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회



그들과의 접촉은 이렇게 이루어졌어. 어느 날, 난 상관인 안드로포프의 옷을 찾으러(그땐 그가 아직 KGB의 수장으로 취임하기 전이었는데,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비밀 첩보 조직의 실질적인 책임자나 마찬가지였거든) 류드밀라 양복점에 갔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새로 직조한 양모와 실크의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 뭐랄까, 그건 부와 권력의 냄새였어. 나 같은 이들이 걸친 옷과는 완전히 다른 직물. 고급스러운 색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무늬들. 꼼꼼한 바느질로 몸에 딱 맞게 재단되어 핏을 살려주는 슈트. 모두 내겐 꿈만 같은 것들이었지. 난 양복점 주인이 옷을 가지러 뒤편 재단실에 간 동안, 부러움에 가득찬 눈초리로 천을 만져보며 이리저리 걸어다녔어. 그때였지. 어디선가 그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을 알아내고 그것을 널리 알릴 것.”

난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어. 

양복점 주인이 고개를 숙인 채 옷을 개켜서 포장하고 있더군. 

‘역시 잘못 들은 거야.’

이렇게 생각하며 벽면을 가득 채운 직물을 하나씩 만져보려는 순간,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어. 이번엔 좀더 크고 또렷했지.

“세계의 진짜 모습을 알아내고 그것을 널리 알릴 것. 당신은 분명 서명하지 않았소? 그런데 왜 그러고 있는 거요? 무엇 때문에 임무 수행을 게을리 하느냐, 이 말이오.”

천천히 돌아보니, 페도로프(아,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양복점 주인 이름이야)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지 뭐야. 난 그에게 다가가서 멱살을 잡으며 외쳤어.

“당신 뭐야? 어떻게 그 말을 알고 있지?”

그러자 페도로프가 껄껄 웃었어. 

“보여줄 게 있소. 그러니 일단 이것부터 놓고 얘기합시다.”

한동안 그의 옷깃을 움켜쥔 채 노려보다가, 난 마지못해 손을 놓았어. 그렇지만 만에 하나 그놈이 갑자기 공격해올지도 모른단 생각에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 하지만 페도로프는 그런 내 눈초리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새 옷을 종이 가방에 담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어. 마침내 양복 포장을 마친 그가 날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매를 걷어붙이더군. 그러면서 내 앞으로 팔을 쑥 내미는데, 글쎄, 거기 뭐라고 새겨져 있었는지 알아? 그래, 양복점 주인의 팔뚝엔 (털로 뒤덮여 있어서 읽는 데 좀 애를 먹었지만) 이런 문장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어. 

Узнайте секреты мира и раскройте их.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고 그것을 널리 알릴 것.’ 그래, 바로 그 글귀였던 거야. 난 놀라서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어. 기억하지? 예전에 내가 등대에서 지낼 때 이루어졌던 어떤 만남에 대해서. 형도 이젠 짐작했겠지만, 류드밀라 양복점 주인 역시 그 결사의 일원이었던 거야. 그가 맡은 임무는 나 같은 사람들(직접 진실을 알아내고 그걸 기록하는 이들을 말하지)이 마음놓고 활동할 수 있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하고 뒤를 봐주는 것이었어. 

여하간, 저간의 사정을 다 설명하더니 페도로프가 악수를 청하며 말하더군.

“와이, 당신처럼 뛰어난 능력자가 이 도시로 온다는 얘길 전해듣고, 이제나저제나 만날 날만 기다렸습니다. 자, 한번 잘해봅시다. 철의 장막으로 가려진 세계의 진실을 만천하에 널리 알려보자, 이 말입니다.”

나 또한 그의 두툼한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그동안, 그러니까 루뱐카광장의 비밀스러운 석조건물에서 지내며 느꼈던 무력감과 허무가 단숨에 사라지는 순간이었지! 

그후에 일어난 일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나는 나름대로 세계의 이면을 탐사했고, 동시에 사람들의 진실한 기록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했어. 예를 들자면 이곳에서 ‘반체제인사’라고 불리는 자들이 남긴 문서 같은 것들 말이야. 

이제 알겠어, 형? 내가 왜 아직은 여길 떠날 수 없는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이곳을 뜨고 싶어. 그것도 아주 간절히 말이야. 그렇지만 아직은 나에게 할일이 남아 있어. 언젠가 아주 오래전 신비로운 극야의 하늘에 난 서명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전까진 이 차가운 석조건물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어.

하지만 형, 형은 달라. 형은 이제 그곳을 떠나야 해. 더 큰 파국을 막기 위해서,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서.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다가오는 운명을 받아들이란 말이야! 


와이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벅차오르는 심정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아아, 그 아이는 역시 내 동생이었어요. 나처럼 세계와 인류를 위해 위대한 일을 수행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아무리 와이가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는 해도, 회포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한다니. 나는 우리의 슬픈 운명을 못내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세상 단 하나뿐인 혈육과 함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었고, 비록 어렴풋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나누며 마음을 따스하게 덥히고 싶었으니까요. 난 머뭇대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헤어지면, 또 어디서 널 만날 수 있겠어?”

그러자 한동안의 침묵 끝에 동생이 대답하더군요.

“걱정하지 마, 형. 우린 결국 또다시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 그게 운명이야. 태초부터 정해져 있다고. 왜냐하면, 형과 나는 세상 하나뿐인 핏줄이니까.”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에 짐을 꾸렸습니다. 어깨에 가방을 멘 채 창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밀었지요. 로비엔 톰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창틀에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연통을 꽉 붙잡고 한 발씩 내려갔습니다. 마침내 땅에 발이 닿았을 땐, 세상을 다 얻기라도 한 듯 안도했습니다! 어쨌건 결국 난 살았으니까요!

잠깐만요. 혹시 당신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을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엑스는 객실에서 이 내용을 써나갔을 텐데, 노트 안에서는 창문 밖으로 나가 벽을 타고 매달린 채 탈출을 감행하고 있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앞뒤가 맞지 않잖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내 추측이 맞지 않습니까? 하긴, 그런 의심이 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오직 한 방향으로만 가늠하는 당신 같은 평범한 이들에게, 곧 다가올 미래를 태연히 서술하기란 불가능할 테니까요. 하지만 단언컨대, 내가 이 방을 탈출하여 저 아래 호텔 뒷길에 발을 디디는 것은 이미 실현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나를 지나가던 노숙자가 물끄러미 쳐다볼 것인데 그 역시 이미 일어난 일과 같고요. 그 노숙자를 한번 흘끗 본 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내 쓸쓸한 뒷모습이 보입니까? 그리고 멀리 어디선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검은 승용차와 세 명의 남자들은요?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꼈지요. 하지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일단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저 창을 열고 나가, 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야 하니까요. 시간이 없습니다. 좀더 지체하다보면 톰과 마주치게 될 테고, 그러면 난 결국 그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에요. 그럼, 이만. 

추신: 아까 낮에 존 휠러 교수의 연구실에서 끝끝내 내리지 못한 그 결론―내가 진짜 초능력자인지 아니면 그저 한낱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기꾼에 불과한지―에 대한 답을 내릴 때, 이 노트를 참고해주길 바랍니다. 아울러, 언젠가는 반드시 읽게 될 나의 뒷이야기까지 더해진다면, 당신이 판단을 내리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마지않는 바입니다. 



※ 의견 6.

와이가 늘어놓은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가 말한 위치 정보를 토대로 지도를 찾아본 결과, 등대가 있던 곳은 북드비나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 위치한 마을 인근임을 알 수 있었다. 일 년의 절반 이상이 극야의 어둠에 잠겨 있는 땅. 구글 어스를 통해 들여다보니,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지 수십 년은 지난 듯한 등대 하나가 얼어붙은 바다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아르한겔스크 관청에 메일을 보냈지만, 한동안 답신 따윈 오지 않았다. 하긴, 수십 년 전, 브레즈네프 서기장 시절의 기록을 살펴봐달라는 요청에 누가 그렇게 쉽게 응답할 수 있겠는가. 답신 받는 것을 포기하고 앤드루 김의 자서전을 계속 읽고 있을 때, 새로운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띵동’ 하고 울렸다. 컴퓨터를 켜니, 발신자가 ‘아르한겔스크 지방삼림관리소’라고 적힌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러시아어로 적힌 내용을 처음부터 알아본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을 구글 번역기를 통해 우리말로 옮겼고, 일부 어색한 부분은 나름대로 사전을 찾아가며 다듬어봤다.

“귀하가 문의한 이고르 바츨라프 씨의 삼림관리소 근무 기록을 검토한 결과를 통보합니다. 본 삼림관리소는 1925년 처음 개소한 이래, 아르한겔스크주 일대의 국유림을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맡아온바, 당연히 역대 근무자들에 대한 기록이 보관되어 있어야 마땅하나. 불가항력적인 여러 사정에 의해 일부 서류들이 유실되었으며, 따라서 현재로선 이고르 바츨라프 씨의 근무 기록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함을 고지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 지역의 국유림을 관리하는 업무는 전통적으로 등대지기가 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엑스가 남긴 공책의 기묘한 점은, 그것이 끝날 듯 끝날 듯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호텔 객실 창을 통해 도망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아니, 정확히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몇 장의 여백을 마련해놓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해서 그 페이지들이 완벽하게 새하얀 종이로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엔 어떤 흔적, 뭔가를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가 지운 자국이 가득했다. 만약 먹지만 한 장 있다면, 그 위에 대고 살살 문질러서 탁본을 뜨듯 원래 적힌 이야기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겐 먹지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런 일을 해볼 만한 시간이 없었다. 그저 빠르게 비어 있는 페이지를 넘기고 다음 이야기를 읽어볼 수밖에.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여섯시가 넘었고,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룸서비스로 삶은 계란과 보드카 섞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대충 방에서 식사를 때우면서 엑스가 남기고 와이가 모스크바에서 따라 적었다는 그 공책을 마저 읽어볼 요량이었다. 잠시 후 벨이 울렸고, 문을 열어보니 은색 뚜껑이 덮인 쟁반이 트롤리 위에 놓여 있었다. 달걀을 까서 소금에 찍어 삼키고 보드카를 섞은 커피를 쭉 들이켜자, 뱃속이 따스해지면서 서서히 잠이 왔다. 술기운 덕택인지, 좀전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초조한 기분도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 생각해보면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류드밀라 양복점 지하에서 와이에게 들은 이야기들은, 사실 그 어떤 증거도 없는 망상일 수도 있지 않은가. 비록 그가 진짜 초능력자라고 해도, 루뱐카광장 구석의 기이한 칠층 건물에 너무 오래 숨어 산 나머지 인지능력과 현실감각이 현저히 저하되어버리고 만 건 아닐까. 세계를 몸으로, 손으로, 실제적 감각으로 파악하지 않고, 그저 천리안과 원격투시로만 감지한 사람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인지부조화. 그에게 세상은 물리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의 어느 한 부분에 상상으로 건설된, 가상현실 같은 것이리라. 그런 그가 귀띔해준 수많은 정보를 과연 나는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정말로 리하르트는 수상한 인물이며 나를 감시하고 있고, 내가 시카고로 보낸 기사는 중간에 바꿔치기 되어 생전 처음 보는 문장을 실은 채 무선통신망을 타고 세계 곳곳으로 전송되었을까. 진짜로 나는 위험에 처해 있고, 어서 빨리 엑스의 노트를 읽은 다음 이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이런 의문에 휩싸인 채 쉽사리 답을 내지 못하고 번민하는데, 누군가가 객실 문을 두드렸다. 아마도 식사를 마친 빈 그릇을 가지러 온 거겠지. 

달걀 껍데기를 모아 접시에 그러담고 빈 커피잔까지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문을 여니, 밖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머리를 내밀고 좌우를 살폈지만, 어둠침침한 복도엔 정적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문을 닫으려는 순간, 발아래 떨어져 있는 딱지 모양의 종이를 발견했다. 누군가 보는 이는 없는지 재빨리 살핀 후, 쪽지를 집어들고 문을 닫았다. 침대에 앉아 펼쳐보니, 아래와 같은 짧은 메모가 휘갈겨져 있었다. 

―서두르시오. 어서 그곳을 떠나 시카고로 돌아가라, 이 말입니다. 

와이의 전언일까. 종이를 손에 든 채, 나는 잠시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만약 와이의 말에 따라(이 메모를 그가 보냈을 거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이곳을 떠난다면, 그러니까 시카고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자고 있을 편집장에게 다짜고짜 전보를 치고는 “여길 뜨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짐을 꾸려버린다면, 기자로서의 내 경력도 동시에 끝장날 것이었다. “이곳 모스크바에 와이라는 초능력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어쩌고저쩌고……”라고 해명을 늘어놓는다 해도, 편집장이 믿어줄 리는 만무했다. 아니 내 말을 믿긴커녕 도리어 미친놈 취급이나 하겠지. 성질 더러운 그는 분명 이렇게 소리치며 재떨이를 집어던질 게 확실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당장 나가! 넌 해고야!” 

문득 류드밀라 양복점 지하에서 겪은 일 자체가 진실인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날 저녁 난 정말로 보드카를 죽이 되도록 퍼마신 다음 모스크바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뚜껑이 열린 맨홀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 아닐까. 그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었다가 꿈속에서 기괴한 양복점을 방문한 뒤 와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났던 걸지도. 아니, 잠깐. 혹시 난 지금도 여전히 시카고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고, 엑스를 만나러 갔다가 들른 뒷골목 카페에서(그 가게 이름이 뭐였더라. 그래, 맞아, ‘소원의 집’이었지!) 엎드린 채 자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고, 지금 이 순간이 실제라는 증거는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퍼뜩 뭔가가 떠올라, 서둘러 책장을 뒤졌다. 그래, 소원의 집.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책꽂이 가장 아래 칸 구석에 꽂혀 있던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집 맨 뒤에 「소원의 집」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것은 모스크바로 들어올 때 소지가 허락된 몇 권 안 되는 책들 중 하나였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침대 구석에 걸터앉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뒤로 갈수록 머리가 멍해지더니, 마치 세상이 앞으로 빠르게 두 번, 다시 뒤로 빠르게 두 번 회전하는 듯 느껴졌다. 



※ 의견 7.

이 부분에서 앤드루 김은, 뜬금없이 환상문학의 본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 그는 환상문학에서 ‘환상’이라는 용어 자체에 이미 문제의 소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설파한다. 환상은 결코 환상이 아니며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의 요지인 듯하나, 워낙에 두서가 없어서 여기선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든, 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문학론을 늘어놓던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선 별다른 결론도 없이 마치 실이 툭, 하고 끊어지듯 글을 끝낸다. ‘결론에 갈음하여’라는 조그만 소제목을 붙이고는,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인 「소원의 집」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으며. 


 “아무 말도. 그녀는 그냥 숨만 내쉴 뿐이었어. ‘하아’ 하고 말이야. 그러고는 다시 부엌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리더군. 질질 끄는 그 실내화 소리 말이야. 그러고는 다시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어.”

“그러는 동안 넌 계속 현관 계단에 서 있었고?”

애시크로포트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발길을 돌리는데 지나가는 한 남자가 말하더군. ‘이 집은 빈집인데요.’



「소원의 집」을 다 읽어갈 즈음, 테이블 위 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 

책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채 나는 전화기를 노려봤다. 왠지 수화기를 드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화벨은 계속해서 울렸고, 마침내 난 수화기를 들어 천천히 귀에 갖다댔다.

“……”

수화기를 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전화선 저편에서도 탐색하듯 낮은 숨소리만이 쌕쌕, 들려왔다.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리하르트였다.

“이봐, 앤드루! 전화를 받았으면 말을 해야지! 지금 호텔 지하에 있는 술집으로 내려와! 다들 거기 모여서 한잔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리하르트가 거기까지만 말하고 끊었으면, 난 지금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자면, 소련 지도부의 권력 암투에 관한 특종기사를 쓰고, 일 년 후 시카고로 돌아가 승진도 하는 등 승승장구한 끝에, 잘 나가는 언론사 간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그날 밤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는 대신 아래로 내려가 모두와 어울려 술을 마셨을 테니까. 그러나 리하르트는 말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내게 마치 확인하듯 이런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설마 딴맘 먹고 있는 건 아니지? 혼자서 어디로 사라져버리려는 거 아니냐고.”

그가 뭐라고 더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어쩌면 리하르트는 그때 이렇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지난번 안드로포프 취임식 날 만난 여자랑 또 어디서 뒹굴 계획인 거 다 알고 있다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말이다) 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방안을 둘러봤다. 어차피 챙겨야 할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옷장을 열고 트렁크를 꺼냈다가, 고개를 저으며 도로 밀어넣었다. 만약 이렇게 큰 여행용 가방을 끌고 로비를 지나간다면, 그건 남의 이목을 끌겠다고 작정한 거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러고 나간다면, 프런트에서도 내게 다가와 “체크아웃 하실 겁니까?”라고 물을지 몰랐다. 고심 끝에 가죽으로 된 작은 가방을 꺼내 그 안에 대충 이것저것 쓸어넣었다. 갈아입을 속옷과 양말, 칫솔, 치약, 여권과 지갑, 마지막으로 엑스가 남긴 노트와 카메라를 챙긴 다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가방을 메고 조용히 밖으로 나와 엘리베이터에 탔다.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기라도 하면 의심을 살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로비를 지날 때 날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외신기자 한 명이 잠깐 외출을 하는 것 정도로 보일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겠지만 말이다.

곧장 역으로 가서 기차표를 샀다. 역무원이 무심한 얼굴로 행선지를 물었을 때, 난 거의 자동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르한겔스크. 가장 빨리 출발하는 것으로 주시오.”

저녁 시간의 역은 한산했다. 나는 대합실을 빠르게 가로질러 기차에 올랐고, 자리에 앉자마자 문을 닫았다. 건너편엔 늙은 여자 하나가 보퉁이를 옆에 끼고 앉아 있다가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훑어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지만 못 본 척하며 창밖만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역무원이 객실 문을 두드렸다. 그가 장갑 낀 손으로 표를 앞뒤로 살피고 여권을 뒤적이는 동안,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손바닥은 땀이 배어나와 축축해졌고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역무원이 표와 여권을 돌려주고 어디론가 가버리자, 절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출발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열고 엑스가 남긴 공책을 꺼냈다. 


20. 엑스가 옥수수밭에서 만난 남자들과 여행을 떠나다


*주의사항: 이 부분은 과거형으로 쓰였으나 결국은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앤드루,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만, 시간은 결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에요. 때로 시간은 완전히 역방향으로 흘러가고, 정보는 ‘원인→결과’ 대신 ‘결과→원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왜 언제나 시간이 정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식될까요? 내 생각에, 당신은 지금 분명 그런 의문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누구나―하다못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시간이 반대로 흐르는 순간을 맞닥뜨립니다. 다만 그걸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요! 그래요, 일반적인 사람들에겐 그런 순간이 보통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거든요. 아마 당신도 많이 경험했을 겁니다. 꿈속에선 시간이 제멋대로 이리저리 흐르고, 그럴 때 당신은 이러이러한 시공간에서 저러저러한 시공간으로 마구 옮겨 다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일반인(여기서 일반인이란, 프사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의미합니다)들이 오직 꿈속에서만 맞이하는 거꾸로 된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도 수시로 겪습니다. 때론 역방향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의도적으로 몸을 담근 후, 그 안에서 정보를 캐내기도 하고요! 자, 아시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해서 아직 겪지도 않은 일을 당신에게 들려줄 수 있는지를? 이해했다면, 어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지요. 그러니까, 톰을 피해 호텔에서 도망친 뒤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말입니다. 


어두운 밤거리를 터벅터벅 걷자, 텅 빈 대로가 나타났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나는 가방을 세워둔 채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봤습니다. 오른쪽 길은 비록 흐릿하긴 하지만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간간이 자동차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반면 왼쪽으로 뻗은 길은 그저 깊고 깊은 어둠 속으로만 빨려들어갈 뿐, 끝이 보이지도 않았고 가늠할 수도 없었지요. 왠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왼쪽으로 가. 왼쪽으로. 거기가 네 갈 길이야. 왜냐하면, 그게 운명이니까.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혼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나는 왼쪽으로 돌아섰고, 아무도 없는 스산한 밤길을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습니다.

기분이 어땠냐고요? 솔직히, 결단을 내리기 전까진 가슴이 쓰라리고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바깥세상에 발을 들이고 나니, 의외로 마음이 담담해지고 오히려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미래에 묘한 기대감까지 생기더군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지만, 이제 더는 지도 위의 한 점을 응시하며 하루를 보내거나 어두컴컴한 땅속을 뒤지며 뭔가를 찾아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더 컸던 걸지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걷고 또 걸었으니까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퍼뜩 피로를 느껴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어느새 나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변에 서 있더군요. 

‘지도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둡기만 한 밤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창공 가득 별이 반짝였지만, 나의 별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문득 스스로가 우스워져 혼자 피식 웃었지요.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다니 말입니다. 하여간 국도변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문득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생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봤지만, 공간을 꽉 채운 무수한 전파들이 나의 신호를 모두 흡수해버렸어요. 첫번째로 보낸 신호는 텔레비전 코미디 쇼의 전파에, 두번째로 보낸 신호는 지역방송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의 전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낸 신호는 멀리 베텔게우스 성좌에서 외계 종족들이 쏘아올린 전파에 흡수되는 걸 보며, 나는 그 짓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무서운 진실을 마주하고 말았지요. 나의 능력이란 게 참말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조용하고 사방이 벽으로 막힌데다 방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정보기관의 회색 방이나 호텔 객실에서만 텔레파시를 보낼 수 있고, 이렇게 사방이 확 트인 바깥에선 수많은 방해 요인들 때문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좌절감으로 울음이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나는 다시 한번 여기저길 둘러봤습니다. 그때, 길 양옆으로 한없이 뻗은 옥수수밭 사이로 저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오직 사각거리는 옥수숫대 소리만 들리던 국도변에서 만난 그 작은 불빛이, 그때의 나에겐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등대마냥 반가웠다면, 당신은 믿으시겠습니까? 아아, 나는 반가움과 흥분에 허우적대며 그 불빛을 향해 달렸습니다. 키보다도 높이 자란 옥수숫대에 부딪히고 얼굴을 긁히기까지 해가며 가까이 가보니, 불빛은 조그만 공중전화 부스에서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녹슬고 낡은 공중전화 부스 하나가 옥수수밭 한가운데 서 있었던 거지요. 정말로 기이한 광경 아닙니까. 상상해보세요. 끝을 알 수 없으리만치 넓은 옥수수의 망망대해 속에, 공중전화 부스가 덩그러니 선 채 빛을 발하는 초현실적인 풍경을 말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오직 나만을 위해 뚝딱 만들어놓은 듯한 그 부스 안엔, 마침 잔돈마저 딱 이십원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니, 이 센트였겠군요. 여하튼 얼마가 남아 있었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요. 정말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화기 옆에 달랑 놓여 있던 동전이 딱 한 통의 전화만을 걸 수 있게끔 정확하게 세팅되어 있더라는 사실입니다.

난 부스 앞에 서서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내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이럴 수가! 명함 한 장이 손에 집히지 뭡니까. 물론 처음엔 그 작은 종이 쪼가리가 명함인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쓰레기나 껌 포장지일 거라고만 여겼죠. 아무 생각 없이 땅바닥에 던지려다 문득 궁금한 마음에 펼쳐보니, 세상에나, 그것은 오래전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를 비롯한 우리 팀 전체가 회식을 했을 때, 내게 영입 제안을 했던 의문의 남자들이 건네주고 갔던 바로 그 명함이지 뭡니까. 거기 적힌 전화번호를 보는 순간(명함엔 다른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오직 숫자만이 나열되어 있었어요),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은 다음, 다이얼을 돌렸지요.

하지만 신호가 수십 번 울리도록 저쪽에선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일단 끊은 뒤 속으로 숫자를 백까지 세고 다시 걸어봤지만, 이번에도 받는 이는 아무도 없더군요. 

‘제길.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자들이 나를 갖고 논 거야.’

나는 속으로 욕을 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명함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 거짓말처럼 요란하게 벨이 울린 겁니다. 벨은, 방금 떠나온 그 공중전화 부스에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난 머뭇대다가 수화기를 들고 말없이 귀에 갖다댔습니다. 잠시 후, 전화선 저편에서 기계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미스터 엑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 잠깐만 계십시오. 곧 모시러 갈 테니까요. 아, 밤바람이 찹니다. 옷을 잘 여미고 계신다면 더욱 좋겠군요.”

전화는,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툭 끊겼습니다. 

나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들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