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회



위를 올려다보니 어두운 밤하늘엔 별들이 천천히 운행하고, 그 사이론 수많은 전파가 갖가지 사연을 담은 채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스크바에 있을 내 동생 와이를 생각했습니다. 언제 또 그 아이와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또 이대로 영영 헤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그때였습니다. 빽빽하게 자란 옥수숫대를 헤치며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불빛이 보인 것은요. 그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였는데, 부릉대는 엔진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멈춘 차에서 두 남자가 내렸을 때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글쎄요, 사실대로 말하면, 그들이 전에 회식 자리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모두 똑같이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하나같이 절제된 음성으로 절도 있게 행동했으니까요. 그래요, 그 둘은 마치 서로가 서로의 복제품이거나 혹은 한 라인에서 생산된 로봇 같았습니다. 어쨌든, 그들 중 한 명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더니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실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뒷문을 열고는 나에게 타라는 손짓을 했지요. 차 안은 조용하고 푹신하며 따뜻했습니다. 아주 작게 틀어놓은 클래식 음악도 잔잔히 흐르고 있었지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미스터 엑스.”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옆을 보니,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운전석 뒷자리에 한 남자가 어둠에 푹 파묻힌 채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흰 장갑을 벗고 나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당신에게 명함을 드린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제부턴 김씨라고 불러주십시오.”

“김씨……?”

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으며 되물었지요. 그러자 그는 씩 웃으며 앞에 앉은 아까의 두 남자를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저들은 각각 박씨와 이씨라고 부르면 됩니다. 운전하는 쪽이 박씨, 본관은 밀양이고요, 조수석에 앉은 자가 이씨, 본관은 전주지요. 저는 물론 김해가 본관입니다. 참고로, 파는 안경공파인데, 아, 뭐 이건 중요한 얘기가 아니니 넘어가기로 합시다. 여하튼, 앞으로 편하게 모실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귀하를 최대한 잘 모시고 오라는 본국의 특별 지시가 있었으니까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 차가 엔진 소릴 내며 출발했습니다. 차종은 모르겠지만 꽤 잘 만들어진 세단 같았어요. 옥수수밭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 차가 아스팔트 도로로 들어선 다음부턴, 모두 말없이 창밖만을 내다봤습니다. 어둠과 간혹 휙휙 지나가는 아스라한 불빛들. 그리고 검은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 이유도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더군요.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구슬픈 가락이 흘러나왔습니다. 긴 이별은 나를 슬프게 해요. 그래도 떠나는 게 최선이지요. 힘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옆에 앉아 있던 김씨가 말을 걸었습니다. 

“우린 이미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해뒀습니다. 당신의 아버지는 이득수, 젊은 나이에 나가사키 인근 바다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는 조선소의 부두 노동자였는데, 나가사키 상공에서 원자탄이 터지던 날 운좋게 살아남았지요. 그러나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오던 중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어이없게 익사하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밖에요. 당신의 어머니는 지영순. 그녀 역시 젊은 나이에 죽었습니다. 한국전에서 죽은 것으로 확인되고는 있지만,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는, 그 시대 사망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미상未詳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하여 고아가 된 당신은 이동중이던 미군에게 발견됐습니다. 처음 당신을 발견한 이는 허드슨이라는 군인이지요. 그는 피로 물든 하얀 옷을 입고 죽어 있는 여자 곁에 멍하니 앉아 있던 어린 당신을 보았던 겁니다. 허드슨은 아기를 데리고 막사로 돌아왔지만, 군의관은 고개를 가로저었어요.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 아이가 사나흘도 넘기지 못하리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지요. 그러나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다만, 완전히 얼어서 썩어 문드러진 오른쪽 팔은 잘라내야만 했지요. 원래는 말랑말랑하고 따뜻했던 팔을 잘라낸 자리엔 딱딱한 나무 의수가 장착되었지만, 그래도 아이는 잘 견뎌냈어요. 그리고 그애는, 자신을 처음 발견한 미군의 양자가 되어 머나먼 아메리카로 떠나게 되었던 겁니다. 그곳에서 그는 어떤 계기로 인해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깨닫게 되고, 비밀 정보기관에서 맹활약하게 되지요. 자, 이게 바로 우리가 가진 서류에 기록된 당신의 과거인데, 어떻습니까? 정확한가요?”

김씨의 말에, 나는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여,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나에 대하여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군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김씨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수첩을 뒤적이며 묻더군요. 

“혹시 기록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그의 질문에, 나는 힘주어 대답했습니다. 

“네, 기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나는 전쟁고아가 아닙니다. 난 샴쌍둥이로 태어났고, 당시로선 그야말로 최신 의학기술의 수혜를 입은 아이였습니다. 나와 동생은 수술을 통해 분리되었는데, 그때 한쪽 팔을 잃게 됐지요. 동생은 한쪽 다리를 잃었고 말이에요. 무엇보다도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완전한 오류 그 자체로군요.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가 가라앉아서 세상을 뜬 게 아닙니다. 아버지는(아아, 이 말을 하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요) 전함 무사시를 침몰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장렬히 전사하셨다고요! 도대체 당신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뭡니까? 이 정도라면, 당신들의 정보력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게 지금의 내 느낌입니다만.”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이씨가 나를 힐끗 뒤돌아보더군요. 어둠 속이지만, 뭔가 불만이 담긴 듯한 표정이었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러자 김씨가 그에게 손짓했습니다.

“괜찮아. 이쪽은 신경쓰지 말게.” 

이씨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고, 김씨는 호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더니 수첩에 뭔가 적기 시작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미스터 엑스. 사실 우리나라에서 주민등록법을 전격 시행한 지가 아직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여러 기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뭐, 원래 기록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자신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그동안 무엇을 해왔는지에 대한 엄청난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어디에도 없어요. 공문서상에 그렇게 적혀 있는 걸 보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하여간, 당신의 진짜 과거를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잘못된 기록을 찾아 수정하겠다고 약속하지요. 그러니 미흡한 점이 있었다면 널리 양해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리고 다가올 미래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며 김씨는 수첩을 덮었습니다. 차는 언제부턴가 해안을 따라 달리고 있었고, 바깥은 오직 어둠과 바다 내음뿐이었습니다. 나는 김씨에게 우리가 어디로 가는 건지 물었습니다.

“본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쉽게 말하면 밀항을 해야 한다, 이 말이지요. 당신을 여기서 데리고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에―알다시피 당신은 이 나라 정보기관의 주요인물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국경을 넘어서 나갈 순 없지요―부득이하게 이런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사실, 전에 말씀드린 그 높으신 분이 지금 사면초가 상태에 처해 계십니다. 그분의 깊고도 숭고한 뜻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조국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구석구석에서 위험하기 그지없는 자들이 세상을 뒤엎어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적들은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국가를 위협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지금 그분에겐 당신 같은 초능력자의 도움이 절실한 것입니다. 당신이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곳곳에 숨어 있는 위험 분자들을 색출해주기를, 우리는 모두 기대하고 있지요.”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내가 향하고 있는 땅은, 고향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비록 그곳에서 살진 않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곳은 나의 부모님이 태어난 곳이고, 또한 그 부모의 부모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 또한 거기에서 나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있지만, 하나뿐인 사랑하는 동생 역시 그 땅에서 태어났고요! 그런 생각을 하자 내가 조국을 위하여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심장이 조여왔습니다. 어쩌면 나의 능력은 바로 이 순간, 이 목적을 위하여 내게 주어진 거란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어요. 나는 주먹을 굳게 쥐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좋습니다! 국가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당연히 모든 걸 다 할 생각입니다. 매일 밤을 지새우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자들을 모두 찾아내야지요!” 

내 말에 김씨가 빙긋이 웃었습니다. 앞에 앉아 있던 이씨도 뒤를 돌아보며 웃더군요. 박씨 역시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주시한 채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 큰 소리로 웃었고, 김씨는 “브라보!” 하고 외치기까지 했어요. 그러나 곧 차 안은 조용해졌습니다. 조수석의 이씨가 제일 먼저 잠들었고, 그다음엔 내 옆에 앉아 있던 김씨가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어요. 나 역시 졸음을 견딜 수 없었고, 어느샌가 잠들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꿈에서 나는 어느 커다란 항구도시에 정박한 거대한 여객선 난간에 기대 서 있었습니다. 선착장에선 화려한 옷을 갖춰 입은 군악대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지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옆에 서 있던 김씨가 어깨를 툭 쳤습니다.

“미스터 엑스, 앞으로 국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할 당신을 위한 조촐한 환영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자, 어서 앞으로 나가시지요.”

나는 여객선에서 선착장에 걸쳐놓은 기다란 계단을 따라 한 발씩 조심스럽게 내려갔습니다. 문득 환영인파 속에 아버지가 서 있는 걸 보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흔들었지요.

“아버지, 저예요! 제가 돌아왔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래, 아들아. 고향에 돌아온 걸 환영한다. 네가 정말 자랑스럽구나!”

순간 기자들이 몰려와 아버지와 나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플래시가 펑펑 터지고, 나는 너무나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요. 그때 누군가가 어깨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미스터 엑스!”

하지만 눈을 뜨고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나는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천리안으로만 보던 수첩 속 존재가 아닌 실제로 살아 숨쉬는 아버지를 만난 감격에서도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나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고, 주위를 둘러본 다음에야 우리가 낡고 오래된 주유소 한구석에 주차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주유기 옆에 놓인 공중전화 부스에선 김씨가 격한 몸짓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고, 그 장면을 박씨가 우울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씨가 몸을 움츠리며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온 검은 비닐봉지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땅콩맛 스니커즈와 코카콜라더군요. 

“무슨 놈의 가게가 이 모양인지. 요기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일단 이거라도 드십시오.”

나는 스니커즈의 포장을 벗겨 우적우적 씹으며, 멀리 공중전화 부스에서 여전히 통화중인 김씨를 물끄러미 바라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통화를 끝낸 김씨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쪽으로 걸어오더군요. 깊은 한숨을 쉬며 차에 오른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지평선을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새벽이 되어 동쪽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올 때까지 말입니다. 이씨가 눈치도 없이 김씨에게 스니커즈와 음료수를 권했다가 조용히 도로 가져가더군요. 결국 그 무겁고도 어두운 침묵을 깬 사람은, 나였습니다.

“저기, 죄송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하죠?”

그러자 드디어 김씨가 입을 열었습니다.

“글쎄요, 그게…… 그러니까 어쩌면 우린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더는 숨길 필요도 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배편에 문제가 생겼어요.”

그 순간 박씨와 이씨가 먹던 스니커즈를 툭 떨어뜨리는 걸, 나는 보았습니다.

“본국과 연락이 제대로 안 된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국가는 지금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어요. 그러니 우릴 위해 몰래 구해둔 승선 티켓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해도, 자세한 사정을 알아낼 길은 없겠지요. 정보는 부족하고, 모든 건 비밀에 부쳐져 있는데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금 바다 건너에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뭔가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며 기이하고도 끔찍한 영상이 얼핏 내 눈앞을 스쳐간 것은 말입니다. 나는 그 영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집중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저 물무늬처럼 어른거리다가 자꾸만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일! 두고 보라고요!” 

사실, 나는 그런 말을 외쳤던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그 순간 정신을 잃고 말았으니까요. 김씨, 박씨, 이씨에 의하면, 나는 또한 이렇게도 외쳤다고 합니다.

“그 시체들을 치워야 해요. 그것들이 뿜어내는 슬프고 어둡고 유독한 기운.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 기운! 그걸 막아야 한다고요. 아아, 서둘러야 해요. 아직은,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요!”

그러나 깨어난 다음 아무리 노력해도 그때 내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도대체 어떤 걸 예감했기에 그리도 슬피 울며 절규했는지는, 결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마도 오래도록 그걸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 바로 그 땅, 엎드린 백마 모양의 언덕이 보이는 장소에 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쨌든, 김씨는 나의 말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수첩에 받아 적었습니다. 초능력자인 내가 미래를 내다보며 한 이야기는, 비록 그 의미를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모두 본국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기록을 마친 김씨가 수첩을 덮자, 박씨가 약간은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이제 어떡할까요, 대장님?”

그러자 김씨는 한동안 전방을 응시했습니다. 뿌연 안개 속으로 아스라이 뻗은 길을 오래도록 바라보던 그가 우릴 둘러보며 비장한 어조로 말하더군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일단 항구로 가자고. 국가와 민족이 우릴 부르는데, 이 정도 장애물 때문에 포기할 순 없지. 안 그런가?”

김씨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마음속에서 용기가 샘솟았습니다. 박씨와 이씨도 같은 심정인지 서로 마주보며 활짝 웃더군요. 우린 다 함께 주먹을 쥔 채 “파이팅!”을 외쳤고, 곧 부르릉 소릴 내며 차가 출발했습니다. 항구가 가까웠는지 공기엔 온통 바다 내음이 가득했던 어느 아침의 일이었습니다.


*


엑스의 모험은 점점 더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고, 나는 대륙의 북단을 향해 달리는 열차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그가 연필로 꾹꾹 눌러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드디어 비밀스러운 정보기관―과연 그런 곳이 실제로 존재했는지는 의문이지만―을 빠져나와,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침까지 꿀꺽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을 때, 갑자기 엑스의 스토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를 데리러 온 세 명의 남자들과 함께 항구를 향해 달리던 자동차가, 새로운 페이지에선 춥고 황량한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장면에서 그가 타고 있는 차는 세단도 아니었다. 그것은 네모나고 볼품없게 생긴 식빵 모양의 미니밴이었는데, 그마저도 녹슬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데다 당장이라도 엔진이 터질 것처럼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엑스는 러시아식 털모자인 샤프카를 눌러쓰고 손엔 두툼한 장갑을 낀 채 찌푸린 얼굴로 눈이 펑펑 쏟아지는 전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평소 즐겨 입던 베이지색 레인코트 대신 족제비 털로 깃을 두른 가죽 잠바 차림인 엑스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한동안 설원을 가로지르며 거칠게 운전하던 엑스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오른손을 차양처럼 눈썹 위에 대고 무겁게 가라앉은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털모자 위로 날아와 쌓이는 눈을 털어내며 외쳤다.

“큰일이군요. 국경에 닿으려면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자 같이 따라 내린 일행 중 하나가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놈들이 벌써 꽤 가까이 추격해왔을 텐데. 하지만 이 눈 덕분에 어쩌면 우린 안전하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거나 그쪽엔 당신 같은 능력자가 없으니까요.”

나는 도대체 왜 장면이 바뀌어버린 건지, 그리고 엑스는 여기서, 그러니까 그가 원래 있던 북미의 해안도로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그 땅에서 무엇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혹시 그는 정말로 과대망상에 환시, 그리고 약간의 정신분열 증세를 가진 전직 마트 직원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가 남긴 노트는 오직 그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나는 (예전에 프로젝트를 그만두며 존 휠러 교수가 말한 대로) 어리숙하게도 사기꾼에 거짓말쟁이인 가짜 초능력자의 헛소리에 속아넘어가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오래전 존 휠러의 연구실에선 플라스틱으로 만든 의수를 끼우고 연극을 했던 그가, 어떠한 연유로 모스크바까지 흘러들어왔고, 거기선 한쪽 다리에 의족을 끼운 채 와이 행세를 하는 거라면? 그러고 보면 둘의 얼굴은 너무나 똑같아서, 만약 내 앞에 같은 옷차림으로 서 있는다면 누가 와이고 누가 엑스인지 구분할 수 없을 게 확실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엑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에겐, 아니 그의 이야기엔, 모든 걸 직접 체험한 자만이 가지는 진정성이 있잖아. 그래, 어쩌면 엑스는 일기장에 적었던 혼자만의 상상을 지우개로 북북 문질러 지우는 과정에서, 실수로 이 페이지의 글만 그대로 남겨뒀던 걸지도 몰라. 하긴 처음부터 이 노트엔 몇 번이고 지우개로 지우고 겹쳐 쓴 흔적이 가득했으니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계속해서 노트에 적힌 글을 읽어내려갔다. 갑작스레 바뀌어버린 장면 속에서, 엑스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계 러시아인이었다. 한쪽 손이 의수가 아닌 것도 분명했다. 멀리 눈 쌓인 지평선을 가리킬 때 그의 손놀림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니 자세히 읽으면, 그 페이지에서 엑스는 왠지 좀 어색한 걸음걸이로 눈밭을 걷고 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 같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그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엑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꼭 다문 입매는 날카로웠고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초리는 매의 그것처럼 차갑고 예리했으니 말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이자는 엑스가 아니다. 지금 이 페이지에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동생인 와이다. 그러면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 않는가. 자신만만하고 냉정한 태도, 기묘한 걸음걸이. 시베리아의 눈 쌓인 벌판. 그들이 타고 있던 미니밴의 차종이 우아즈라는 것까지. 

잠깐만, 그렇다면 노트 속 와이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그는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눈보라 날리는 추운 벌판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것일까.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고 누군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불안과 초조로 일렁였다. 그때 엑스가, 아니 와이가, 같이 내린 일행에게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쪽에 나 같은 사람이 없다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내 말은,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는 뜻이지요. 여하튼, 모두들 조용히 해주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난 원격투시를 해야 하니까요. 이 눈발을 헤치고 어느 방향으로 달려야만 국경을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는지, 그걸 알아낼 예정입니다.”

그의 단호한 말투에, 일행은 모두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미니밴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제 끝없이 뻗은 거대한 설원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라곤 회색의 작은 승합차와 가죽 잠바 차림의 와이뿐이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오른손을 자기 이마 한가운데 대고 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와이의 얼굴이 기묘하게 흔들리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그는, 이상야릇한 트랜스 상태로 빠져드는 중이었다.


“이봐, 젊은이. 일어나! 눈 좀 떠보라니까!”

문득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걱정과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보따리를 꽉 끌어안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여자는 남부지방 사투리가 섞여서 제대로 알아듣기 힘든 러시아어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당신 잠꼬대를 너무 많이 해.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싶어서 깨웠어. 얘기해봐, 문제가 있으면 승무원을 불러줄 테니까.”

여자의 말을 들으면서도 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어 객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창밖으론 검은 밤 풍경이 빠르게 휙휙 지나갔고, 그 유리창 구석에 멍한 표정의 남자 하나가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시베리아의 설원도, 낡고 털털대는 미니밴도, 가죽 잠바 차림으로 국경을 넘으려던 와이도, 모두 삽시간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난 노트를 덮으며 여자에게 웅얼댔다.

“아니,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아픈 데는 없어요. 아마 꿈을 꿨나보죠.”

그제야 여자는 안심한 듯 보따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더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객실 문을 열고 나와 식당 칸으로 갔다. 메뉴는 별다른 게 없었고, 난 삶은 계란과 커피를 주문해서 빠르게 먹어치웠다. 

공책을 다시 열어봤지만, 좀전에 내가 읽은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다 꿈이라고? 그러기엔 모든 게 너무나 생생했고. 마치 나 자신이 춥고 눈보라 날리는 시베리아 벌판에 서 있었던 듯 손발이 차갑기까지 했다. 난 노트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보았다. 혹시 중간에 낱장이 끼워져 있고 거기에선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공책의 제본은 튼튼했고, 누군가가 새로운 종이를 끼워놓은 자취도 없었다. 어느새 엑스의 이야기는 본래의 흐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눈 덮인 황량한 설원을 가로질러 국경을 넘어가려는 와이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어눌한 말투를 가진 마트 직원 출신의 엑스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 거다. 그렇다면…… 혹시? 나는 공책을 들고 아까의 그 페이지를 펼친 다음 기차의 흐릿한 등불에 대고 비추어 봤다. 연필로 눌러쓴 글자들 아래 아련하게 남아 있는 지난 글의 흔적을 읽어낼 요량이었다. 눈이 시큰거릴 때까지 종잇장을 노려보자, 드디어 엑스의 필체 아래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옅은 연필 자국을 읽을 수 있었다.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게 완전히 지워지긴 했지만, 거기선, 그러니까 고향을 향해 떠나는 엑스의 여정 밑에선 국경을 넘어 소련을 탈출하려는 와이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던 거다. 

식당 칸에서 돌아오니, 앞자리 여자는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동안은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휙휙 스쳐가는 밤. 겹겹이 겹쳐진 사연들.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는 실현되고 말 이야기들. 어느새 동이 터오는 걸 보며, 나는 다시 공책을 펼쳤다. 새로운 페이지에서, 이번에 엑스는 배에 타고 있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밀항에 성공했고, 이제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