 바다는 잔잔했고, 심해에는 온갖 기괴한 물고기들이 이리저리 느릿느릿 헤엄치고 있었다. 곳곳에 입을 벌린 해구들. 지상의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바다의 산맥들. 뜨거운 물을 뿜어내는 열수구. 대양의 흐름을 따라가는 남방참고래 무리. 그 곁에서 호위무사처럼 따라가는 은빛 비늘의 고등어떼. 

엔진이 꺼진 배는 높아졌다 낮아지는 파도에 부드럽게 흔들렸으며 엑스의 잠은 계속되고 있었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별이 반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계속되는 지루한 항해(라고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난파 상태?) 때문인지 서서히 졸음이 밀려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 작은 고깃배가 먼 수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고깃배는 발동기가 달려 있긴 했지만 망가져서 말을 듣지 않았으며, 좁은 갑판엔 러닝셔츠 차림의 헐벗은 남자 하나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 제발, 저 사람이 엑스를 발견해야 할 텐데. 나는 손에 땀을 쥐며 다음 장을 넘겼다. 문득 팔짱을 낀 채 먼바다를 바라보던 남자가 옆에 놓인 양동이에서 뭔가를 꺼내 우적우적 씹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고래고기 비슷한 살덩어리였다. 한참 동안 씹기에 열중하던 남자가 몸을 숙이더니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니, 저 사람, 너무 오래 물속만 들여다보잖아. 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는 걸까? 바다거북이라도 지나가는 건가. 그런 의문을 가지기 시작할 즈음, 남자는 다시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멀리 보이는 엑스의 배를 알아챈 듯 눈을 크게 뜨는 것이었다. 


*


혹시 필리핀 민다나오섬에 있는 제너럴산토스라는 도시에 가본 적 있습니까? 물론 나는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요.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큰 참치 집산지이니까요. 아마 내가 타고 있던 참치잡이 어선에 해적떼가 출몰하지만 않았어도, 어쩌면 나 역시 제너럴산토스 항구에 들러 여기저길 둘러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박씨와 이씨가 그런 식으로 바다로 사라지지 않고, 김씨도 살아 있다면, 우린 그 반짝이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들고 항구 인근 선술집에서 참치회, 참치구이, 참치카츠, 참치덮밥 등등 온갖 참치 요리를 다 주문해놓고 술을 한잔 곁들였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런 건 다 헛된 망상. 실제의 나는 난파한 원양어선 갑판에서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들과 뒤섞여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뿐이었지요.

하여간, 이제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바로 그 제너럴산토스 항구에서 출발한 어느 참치잡이 배로부터 비롯됩니다. 정확히는, 참치를 잡기 위해 모선에서 떨어져나와 먼바다로 향했던 작은 고깃배에서 시작된다고 하는 편이 낫겠네요. 그 배엔 어부 한 사람이 타고 있는데, 그의 이름은 호세. 동생인 조피와 함께 참치를 잡아 한몫 보기 위해 바다로 나왔지만, 그만 갑작스러운 풍랑을 만나(짐작하겠지만, 그가 맞닥뜨렸던 풍랑은 그 며칠 전 내가 타고 있던 원양어선에서 모두를 쓸어가버린, 바로 그 폭풍우입니다) 인도양 한가운데까지 떠내려오고 말았지요. 호세와 조피는 힘을 합쳐 배를 운전하고 물을 퍼냈지만, 미친듯이 날뛰는 파도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급기야는 엔진이 망가져버렸고 결국엔 비상용 노를 젓는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넓디넓은 바다에서 미아 신세가 된 두 형제는―아, 내가 얘기했던가요? 그 둘이 쌍둥이라는 것을요. 마치 나와 내 동생 와이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도 우리처럼 몸이 붙어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말이에요―그런 역경과 고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고깃배 안엔 마실 물이 아직 남아 있었고, 그 둘은 뛰어난 솜씨를 지닌 낚시꾼이었으니까요. 여차하면 낚싯줄을 드리워서 고기를 잡아 먹으면 되고(제너럴산토스의 참치잡이 어부들은 모두 낚싯줄 하나로 거대한 참치를 낚으니까요!) 목이 마르면 남은 생수를 아껴 마시며 버티면 될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언젠가 배가 지나갈 테니, 그때는 구조를 요청하는 손짓을 보내자고. 만에 하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다 해도, 걱정하지 말렴. 해류의 흐름을 보건대, 분명 우린 다시 항구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왠지 불안해하는 동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형인 호세는 이렇게 말했지요. 

실제로 처음 며칠은 계획대로 흘러갔어요. 비록 고기가 잘 잡히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배를 채울 만큼은 낚였고, 물은 한 방울씩 아껴 마신 덕에 조금은 남아 있었지요. 둘은 어두운 표정으로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각각 다른 방향의 수평선을 바라봤습니다. 혹시라도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렇게 며칠이 흘렀을까, 어느새 작은 고깃배엔 호세 혼자만이 외로이 남게 됐던 겁니다.

나중에, 연안을 표류하다 구조될 형의 증언에 의하면, 동생인 조피는 바다로 뛰어들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배도 없고 망망대해를 아무리 돌아다녀도 항구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언제부터인가는 고기도 잡히지 않아 먹을 것도 다 떨어졌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실 물도 얼마 남지 않게 되자, 동생이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더군요. 

“형, 이 상태론 우리 둘 다 결국 죽고 말 거야. 그러니 내가 바다로 뛰어들게. 형이 나 대신 남은 생을 살아줘.”

호세는 당연히 그런 동생을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동생의 뜻은 완고했다고 하네요. 이미 오른쪽 발을 고깃배 밖으로 내밀어 뛰어들 준비를 한 조피는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어차피 우린 쌍둥이야. 내가 형이고 형이 곧 나인 셈이지. 그러니 우리 둘 중 누가 산다 해도 둘 다 산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형, 제발 슬퍼하지 마. 형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곧 나의 삶이 될 테니까. 그럼, 안녕!”

그와 동시에 호세가 말리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이 조피는 깊고 깊은 인도양의 바닷속으로 풍덩, 하고 뛰어들었던 겁니다. 

하지만, 호세가 무사히 구조되었을 때 사람들 앞에서 쭈뼛대며 털어놓을 이 이야기는 사실 모두 허구입니다. 그가 재구성해낸 가짜 스토리에 불과하지요. 

진실을 말하자면, 조피는 바다에 뛰어들지 않았어요. 애초부터 스스로 목숨을 버릴 생각 따윈 아예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왜 아무도 보지 못한 사이에 동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리고, 좁은 갑판 위엔 형만 홀로 외로이 남아 있던 걸까요?

자, 이제 진짜 사연을 말해드리겠습니다. 입에 담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조피는 형인 호세의 뱃속에 있어요. 쉽게 말해서 잡아먹혔다, 이 말이지요.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자, 허기와 탈수로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호세가 무시무시한 계획을 꾸몄거든요. 문득 갑판 위에 블랙 앵거스 종의 살찐 육우가 서 있는 게 보였는데, 손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건 소가 아니라 그저 동생인 조피였지요. 하지만, 그 기괴한 환각의 순간, 호세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겁니다. ‘뭐 어때? 사람의 고기나 소의 고기나 물고기의 고기나, 다 그게 그거 아닌가? 어차피 우린 한몸이고 내가 산다면 조피도 사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는 동생에게 속삭였어요.

“사랑하는 동생아, 지금 수면을 내려다봐. 방금 거대한 바다거북이 한 마리 지나간 것 같았거든. 만약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그놈을 잡아서 적어도 일주일간은 요기할 수 있을 거야.” 

조피는 형의 말을 믿고 바닷속을 들여다봅니다. 그때 호세는 노를 들고 살그머니 뒤로 돌아가서 있는 힘껏 동생의 머리를 내려치지요. 아아, 그 끔찍한 모습이라니! 마치 카인이 아벨을 죽이듯, 호세는 조피를 죽여버렸던 겁니다. 곧바로 그는 동생을 해체하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배 위엔 생선 손질용 작은 칼이 있었고, 그게 비록 녹슬긴 했지만, 어쨌든 한때 호세는 참치 해체 전문가로 일한 적이 있을 만큼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요. 그는 동생을 정말 깔끔하게 부위별로 나누었습니다. 별로 먹을 게 없는 머리까지 포함하여, 사랑하는 조피를 한 점도 헛되이 버리지 않고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 염장했어요. 언제 구조될지 모르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선, 하다못해 두개골 속에 든 뇌수조차 소중한 식량이 되는 법이거든요.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조피를 먹어치웁니다.

“아아, 사랑하는 내 동생이여. 너는 이제 영원히 나와 함께할 거다. 왜냐하면, 너의 모든 것이 내 뱃속으로 들어와 나의 피가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 

매 끼니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며 기도 아닌 기도를 올렸지요.

그리하여 동생 덕분에, 아니 정확히는 동생의 고기 덕분에 기운을 차린 그는, 조금은 여유로운 심정으로 먼 수평선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요. 어느 날 밤, 그날도 지나가는 배라곤 단 한 척도 만나지 못하여 낙담한 그가 염장해뒀던 동생으로 배를 채운 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때, 그 거대한 배가 나타났던 겁니다. 마침 꿈에선 조피가 울면서 말없이 그를 쫓아다니는 바람에 공포에 시달렸는데, 그래선지 눈을 뜬 순간에도 호세는 한동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어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닷물을 떠서 세수를 하려던 그는, 다시 한번 화들짝 놀랍니다. 물속에서 동생이 손을 휘저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까요. 한동안 갑판 구석에서 몸을 오그리고 덜덜 떨다가, 갑자기 호세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 웃습니다. 이런 말을 중얼대면서 말입니다.

“멍청한 놈. 정신 차려. 조피는 죽었어. 죽어서 이 뱃속에 있단 말이야!”

그는 한층 용기를 내어, 좀전에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던 바닷물을 내려다보지요. 그러고는 물에 비친 얼굴은 동생이 아니라, 그저 조피와 꼭 닮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멀리서 그 거대한 난파선이 소리도 없이 스르르, 어둠을 가르며 다가왔던 거예요!

호세는 그 배로부터 멀어지기 위해(그는 그 음산하게 생긴 배가 유령선임이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바다 위에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것을 목격한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전설 속의 배 말입니다) 미친듯이 노를 저었습니다. 하지만 노를 젓다 말고 어떤 소리가 들려 난파선 위를 올려다보니, 웬 봉두난발의 남자가 팔을 휘저으며 뭐라고 외치고 있지 않겠습니까. 

여차저차한 끝에, 호세는 배 위에 있던 남자를 자기의 조그만 고깃배로 옮겨 태우는데요. 물론 그 과정은 그리 쉽지 않았어요. 아무리 파도가 잔잔하다고는 해도, 어둡고 컴컴한 바다 한가운데서 누군가를 구조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테니까요. 하긴, 호세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를 자기 배에 태워준 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쌍둥이 동생까지 먹어치운 남자가 단지 선의로 반쯤은 부서진 배에 홀로 남아 표류하고 있는 사람을 구해줄 리가 있겠어요? 그는 배 위의 남자가 손에 들고 흔드는 생수병을 보았던 겁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호세는 그를 옮겨 태우기 전부터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습니다. 남자를 구하기 직전, 그는 조피의 뒤통수를 내리칠 때 썼던 노를 뒤돌아봤어요. 피와 머리카락과 뇌수와 부서진 뼛조각이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노 말이에요. 그걸 보며 씩 웃은 다음, 난파선 위의 남자에게 소리쳤지요.

“갑판을 둘러봐요! 아마 밧줄로 된 사다리가 있을 거예요! 그걸 아래로 드리워요. 그런 뒤에 천천히 조심조심 내려오라고요! 내가 최대한 배를 바짝 대고 기다릴 테니까요. 참, 생수 가져오는 거 잊지 말고요!”

난파선 위의 남자는(어둠 속에서 보기에도 뼈와 가죽만 남은 상태였는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방을 두리번댔습니다. 마침내 뭔가를 찾아냈는지 그쪽으로 달려간 남자가 잠시 후 낑낑대며 밧줄로 된 사다리를 배 아래로 늘어뜨립니다. 그런 그의 오른손 놀림이 유난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호세는 눈치챘을까요? 사다리에 매달려 아래로 내려올 때 오른손은 그저 흔들리기만 할 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끝까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어차피 호세는 남자의 안위 따위엔 관심이 없고, 오직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어 병의 생수만이 걱정될 뿐이니까요. 

드디어 남자가 고깃배에 무사히 올라타자 호세는 두 팔을 벌려 그를 반깁니다.

“당신은 이제 살았어요! 이 배엔 먹을 것도 좀 있고, 난 베테랑 낚시꾼이니 말입니다. 자, 그 생수병은 이리 줄래요? 갑판 아래 보관해두면 좀더 시원하게 마실 수 있을 테니까요.”

생수병을 받아 갑판 밑에 숨긴 호세는 남자에게 구석에 있는 작은 자리를 권합니다. 전엔 동생인 조피가 앉아서 수평선을 바라보던 곳이었죠. 

“자, 여기 앉아 좀 쉬세요. 혹시 지나가는 배가 없나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고요.”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호세는 슬그머니 노를 집어듭니다. 뭐든지 하면 할수록 솜씨가 는다고, 처음 동생인 조피를 내리칠 때만 해도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번엔 그저 담담하게 남자의 뒤통수를 조준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말이에요. 멀리 바다에선 검은 파도가 밀려오고 하늘 중심엔 북극성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던 깊은 밤의 일입니다. 

자, 그러면 이젠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볼까요?

그러니까 마치 필름을 빠르게 되감듯, 그렇게 되돌려보자, 이 말입니다.

호세는 다시 노를 내려놓고 남자는 생수병을 허리춤에 도로 매달더니 고깃배 위에서 밧줄 사다리로 뛰어오릅니다. 여전히 위태로운 몸짓으로, 봉두난발의 남자는 다시 난파선 위로 올라가지요. 필름을 계속해서 거꾸로 감아보면, 그가 힘없이 쓰러져 누워 있는 갑판이 보일 겁니다. 주위엔 말라서 단단해진 색색의 불가사리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언제 뜯어먹은 건지 알 수 없는 생선뼈 서넛이 널브러져 있지요. 남자는 사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바다 한가운데선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줄지어 그를 찾아왔으니까요. 그들은 반쯤은 불투명하고 반쯤은 투명한 형체로 오래도록 서서 자꾸만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줬습니다. 그 노래는 영원한 잠, 끝없는 평안으로 남자를 초대했고, 마침내 그는 잠들어버렸지요. 눈이 감기자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완벽한 어둠이 그를 덮쳐왔습니다. 어둠은 그를 좀먹어들어갔어요. 눈꺼풀에서 눈동자로, 눈동자에서 전두엽과 해마로, 해마에서 척추를 타고 흘러내려간 어둠은 뼈와 골수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 남자를 시커멓게 휘감았던 거예요. 어둠에 휩싸인 남자의 감각은 정지했고 그를 둘러싼 세계는 서서히 무無가 되어갔죠. 그렇기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도 당연히 듣지 못했던 거고요. 그 소리는 아주 작게,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들려왔습니다. 

―형…… 형, 눈 좀 떠. 눈을 뜨란 말이야, 형.

“……”

―형, 아직은 때가 아니잖아. 우린 만나야 해. 그러니까 눈 좀 떠봐. 제발!

남자가 미동조차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리는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보이나요, 소리의 파동이 남자 주위의 공기를 흔드는 광경이? 

죽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던 대기에 물무늬 같은 게 일렁이고, 위아래로 흔들린 공기의 흐름이 이리저리 뭉치면서 뒤엉키는 모습이 보이느냔 말입니다. 파동은 빙글빙글 돌면서 커지고 증폭되어 깊게 잠든 남자의 귀를 때리고, 청각신경을 타고 흘러들어가 뉴런과 뉴런 너머 그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가닿게 되지요.

이제 진짜 보이지요? 누워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터지고 갈라진 그의 입술이 아주 조금씩 달싹이는 장면이. 힘없이 늘어진 왼손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더니, 남자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올라갔다가 내려가는군요. 마치 그의 입과 코를 향해 숨을 불어넣기라도 하려는 듯, 공기는 계속해서 일렁이며 소리의 파동을 만들어냅니다.

―형, 당장 일어나야만 해. 일어나서 손을 흔들라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지금 일어나 눈을 떠야, 정확한 시간에 그 장소에 갈 수 있다고! 

그리고 그가 몸안에 든 어둠을 토해내듯 긴 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을 때, 대기의 흔들림은 가라앉고 파동은 사그라들어 세계는 다시 고요해지는 겁니다. 

남자는 두 손으로 갑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킵니다. 멀리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작은 고깃배가 나타나는 것을 보며, 힘겹게 손을 흔들지요. 그러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곁에 떨어져 있는 생수병을 집어들고 다시 한번 두 팔을 휘저어요. 그제야 고깃배 위에 앉은 어부는 그를 발견한 듯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지요.


그럼, 이번엔, 노를 든 채 남자의 뒤통수를 가격하기 일보 직전인 호세에게 되돌아가봅시다. 그는 아까부터 노를 치켜들고 남자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냥 한 번 세게 후려치기만 하면 되는 것을, 동생까지 해치운 그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이것은 정지화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바다는 파도와 물결 모양을 간직한 채 굳어 있고, 하늘의 달과 별은 그 자리에 붙박여서 운행하지 않으며, 딱딱하고 차가운 젤리 형태의 대기는 이 모든 광경의 배경으로 고정되어 있는 거지요. 그 한가운데 노를 치켜들고 있는 호세와 아무것도 모른 채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나, 엑스가, 동작을 멈춘 채 각자의 풍경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렇습니다. 이 기묘한 광경은, 곧 다가올 어떤 혼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이한 여행을 앞둔 찰나의 모습입니다. 이때 단 0.000001초만 엇갈렸어도, 나는 호세의 노에 맞아 머리가 반으로 쪼개졌을 테고, 호세는 두번째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됐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와이가 말했던 바로 그 시간, 그 정확한 장소에서 모든 게 뒤바뀌어버렸으니까요!

장면 각각을 초 단위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호세가 결심한 듯 숨을 들이마십니다. 왠지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던 나의 동공은 놀라움으로 확대되고요. 배는 파도에 출렁이고 물속에선 고래들이 서로를 부르며 지나가는데, 호세의 손에 들린 노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시간의 흐름이 이상하게 뒤틀려버려요. 아마 불쌍한 호세는―그를 위해 대신 변명하자면, 극심한 탈수와 굶주림이 계속되면 몸속 전해질 분포에 이상이 생기면서 환각과 망상에 시달리게 된다더군요. 그래요, 어쩌면 동생 조피가 그랬듯, 나 역시 그에겐 한 마리 육우로 보였던 것 아닐까요?―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초능력자인 나는 느낄 수 있거든요. 시간이 미세하게 살짝 비틀렸다는 것을요. 

시간은 비틀리면서 아주 작은 공간의 꼬임을 만들어내고, 꼬인 공간은 주위의 평평한 공간을 흡수하며 점점 더 크게 말려들어가지요. 안으로 한없이 말려들어간 공간이 블랙홀처럼 빠르게 회전하더니 수면에서 하늘로 향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내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그것은 지름이 수십 센티미터에 불과한 가느다랗고 비좁은 깔때기 모양을 띠고 있었는데, 차차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며 커지고 자라나더니 마침내는 수백 미터 크기의 거대한 용오름이 되었습니다. 노를 내리치려던 호세가 용오름의 기세에 놀라 노를 떨어뜨린 것도 그 순간이었습니다. 하긴 그가 용오름을 보고 놀랐던 게 아니라, 단지 위로 솟아오르는 물줄기의 힘으로 배가 크게 출렁인 나머지, 발을 헛디디며 비틀대다 노를 놓쳤던 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여튼, 호세의 손에서 튕겨나온 노는 그대로 붕 날아 바닷물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호세는 노를 건질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거대한 물의 토네이도를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어요. 그 순간 어디선가 밀려온 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하고, 무수히 많은 빗방울이 호세의 이마와 볼과 입술로 흘러들지요. 호세는 눈을 감고 차갑고 시원한 빗물을 받아 마셔요. 그건 마치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느낌으로 그의 몸에 스며들고, 혈관을 타고 빠르게 흘러들어가 서서히 굳어가던 남자의 뇌를 촉촉이 적셔줍니다. 썩은 생선의 끈적한 피와 소금기 섞인 물 때문에 거의 기능이 정지됐던 뉴런들이 일제히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제야 호세는 동생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는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 조피를 찾아 그 조그만 고깃배 위를 이리저리 헤매요. 그러다가 문득 멈춰 서 구석에 놓여 있는 플라스틱 양동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이미 텅 비어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와 피 속에서 왠지 낯익은 눈알 하나가 번뜩이는 걸 봤기 때문인데요. 그 눈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형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지요. 호세가 나를 돌아보며 영혼 없는 목소리로 질문합니다.

“혹시, 저게…… 내 동생의 눈일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어깨를 의수로 두드려줍니다. 그 순간 호세는 오열합니다.  

“조피! 조피! 내 하나뿐인 동생!” 

쏟아지는 빗속에서, 호세는 양동이를 뒤집어 거기서 쏟아진 살점들을 이리저리 맞춰봅니다. 그렇게 하면 어느 순간 퍼즐이 완성되고, 동생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죽은 동생이 다시 살아날 린 없지요. 마침내 호세는 오른손 검지를 목구멍 깊숙이 쑤셔넣고 미친듯이 후벼파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삼켜버렸던 동생을 토해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요. 하지만 이미 동생은 그의 뱃속에서 모두 소화되어버렸고, 그래서 그가 욕지기를 하며 토해내는 것은 그저 약간의 머리칼과 이빨 서너 개뿐입니다. 그걸 보며 호세는 더욱 슬프게 흐느끼지요.  

“이건 동생의 치아가 맞아요. 불쌍한 조피. 아아, 만약 그애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난 내 모든 걸 내놓을 수도 있어요!”

그때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합니다. 

“어쩌면, 아직 모든 게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저기(그러면서 난 우릴 향해 빠르게 다가오는 거대한 용오름을 가리키지요), 시간과 공간이 비틀린 채 활짝 열려 있으니까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호세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은 나. 우리 둘은 경이와 놀라움에 가득차서 사방으로 물보라를 튀기며 덮쳐오는 바다의 토네이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너무 짧은 찰나의 일이라 정확히 알 순 없지만,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하늘 전체를 뒤덮은 나비떼로 보인 건, 아마 환상이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