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미몽에 빠져 있느라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저 시끄러운 소리들, 우당탕탕 뛰어가는 발소리라든가 “으악” 하는 비명 같은 것들을 듣고 있었을 뿐이죠. 건너편에 누워 있던 김씨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떨어진 검은 구두를 베개 대신 베고 누운 채 소리 나는 쪽을 힘없이 바라볼 뿐이었으니까요. 그 순간 창고 문이 활짝 열리더니 선장이 뛰어들어왔습니다.

“이봐, 해적이 습격했어! 이제 우린 끝장이야. 당신들도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슬프게도(아니, 사실은 그리 슬프진 않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뒤에서 “탕” 소리가 들리더니 선장이 배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기 때문입니다. 곧이어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나 문을 가로막았습니다. 김씨는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고, 그물더미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던 나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우린 해적이다!”

거구의 남자가 말했습니다. 그다음 이어진 말은 굳이 예상할 필요도 없겠지요?

“가진 거 다 내놔.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그러나 나는 해적들이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다 알고 있었고(정보기관의 회색 방에서 지낼 때,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해적이 벌이는 야만적이고 끔찍한 행위에 대한 자료를 접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놈들이 ‘살려주겠다’라고 하는 것은, 배 위에서 죽이는 대신 배 밖으로 던지겠다는 말이었어요. 그렇게 바다로 던져진 사람은 대부분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상어 밥이 되기 일쑤였고, 운이 좋아 좀더 오래 허우적대며 떠 있는다 해도 결국엔 힘이 빠져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았죠.

어쨌든 우린 가진 걸 다 내놓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탈탈 털어봐도 내가 가진 건 신문 쪼가리 한 장뿐이었습니다. 기억하지요? 정보기관에 들어가기 전 우연히 손에 들어온 부리또 포장지―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의 윗옷 주머니에 든 아버지의 수첩 사진이 실린―말입니다. 나는 그걸 비닐에 겹겹이 싸서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것 외엔 톰에게서 샀지만 아직도 다 먹지 못한 비타민 한 병이 있었고요. 

해적은, 내가 주섬주섬 내놓은 것들을 보자 화를 냈습니다. 

“뭐야, 겨우 이것뿐이야?”

옆을 보니 김씨는 베개 대신 베고 있던 구두를 내놨더군요.

“이건 소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수제화야.”

그는 손짓 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께서 구두를 맞추는 집에서 만든 거거든. 자 여길 봐. 이 표시 보이지? 이게 바로 최고급 신발에만 붙여주는 케이에스 마크야. 알겠어?”

뜻밖에도 해적은 그 구두가 마음에 드는 듯했습니다. 하긴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은, 신발이라고 하기도 뭣한, 그저 발에 칭칭 감아 두른 노끈 같은 것에 불과했으니까요. 해적은 김씨의 구두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자신의 발에 낑낑거리며 끼워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몇 발걸음 걸어보더니 만족한 듯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군요. 하지만 좋은 분위기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갑자기 나를 휙 돌아본 그는 버럭 소릴 질렀지요. 

“넌 이런 거 없어? 구두나 뭐, 그런 거 말이야.”

나는 덜덜 떨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 되겠군.” 

해적은 중얼거리더니, 나를 번쩍 들어 바다에 던지려 했습니다. 허공에서 팔을 허우적대며, 나는 눈을 꽉 감았습니다. 그래, 여기서 상어 밥이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아. 아마 이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같아요. 어차피 동생은 어디론가 사라져 만날 수도 없고, 고향 땅을 다시 밟는다는 기약도 없으니…… 나 같은 사람에겐 이런 식의 종말이 오히려 어울리는 것 아닌가.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김씨가 “잠깐만!”이라고 외치더군요. 그는 해적에게, 자기가 더 좋은 걸 줄 터이니 제발 이 사람만은 놔달라고 애걸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씨가 다 떨어진 셔츠 안쪽, 러닝셔츠에 꿰매둔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바로, 신용카드였습니다. 그래요, 오래전 내가 철원 인근 땅속에서 뭔가를 발견한 공로로 회식을 하게 됐을 때, 검은 양복 차림에 번쩍이는 구두를 신고 왔던 남자들이 자랑스럽게 꺼내 보여줬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해적의 팔에 매달린 채 김씨에게 외쳤습니다.

“괜찮아요. 날 그냥 내버려두세요, 이미 각오가 돼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건 당신에게 정말 소중한 거잖아요! 어서, 도로 주머니에 넣어요!”

그러나 김씨는 나를 쳐다보며 슬픈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미스터 엑스,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사랑받으려고 태어난 사람, 아니, 잠깐, 그게 아니지, 여하튼 당신은 이렇게 죽어선 안 될 사람입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위대한 임무를 생각해보라고요. 어떻게든 돌아가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할 의무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신용카드 따윈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니까요!”

그는 다시 해적에게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자, 이걸 받고 그 남자를 살려줘. 플래티넘이라 한도도 엄청 높다고. 그래, 거의 무제한이라고 할까. 어느 항구에서 내리든, 이것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걸 살 수 있다니까!”

해적은 한동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카드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갑판에 내려놓고는, 그 얇고 반짝이는 플라스틱 카드를 빼앗듯이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이야? 이거 하나면 모든 걸 다 살 수 있다는 게?”

김씨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놈은 살려주지.”

해적의 말에, 갑판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더군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해적이 벌떡 일어섰으니까요. 그는 고래 가죽으로 만든 것 같은 조끼 주머니에 신용카드를 찔러넣더니, 천천히 김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생각해봤는데, 그래도 역시 둘 중 하나는 없어져줘야겠어. 배에 식량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우린 자선사업 따윈 관심도 없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놈은 여기 남고(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습니다), 대신 네가 저 아래로 뛰어드는 거야. 어때? 공평하지?”

김씨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지 마. 안 돼! 잠깐 기다려봐, 이걸 줄게.”

그는 자신의 다 떨어진 검은 양복을 벗으며 외쳤습니다.

“여길 봐. 여기도 케이에스 마크가 있거든. 진짜 좋은 원단이라고!”

그러나 해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피식 웃으며 김씨를 집어던지려고 저벅저벅 다가갈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김씨가 갑판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전광석화처럼 날랜 몸짓으로 해적에게 달려들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평소 말해왔던 대로 역시나 뛰어난 전사였습니다. 하긴, 월남인가 어디에서 수없이 많은 베트콩을 때려잡았다던 그에겐, 해적을 제압하는 일 따윈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르지요. 해적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휘청하며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둘은 엎치락뒤치락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난투극을 벌였고, 난 멀찍이 떨어져 앉아 가슴을 졸이며 김씨를 응원했습니다. 해적은, 김씨가 마구 휘두르는 주먹을 피해 점점 더 뱃전으로 밀려가고 있었지요. 이제 한 발만 더 뒤로 물러선다면 바다로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였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한 발의 총성이 울려퍼졌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요. 이럴 수가! 거기엔 또다른 해적이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선 채 이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지 뭡니까. 그럼 김씨는 어떻게 됐냐고요? 글쎄요, 나도 잘 모릅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가 어떤 식으로 붕 날아 바닷속으로 떨어졌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좀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엔 사방으로 튄 핏자국만 남아 있었죠.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일이지만, 바다로 날려가면서 김씨는 이렇게 외쳤던 것도 같습니다. 

“미스터 엑스, 제발…… 그곳으로 돌아가…… 반드시 임무를……”

그러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결국엔 출렁이는 파도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는 뱃전으로 달려가 그가 빠진 자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을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순 없었습니다.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우당탕탕, 퍽, 으악, 내놔! 같은 것들 말입니다)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군데군데 망가지고 찌그러진 의수로 눈물을 닦으며 뒤를 돌아보니, 갑판은 어느새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해적들 한 무리가 서로 뒤엉켜 미친듯이 싸우고 있는데, 그들은 모두 신용카드, 그러니까 김씨가 갖고 있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파도는 점점 높아졌고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뭉게뭉게 몰려오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폭풍우가 몰아칠 게 확실했거든요. 원래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던져진 건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갑판 위에선 신용카드를 차지하려는 한 떼의 해적들이 거대한 인간 공 덩어리처럼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결국, 난 그들을 말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냥 내버려둔다면, 폭풍우가 닥쳤을 때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테니까요. 나는 뭉쳐서 싸우고 있는 해적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 그만 좀 싸워요! 하늘을 보라고요. 지금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어요. 배가 흔들리는 게 느껴지지 않냐고요!”

그러나 내 목소리는 철썩이는 파도와 바닷새들의 구슬프면서도 불안에 찬 울음소리, 거세고 스산한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해적들은 오직 죽기 살기로 싸우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산처럼 높은 파도가 배를 덮쳤어요! 엄청나게 큰 파도는, 마치 물로 이루어진 수직 장벽처럼 눈앞으로 닥쳐왔습니다. 그 거대한 물기둥 속에선 고래 수십 마리와 이름 모를 연체동물 수백 마리,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수만 마리까지 한꺼번에 뒤섞여 밀려오고 있었지요! 해적들은 그제야 싸움을 멈추고―그러나 여전히 한 덩어리가 된 채로.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꽉 붙잡고 있던 나머지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풀려날 길을 찾지 못했던 겁니다―멍하니 물의 장벽을 바라봤습니다. 나 역시 하늘에서 똑바로 떨어지던 심해 문어의 기다란 다리 앞에 꼼짝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여하튼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을 이어붙여보면, 대충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일단, 해적들은 산보다 더 큰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가는 순간 다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닷속으로 굴러들어갔습니다. 동시에 그들의 우두머리가 손에 쥐고 있던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도 심해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을 테고요. 배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랑잎처럼 흔들리며 이리저리 떠다녔을 겁니다. 폭풍우가 가라앉고 시커먼 구름이 걷혀 대양의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해질 때까지요. 

눈을 뜬 건 다음날 한낮이었습니다. 갑판 여기저기 죽은 채 떨어져 있는 황새치, 고등어, 문어, 불가사리 같은 것들만이, 전날의 엄청났던 폭풍우를 떠올리게 해줄 뿐, 배 안은 쥐죽은듯 고요했지요. 어디를 둘러봐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고, 바다를 닮은 짙푸른 적막이 사방에 감돌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선원들이 쓰던 식당으로 들어서자, 한쪽에 서 있는 커다란 냉장고가 눈에 띄었습니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고 맨 아래 칸에 말라비틀어진 생선 몇 마리와 딱딱하게 굳은 빵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건 좀 충격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동안은, 적어도 그들은 우리보단 좀더 나은 음식을 먹으며 지낼 거라고 막연히 상상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냉장고에서 생선과 빵을 꺼내 식당 한쪽에 선 채로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주전자에 물을 담아 커피를 끓여 마셨지요. 오랜만에 마시는 커피는 너무나 맛있었고, 그래서 순간적으로 내가 처한 상황도 잊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기까지 했지요. 

식사를 마친 뒤엔 다시 갑판으로 나왔습니다. 조금은 외롭고 쓸쓸했지만,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수평선과 하늘 높이 날아가는 갈매기, 물위로 뛰어올랐다가 다시 사라지는 황새치들을 보고 있노라니 차차 마음이 평온해졌어요. 배는 언제부터인가(아마도 전날 무지막지한 폭풍우에 휩쓸린 이후부터겠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멈춰 있었습니다. 끝도 없는 대양 한가운데 떠서 이리저리 둥실둥실 흔들릴 뿐이었지요. 선장실에 있는 낡은 무전기를 꺼내 교신을 시도해봤지만, 어디에서도 응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배 위에서 삶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나는 갑판에 앉아 배 주위를 맴도는 돌고래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본래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이니까.”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했는지, 돌고래들은 수면 위로 살짝 날아올라 검은 지느러미를 반짝이며 이리저리 헤엄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며칠이나 흘렀을까, 드디어 낮과 밤이 혼동되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떴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달이었다든가, 혹은 달무리 아래서 추억에 잠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구름에 가려져 있던 태양이었다든가 하는 일이 반복된 거지요. 때론 갑판에 동생인 와이가 서 있기도 했습니다. 그는 반쯤은 투명한 유리 같은 몸으로 나타나 별다른 말도 없이 그저 슬픈 눈으로 날 쳐다보기만 했어요. 아무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없던 나는 갑판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힘없이 중얼거렸습니다.

“와이, 너구나. 네가 왔구나. 그동안 어디서 무얼 했기에 이렇게 조용했던 거야?”

하지만 동생은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서서―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날 바라보다가 아침해와 함께 스르르 사라져버렸을 뿐이에요. 하긴, 갑판 위로 날 찾아온 이들은 동생 말고도 많았어요. 어느 날인가는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검은 수첩을 옆구리에 끼고 서서 빙긋이 미소 짓고 있었고, 그래요, 또 하루는 엄마가―아주아주 오래전 땅속에 묻혔지만, 여전히 뜬눈으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우리 어머니 말입니다―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했으니까요.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어머니가 부른 노래가 자장가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합니다. 내 앞에 서 있던 엄마의 눈과 입은 그저 검은 구멍으로 뻥 뚫려 있어서, 그녀가 노래를 불렀다는 건 뻐끔거리는 입 모양을 통해 추측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노래를 듣는 건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난 최대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들곤 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갑판으로 온 사람 중엔 톰도 있네요. 톰. 하얀 가운을 입고 나와 밤새워 일하며 지도 위의 머나먼 나라를 같이 탐색하던, 그리운 나의 친구. 그런데 이상한 건, 갑판으로 찾아온 톰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정보기관의 회색 방에선 온갖 잔소리를 해대며 전날 천리안으로 찾아낸 정보를 받아 적느라 분주하던 그가, 한마디 말도 없이 입을 꾹 닫은 채 나를 바라보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신기했지요. 

어쨌든, 처음에 그들―내 동생 와이, 아버지, 어머니, 톰,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허드슨 중위, 김호선 같은 이들―은 한 사람씩 차례로 띄엄띄엄 나타났고 잠시 서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차차 갑판으로 찾아오는 빈도가 늘었고 서 있는 시간도 점점 길어졌지요.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 모두 입을 다문 채 말없이 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난 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뭐, 아무도 대답은 안 했기에 거의 독백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그편이 훨씬 나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그게 밤이었던가. 이런, 미안합니다. 좀전에도 말했다시피, 완전히 멈춰버린 배의 갑판 위에서 홀로 지낸 뒤로 난 그만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러니 내가 어떤 기억 혹은 경험을 이야기하다 낮과 밤을 헷갈린다 해도, 너그러이 이해하며 읽어주길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여하튼, 어떤 날 아침 또는 밤에, 어디인지도 알 수 없는 망망대해의 한복판에서 난 뭔가를 퍼뜩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그전부터 무의식에선 알고 있던 사실을 그제야 현실로 받아들였던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날도 난 갑판에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어서 그들이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의문이 머릿속을 뒤덮어버린 거죠! 

‘저들은 어떻게 날 찾아오는 거지? 저 거대한 대양을 헤엄쳐서? 물위를 걸어서? 잠깐만! 그렇다면, 여긴 어디지? 이곳은 정말 바다일까?’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뱃전을 잡고 일어섰습니다. 그런 다음,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몸을 지탱하며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봤어요. 먼저 동쪽을, 그러고 나선 서쪽을, 그 후엔 남쪽과 북쪽을 차례로 응시한 끝에(아, 방향을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다행히 배엔 나침반이 있었으니까요. 아마도 그건 수염에 생선 가시를 달고 있던 선장의 유품이었을 테지요) 내게서 터져나온 건 신음 섞인 울음이었습니다. 아아, 왜 그걸 몰랐을까요? 그러니까 그곳은, 그냥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에 펼쳐진 거대한(그러나 알고 보면 비좁은, 아니, 어쩌면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가느다랗고 얇은) 공간을 건너가고 있었던 거지요! 그동안 한없이 넓은 대양의 일부라고만 여겼던 그 깊고 푸른 물은, 사실은 스틱스강이었고 내가 타고 있던 움직이지 않는 배 어딘가에선 음흉하고도 음산한 죽음의 신 카론이 부지런히 노를 젓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였어요. 톰이 또다시 나타났지요. 이번에 그는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나는 힘없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지만, 웬일로 밝게 웃는 톰을 보자 슬픈 와중에도 한 가닥 기운이 샘솟았어요.

“톰, 실은 방금까지 지독한 절망에 빠져 있었어. 그런데 이렇게라도 네가 찾아와주니 한결 마음이 놓여. 정말 고마워!”

반가운 마음에 외쳤으나, 톰은 한마디 대답도 없이 그저 빙글빙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난 있는 힘을 다해 한번 더 말을 걸었어요.

“톰, 뭐라고 한마디만 해줄래? 네 목소릴 들으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중얼대며 톰의 정겨운 얼굴을 올려다본 순간, 그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습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입은 비정상적으로 컸고 입술은 광대처럼 붉은색이었으며, 눈은…… 눈이라기보다는 검은 사인펜으로 아무렇게나 찍은 점 같은 것이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은 채 뚫려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왜 그래, 톰?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냐고!”

공포와 경악에 차서 울부짖다 말고, 나는 흡, 하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톰의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거기엔 그동안 나를 찾아왔던 이들과 전혀 모르는 처음 보는 이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는데―서 있는 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표정 없는 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동시에 어디선가 음산하면서도 구슬픈 합창이 들려왔는데, 잘 들어보니 그건 그 사람들이 입을 맞춰 웅얼대며 내는 소리였습니다.  

―엑스. 이젠 짐을 내려놓아야지. 넌 평온해지고…… 세상 무엇보다도 평온해지고…… 그렇게 꿈도 없는 깊은 잠으로 빠져드는 거야……

서서히 감기는 눈을 어떻게든 떠보려고 애쓰며 난 잦아드는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잠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니까. 난 돌아가야 하거든…… 거기서 땅을 파내고…… 그것들을 꺼내서…… 멀리, 멀리 날려 보내야 해……”

그러나 눈꺼풀의 무게는 점점 늘어나더니, 나중엔 지구 전체, 아니 우주 전체의 무게와 맞먹으리만치 무거워졌습니다. 수평선과 하늘, 구름, 바닷새, 이런 것들이 점차 좁은 공간으로 줄어들다가 하나의 흔들리는 선이 되면서 사라졌지요. 

그다음은, 어둠. 그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