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19. 와이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하다


오래전 경성의 어느 병원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은 뒤, 난 생전 처음 보는 남자들과 함께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야 했어. 형도 거기까진 기억하지? 차에 타기 전 나를 잠시 안고 있던 어떤 여자가 기억나. 회색 드레스에 숄을 두르고 슬픈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던 여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나에게 쿠키와 따뜻한 우유 한 병을 줬어. 그러고는 내 볼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속삭였지.

“조금만 참으렴. 넌 모스크바로 가서 수술을 받게 될 거야. 그러면 건강해질 테고, 보통 사람들처럼 당당히 걸어다닐 수 있게 될 거란다.”

나 역시 뭔가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저 차 뒷유리에 얼굴을 꼭 붙인 채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


날 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차를 몰았고, 마침내 도달한 곳은 거대한 항구였어. 거기서 우린 어떤 커다란 배에 올랐는데, 갑판엔 추레한 차림의 승객들이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검은 밤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긴 고동을 울리며 출발한 배는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 흔들리는 선실에서 난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고. 그러다가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어 눈을 뜨니,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나를 안고 갑판에 서 있지 뭐야. 

‘혹시 바다에 던지려는 걸까……?’ 

이런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지만, 어린 마음에도 소리 내어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발밑의 검은 물만 내려다보고 있었던 거야. 

다행히 그들은 날 바다에 던지지 않았어. 그저 뚫어져라, 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저기 멀리 어딘가에서 작은 배 한 척이 소리 없이 다가왔어. 남자들은 나를 안아서 그 배에 타고 있던 어부(로 보이는 사람)에게 넘겼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뭐였는지 알아? 그래, 그 남자들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로 가슴에 십자가를 그려 보이며 축복의 말을 해주더군. (그게 러시아정교회 식 성호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어.)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작은 배 위에서 지낸 시간을, 난 잘 기억하지 못해. 배가 엄청나게 흔들렸고 파도가 머리 위로 높이 넘실댔다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멀리 작은 어촌이 보일 때쯤 설핏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떴을 땐 이미 어떤 기차 안에 있었어. 창밖으론 낮은 관목과 풀이 듬성듬성 자란 벌판이 한없이 계속됐는데, 중간중간에 순록들이 꿈처럼 떼 지어 달려갔지. 난 기차 안에서 몇 날 며칠을 보냈어. 외롭긴 했지만 아름다운 여행이었다고 할까. 여기저기 만년설이 쌓인 들판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고, 밤엔 하늘에서 희뿌연 해가 은은하게 빛났으니까! 

그렇게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생전 처음 보는 겨울 왕국이었어. 멀리 보이는 산은 은빛으로 반짝였고 여름인데도 공기는 차갑고 신선했지. 북극해에 면해 있는 그 도시의 이름이 아르한겔스크라는 것은, 좀더 자란 후에야 알게 되었어. 내가 거기서 수술을 받았냐고? 아니, 그렇지 않아. 수술은커녕 의사들은 날 보고 쩔쩔맸고, 대체 이 아이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전보를 칠 뿐이었지. 

혹시 날 데리고 온 사람들이 문서에 적힌 지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걸까? 도시의 이름을 잘못 읽거나 내 이름을 다른 애와 혼동한 끝에, 완전히 다른 장소로 나를 보내버렸던 건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진짜로 놀라운 것은, 모스크바의 큰 병원으로 가기로 했던 아이가 중간에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일지도 몰라. 그래, 정말이지,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았으니까. 하긴, 크렘린의 그들은, 한반도의 수도로 가서 나를 데려오라는 문서에 서명을 한 즉시 나 따위엔 신경을 꺼버렸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 어차피 필요한 건 ‘실제의 나’―샴쌍둥이인 형과 분리 수술을 하여 한쪽 다리를 잃고 만 아이―가 아니라, 사진 속에 찍힌 나, 동서 화합과 세계평화의 상징으로서의 나였을 테니까.

어쨌든, 나를 병원으로 데려온 이들 중 하나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어. 그런 다음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었어. 그중 한 명이 뒤돌아서서 의자에 앉은 날 가리키며 언성을 높이기도 하더군. 마침내 얘기가 끝났는지, 날 데리고 온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원을 빠져나갔어.  

난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 의자에 앉아 무작정 기다렸어. 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기다린 거야. 아무도 나에게 이리 들어와서 따뜻한 우유라도 마시라고 권하지 않았고, 사실 나도 기대는 하지 않았어. 한참 뒤 지저분한 가운을 입은 의사 두어 명이 내게 다가왔어. 그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주위에 빙 둘러서서 뭔가를 논의한 후에 한꺼번에 사라져버렸어. 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 왜냐하면…… 다른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어느새 벽에 걸린 커다란 괘종시계에서 열두 번 종이 울렸고, 지나가던 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가 날 보더니 외쳤어.

“얘, 일어나렴! 정신 차려!”

만약 그때 간호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아르한겔스크 대성당 위에서 대천사라도 만났을까? 형도 알겠지만, ‘아르한겔’은 도시를 수호하는 대천사 미카엘을 뜻하는 이름이니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간호사의 품에 안겨 어느 작은 방으로 갔어. 거기서 그녀는 따뜻한 우유 한 그릇과 검은 빵 한 조각을 줬어. 허겁지겁 먹는 날 이윽히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어.

“넌 어디서 왔니?”

“왜 온 거니?”

“어디로 가는 거니?”

하지만 난 어떤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저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 나를, 간호사는 애처로운 눈길로 쳐다봤어. 그러더니 밖으로 나가 한참 만에 어떤 나이든 여자와 함께 돌아오더군.

“여기, 이 아이입니다. 아마 누군가가 버리고 간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해서 난 아르한겔스크의 시립 보육원으로 가게 된 거야. 

보육원에서의 나날에 대해선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행복했던 기억이라곤 없거든. 우린 언제나 줄을 서 있었고, 머리를 짧게 깎았으며, 매 순간 배를 주렸어. 또 그곳에선,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다들 나만 보면 수군댔고 이리저리 피하기 바빴지. 그렇다고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던 건 아니야. 난 그저 눈에 보이는 뭔가를 말해줬을 뿐이라고.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을 말이야.

“오늘 집에 가면 끔찍한 일을 맞닥뜨릴 거예요. 고양이가 죽어 있을 테니까요.”

“저 남자는 당신을 속이고 있어요. 다른 여자가 있다고요.”

“내일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아요. 죽을지도 몰라요.”

복도에서 마주치면, 사람들은 내 눈길을 피하기에 급급했어. 그들은 나를 악마에게 영혼을 잡아먹힌 놈이라고 욕했지. 어쩌면 그런 모습이 우스워서 더더욱 아무 말이나 떠들었던 건지도 몰라. 처음엔 보이는 것만 말해줬지만, 나중엔 거짓말을 섞어서 그들을 겁주며 즐거워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난 온갖 무서운 미래를 꾸며내어 들려줬고, 애들은 두려움에 빠져 슬금슬금 나를 피하고 있었어. 식당에서 혼자 외따로 떨어져 앉아 수프 그릇을 비우고 있는데, 원장이 어떤 남자와 함께 내 쪽으로 다가오지 뭐야. 또 혼날 거란 생각에, 난 얼른 숟가락을 내려놓고 식판을 든 채 자리에서 일어섰어. 최대한 빨리 식당을 나가고 싶었지만, 목발을 짚고 걷느라 결국 그들이 다가오는 걸 피하지 못하고 말았어.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원장이 평소와 달리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걸더군.

“여기 있었구나, 이고르! (아,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나? 나의 러시아식 이름이 이고르라는 것을 말이야.) 인사드리렴. 앞으로 널 데려가 키워주실 분이다.”

하지만 내가 인사도 하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자, 원장은 당황하여 변명을 늘어놓았어.

“바츨라프 씨, 용서하세요. 아직 예절교육을 다 받지 못해서 그렇지, 본성은 선한 아이랍니다. 정말이에요. 일도 잘하고…… 비록 다리는 온전치 못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손이 재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조건에 꼭 맞는다고 보면 됩니다. 웬만한 글자는 다 읽고 쓸 줄 알고 산수도 곧잘 하니까요.”

바츨라프라는 남자는, 인사도 없이 반항적으로 노려보는 나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어.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원장에게 고개를 끄덕였어.

“괜찮습니다. 이 또래 남자아이들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요. 그럼, 오늘 바로 데려가겠습니다. 얘야, 가서 짐을 챙겨오너라.”

그렇게 해서 나는, 바츨라프라는 남자를 따라 대륙의 북단에 있는 어느 호숫가 마을로 가게 된 거야.  

남자는 퇴역군인이었고 나처럼 한쪽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었어.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이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지. 그는 내가 들고 온 작은 보따리를 받아서 자기 어깨에 멨어. 그러고는 말없이 앞서 걷기 시작하더군. 도시의 변두리 쪽으로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의수와 의족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어. 그는 거기서 내게 꼭 맞는 의족을 맞췄고, 주인에게 자기 주소를 적어줬어. 

“다 만들어지면 이곳으로 보내주시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낡고 털털거리는 차에 올랐고, 밤으로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북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던 거야.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바다와 호수와 강이 하나로 맞닿은 신비로운 마을이었어.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까지가 지평선이고 어디서부터가 수평선인지도 알 수 없는 그곳 어딘가에, 바츨라프가 일하는 등대가 있었지. 거기서 그는 등대의 불을 밝혀 지나가는 배를 인도하고, 틈틈이 주변의 수목 상태를 조사해서 가장 가까운 도시인 아르한겔스크의 삼림관리소에 보고하는 일을 했어. 나? 난 그의 조수 노릇을 했다고 보면 될 거야. 종이에 잔뜩 적힌 침엽수들의 수를 더하거나 빼서 정리해두고, 때론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나 등대의 불을 깜빡이게 하는 일도 했으니까. 어쨌거나 거기서 나는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어. 우린 아침에 일어나선 말없이 빵과 차를 먹고 온종일 말없이 일한 뒤, 밤이면 말없이 난롯불 앞에서 책을 읽다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잠들었지.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수년간 계속됐어. 

그래, 아마도 그 만남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대륙의 가장 북쪽, 세계의 끝이나 마찬가지인 그곳에서 등대의 불이나 밝히며 평온하게 살고 있을 거야. 세상의 변화와 흐름 따윈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야. 하지만 일어나야 할 일은 결국 일어나는 법. 운명은 나를 비껴가지 않았고, 어느 극야의 밤, 난 마침내 그것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던 거야. 


그래, 형. 그 전언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내게 다가왔어. 

그 밤. 난 등대 밖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혼자 밖으로 나왔지. 하늘엔 오로라가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끝없이 계속되는 밤이 멀리 수평선까지 펼쳐져 있었어. 등대로부터 멀리 떨어져 걷는데, 어디선가 아주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지 뭐야. 솔직히 말해서, 난 두려웠어. 극지방을 떠도는 악령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뒤를 따라다니며 수런수런 떠들다가,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영혼을 앗아간다는 무시무시한 전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톱에서부터 하얗게 핏기가 사라져갔어.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화장실은 무한히도 멀어 보였고, 거기까지 걸어가는 동안 침엽수들은 미친듯이 자라나 얼어붙은 땅 위로 그림자와 바람과 어둠을 뿌려댔어. 창공에서 쏟아져내린 별들은 눈처럼 흩날리며 사방에서 반짝였고. 하지만 난 그저 걷고 또 걸었어. 절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이야. 드디어 화장실의 판자로 만든 문에 손을 얹는 순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고 별들마저 도로 솟구쳐올라 하늘에 박히더군. 내 뒤에 붙어 바짝 따라오던 영혼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어. 아쉽군. 아까워, 저애를 데려올 수 있었는데. 우리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이젠 누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그때였어. 어둠의 틈이 살짝 열리며 세상이 휘장처럼 둘로 갈라져버린 건 말이야. 극야의 한가운데 생긴 균열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와 얼굴을 내밀었어. 거기엔, 그래, 거기엔 말이야, 형,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내가 모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뒤섞여 있었어. 아버지와 어머니, 김호선과 그 여자친구, 형과 허드슨 중사, 몰로디노프와 마술사, 물리학자와 그 조수, 앳된 군인과 늙은 군인, 땅속에 쌓인 채 중얼거리는 이들,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 핵폭탄을 실은 전투기 조종사, 문서보관소의 공무원들, 보통 사람들, 미래의 어느 도시의 도서관 사서, 그리고 어떤 젊은이. 그는 울고 있었어. 아니, 그저 멍한 눈으로 씁쓸하게 나를 응시했던 걸까. 여하튼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늘어놓으며 나에게 팔을 휘저었어.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그리하여 세계의 이면을 드러내달라고. 난 공포와 두려움으로 울부짖었어. 그러자 얼음 위로 가라앉았던 어둠이 크게 출렁이더니 거대한 파동이 되어 멀리멀리 퍼져나갔어. 곧이어 그것은 다시 되돌아와 얼굴에 부딪히고 귀로 흘러들어 고막을 때렸지. 그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난 건 한 통의 편지였어. 누군가에게서 온 전언이었다고!

서둘러 종이를 펼치니, 거기엔 이런 말이 단 한 줄 적혀 있을 뿐이었어. 

―세계의 진짜 모습을 알아내고 그것을 널리 알릴 것.

나는 그 편지가 기억을 탐사하려는 자들 앞으로 배달되는 일종의 초대장이라는 것을 직감했어. 난 뭔가에 홀린 듯 그 문장 끝에 오른손 검지로 내 이름을 적었어.

서명을 마치자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내 손에서 편지를 앗아갔어. 

그때부터였던 거야. 기억을 정리하는 사람들에 대항해, 기억을 탐사하는 결사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등대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뒤였어. 신발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문을 여니, 바츨라프 씨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더라고. 그는 내가 밤 내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어.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지.

“이번엔 좀 멀리 갈 것 같다. 호수 건너편 침엽수림을 둘러봐야 하니까. 다행히 얼음도 서서히 녹기 시작했고.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아마 저녁 늦게나 돌아올 거야.”

그런데 형, 형은 북극해를 면한 호수에서 배를 타본 적 있어? 그건 정말로 신비로운 경험이거든. 하늘과 호수가 만나 보라색으로 물든 대기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노라면, 마치 구름 위로 항해하는 듯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고 말지. 내 생각엔, 바츨라프 씨 역시 그 신비로움에 자신의 영혼을 내어준 게 확실해. 왜냐하면 그날, 결국 그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삼림관리소 직원이 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였을 거야. 그는 나에게 바츨라프 씨가 하던 일을 맡아달라고 했고, 급료와 약간의 식량을 한 달에 두 번 배송해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렇게 해서 나는 대륙의 북단에서 등대에 불을 켜고 침엽수림의 변화를 관찰하며 살아가게 되었던 거야. 

너무나 단조롭고 지루한 나날 아니었냐고? 전혀 그렇지 않아.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았다고도 할 수 있지. 그곳에서 나는 매일 지구를 내려다봤으니까. 불을 밝히는 시간과 침엽수림의 분포를 관찰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에, 난 등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어. 그런 다음 눈을 감으면, 세계의 모든 속삭임과 비명과 울음과 웃음이 들려왔어. 그 소리들은 과거로부터 들려오기도 했고 미래로부터 흘러오기도 했으며 때론 현재를 관통하고 있기도 했어. 그 수많은 사연들을 나는 머릿속에 각인시켰고 기억하고 복기하거나 암송하고 노래 불렀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할일을 다 마친 다음 등대 꼭대기에 있는 작은 방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는데, 어디선가 아주 낯익은 느낌이 흘러오지 뭐야. 나는 그 기묘한 느낌이 샘솟는 장소를 찾아 온 정신을 집중했어. 그것은 세계의 가장 동쪽, 일본이라는 섬나라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바닷가에 있는 나카사키란 도시의 어떤 건물 내부에서 시작되고 있더군. 

그런데,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건 낯설면서도 낯익었고 그리우면서 동시에 슬펐으며 입속에 맴도는 꿈 이야기처럼 어렴풋했지. 난―아니, 정확히는 내 영혼이라고 해야 할까? 하여간―그 느낌을 좇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 거기선 한창 뭔가를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중이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그 기묘한 느낌은 리본 커팅을 하기 위해 서 있는 사람 중 하나로부터 뿜어져나오고 있었어. 그는 키가 작고 조금은 뚱뚱했는데, 양복 윗주머니에 수첩 한 권을 꽂고 있더군. 나는 다시 한번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고, 마침내 수첩의 삼차원 이미지를 공중으로 띄워올리는 데 성공했어. 그리고 그걸 한 장씩 넘기는 순간, 아아, 형,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알아? 그래, 형이 짐작한 그대로야.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남긴 수첩이었어! 맨 첫 장에 ‘이득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바로 그 수첩 말이야!

수첩을 한 페이지씩 읽으며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되새기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나를 엄습했어. 누군가가,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인물이 나와 동시에 수첩을 읽고 있는 듯한 기기묘묘한 기분이라고 할까.  

‘대체 누구지?’

조금은 떨리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난 그 시선의 주인공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어. 얼마나 쉬지 않고 지구 구석구석을 살폈는지, 혈당이 떨어져 손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입은 바짝 말라 침 한 방울 삼킬 수 없을 정도였지.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았고, 그 시선―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첩을 같이 읽던 그 누군가―을 찾아내겠다는 열망은 내 안에서 더더욱 크게 불타올랐어. 

얼마나 헤매었을까, 마침내 북아메리카의 어떤 큰 도시 지하철역 벤치에 앉아 있는 가 눈에 들어왔어. 그 남자는 철 지난 코트를 입은 추레한 차림새에 이마에선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지. 내가 비명을 지른 건 그 순간이야. 흐릿하고 부유스름한 안개로 뒤덮인 영상 속에서도, 나와 똑 닮은 그의 얼굴만은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였으니까. 

“……혹시, 형?”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지만, 곧 눈앞에 검은 연기가 피어나더니 내 시야를 가려버렸어. 남자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

그 검은 연기는 뭉게뭉게 피어올라 등대를 에워싸고 호수를 넘어 침엽수림 전체를 뒤덮었어. 두 손을 휘저어봤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연기는 더욱 짙어져서 마침내는 북극해조차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어. 하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와 동시에 나의 능력(세계 곳곳에 숨겨진 기억의 지층을 탐사하는 능력 말이야)도 더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 그 검은 연기가 세계를 온통 어둠으로 물들여놓았으니까. 

난 실의에 빠져들었어. 극야의 하늘에 서명하며 했던 약속, 세계의 이면을 탐사하고 켜켜이 숨은 기억을 되살려내겠다는 맹세가 모두 허사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지. 나는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고, 세계를 관찰하는 대신 호수로 내려가 배를 띄웠어. 거기서 수면과 하늘 사이의 보랏빛 경계를 넘나들다보면 그나마 마음이 가라앉았으니까. 그렇게 어둠의 장막에 가로막힌 채 지낸 날들이 며칠이었을까. 드디어 그들이 나를 찾아온 거야. 그들, 루뱐카광장의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어 사는 사람들.  


그날도 난 북극해에 면한 호수에 배를 띄우고 물결에 흔들리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어. 마지막으로 봤던 아버지의 수첩. 거기 적힌 글자들. 전함 무사시의 최후. 그리고 아버지의 최후. 그때였어. 멀리 호숫가에서 누군가가 소리쳐 부르더군.

“이고르! 거기 이고르 씨 맞소?”

어렴풋한 어스름 속에서 그쪽을 쳐다보니, 서너 명의 남자들이 기슭의 작은 나루터 위에 서 있었어. 그들은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날 불렀고, 동시에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중이었어. 처음엔 그들을 피해 더 멀리, 호수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 갈 생각을 했어. 왠지 그쪽으로 한번 가버리고 나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거든. 하지만 끝도 없는 호수의 어둠, 멀리 보이는 차가운 북극해, 이런 광경들을 마주하자 용기가 사라지지 뭐야. 결국 나는 노를 저어서 나루터로 갔고, 거기 서 있는 남자들을 만날 수밖에 없었어. 소련 정보기관에서 나온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었지. 

그들은 내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했어. 난 당황해서 물었지.

“대체 뭐하는 분들입니까? 그리고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건가요? 내겐 할일이 있어요. 이곳을 떠나버리면, 저 등대의 불은 누가 밝힐 것이며 침엽수림의 변화는 누가 측정하냐고요.”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 그저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자.

“벌써 후임은 정해져 있소. 그러니 어서 차에 타시오.”

그래도 내가 차문을 잡고 버티자, 그중 한 사람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등대를 가리켰어,

“저길 보시오. 정말 모르겠소, 다른 누군가가 이미 당신 자리를 채웠다는 것을?” 

등대는 정말로 환히 빛나고 있더군. 분명 아까 불을 모두 끄고 나왔는데 말이야. 

마침내 체념하고, 난 작은 목소리로 부탁했어. 

“그럼 짐이라도 챙겨올 수 있게 시간을 주십시오.”

남자들은 서로 쳐다보며 눈짓을 하더니, 그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지.

나는 방으로 올라가 가방을 꾸렸어. 슬프게도, 등대에서 보낸 기나긴 시간 동안 늘어난 짐은 거의 없었어. 마지막으로 바츨라프 씨의 사진을 가방 앞주머니에 쑤셔넣은 다음 밖으로 나왔는데, 그런 나의 뒷모습을 새로 온 등대지기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군.


눈이 가려진 채 울퉁불퉁한 길을 한없이 달리고 달려 도착한 곳은 차가운 건물 지하였어. 눈에 감겨 있던 수건을 풀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어. 그와 나눈 대화를 있는 그대로 다 들려줄 순 없어. 왜냐하면, 너무나 길고 음산한데다 우울하기까지 한 내용이니까. 그는, 그야말로 ‘기억을 정리하는 사람’의 전형이었거든. 세계는 질서정연하고 깔끔하며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에 푹 빠져 있는 자. 그 믿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그 자신의 인간성마저 압도하여, 그는 마치 로봇이나 석고상 같은 눈초리를 하고 있었어. 그런 그가 세상 저 밑바닥 동굴에서 울려오는 듯한 음습한 목소리로 늘어놓은 이야기를 다시금 늘어놓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다만 한 가지 형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 내가 등대에서 마주친 검은 연기, 세상을 뒤덮고 시야를 모두 가려버렸던 그 장막의 정체에 대해서 말이야. 그 남자의 말에 의하면, 그건 자기네들이 퍼뜨리는 거라고 했어. 나 같은 사람들이 세계의 비밀을 캐내는 걸 막기 위해서. 듣다못해 난 그에게 외쳤어.

“대체 왜 그걸 막고자 하는 겁니까? 당신은 진실이 뭔지 궁금하지도 않은가요?”

그러자 남자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웃었어.

“그런 걸 믿는 인간이 아직도 존재하다니. 잘 들으시오. 그것들은 모두 만들어지는 거요. 당신이 찾아냈다고 생각한 진실조차 알고 보면 그저 당신이 꿈꾸는 세계에 어울리도록 가공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 모르겠소?”

그의 기습적인 질문에, 난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어. 갑자기 등대에서 본 지구의 모습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현실이고 실재였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아무도 없는 툰드라의 호숫가에서 난 그저 꿈을 꾸고 있었던 걸까? 혼란에 찬 나의 표정을 보며,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어. 그러면서 한 가지 제안을 건넸는데, 거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건 명령이나 협박에 가까웠지.

“어차피 진실을 만들어야 한다면, 우리와 함께 만들어가는 게 어떻겠소? 승낙한다면, 당신은 숙식과 연금, 교외의 당간부용 별장까지 일습을 제공받게 될 거요.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보고해야 한다는 것. 어떻소? 솔깃한 제안 아니요?”

“……만약, 싫다고 한다면?”

“글쎄, 그 질문에 굳이 대답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러면서 남자는 다시 한번 싸늘하게 웃었어. 난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가 내민 종이에 서명을 했고 말이야.


이것이 내가 루뱐카광장의 칠층 건물까지 오게 된 내력이야. 

여기서 지내는 삶은…… 그래, 형이 상상하는 그대로야. 꽤 좋지. 식당에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잠자리는 전에 지냈던 등대에 비해 훨씬 따뜻한데다, 무엇보다도 매달 넉넉한 급여까지 꼬박꼬박 지급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형, 난 만족할 수 없었어. 하루하루가 허무했고 뭔가 빠진 듯 공허했지. 지구를 바라보는 일도 점차 심드렁해졌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결국은 내가 꿈꾸며 지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저 한숨만 나왔으니까. 난 상부의 지시에 따라 대충대충 정탐을 했고 형식적으로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어. 그러고 남는 시간엔 몰래 입수한 보드카를 마시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지. 그때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거야. 비밀결사.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파악되지도 않는 점조직. 기억의 지층을 탐사하는 자들. 정말로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고 아무도 모르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어. 그리고 그 생각지도 못한 장소는 바로, 류드밀라 양복점이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