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회



“톰! 여기까지 웬일이야? 어떻게 왔어?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자, 들어와. 어서 들어오라고!”

난 반가운 마음에 톰을 얼싸안으며 외쳤습니다. 그럴 법도 한 게, 몰로디노프의 지시에 따라 갑자기 정보기관을 떠나오며 파트너인 그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요. 모든 일이 비밀에 부쳐지는 그곳의 특성상, 톰은 내가 왜 어디로 무엇 때문에 사라져버린 건지 전혀 알지 못했을 테니, 혼자 궁금해하며 걱정하고 있었겠더군요. 

하지만 톰은 차갑고 냉정하게 나를 밀어내고는 방으로 성큼 들어서더니 입고 있던 코트와 모자를 벗어서 의자에 대충 걸쳐놓았습니다. 앉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아 음울한 얼굴로 객실 구석구석을 훑어보더군요. 그렇게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천장 어딘가에서 멈췄을 때, 난 속으로 움찔했습니다. 거기엔 좀전까지 응시했던 고비사막의 흔적이 남아 있었죠. 아니나 다를까, 천장의 기묘한 얼룩을 바라보던 톰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인사는 생략할게, 엑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이야.”

그가 턱짓으로 천장의 어느 구석을 가리켰습니다.

“아무래도 저게 신경쓰이는군. 설마 여기서 금지된 일―예를 들자면 정보기관 밖에서 비밀 정탐을 한다든가 하는―을 몰래 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순간 난 당황했습니다. 천성이 거짓말이라곤 못하는 성격이기에,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손바닥은 끈적해지기 시작했지요. 어느새 목소리까지 덜덜 떨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톰? 너는 몰랐겠지만 난 무슨 검증인가를 받으러 여기 온 거라고. 낮 내내 이상한 물리학 교수 앞에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떠벌려야 했고, 덕분에 완전 녹초가 되어 객실로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니까. 네가 문을 두드릴 때도 난 곤히 잠들어 있었어. 그러느라 문도 늦게 연 거고.”

하지만 톰은 대답 대신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어요. 

“이거 왜 이래, 엑스? 누굴 아마추어로 보나? 딱 보면 알겠는데. 저기 저 얼룩, 암만 봐도 고비사막 같은걸. 자, 말해봐. 대체 혼자 숨어서 뭘 염탐하고 있었던 거지? 도대체 누구랑 그렇게 속닥속닥 떠들어대고 있었냐고? 잠깐, 엑스! 발뺌할 생각은 말아. 밖에서 다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톰이 미친듯이 떠드는 말을 듣고 있노라니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가 몰로디노프에게 모든 걸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면, 내게 남은 건 정보기관에서 쫓겨나는 것뿐이었으니까요. 불명예스러운 퇴직도 끔찍한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두려운 건 연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내 노후는 그야말로 거지꼴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문득 지하철역 벤치에 앉아 있는 늙은 노숙자들의 추레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난 마치 뭔가에 홀린 듯 톰 앞으로 불쑥 다가갔던 겁니다. 


“이거 놔! 엑스, 말로 하자고. 이래봤자 너에게 좋을 거 하나도 없다니까!”

울부짖으며 용을 쓰는 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문밖으로 밀어내고 있지 뭡니까!

톰은 복도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문설주를 잡은 채 버티고 있었습니다. 몸의 반은 이미 문 바깥에 있고, 머리만 방안으로 겨우 들이밀고 있는 상태였다고 할까요. 그래요, 어쩌면 그때 이성을 되찾고 그를 도로 들어오게 한 뒤, 와이와 비밀리에 만났던 일을 털어놨어야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와이가 어린 시절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까지 귀띔해준다면, 톰도 내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어야만 했는지 이해해주리라 믿었어요. 비록 나에게 이상한 영양제를 비싼 값에 팔아먹고 뜬금없이 숙소로 따라와 난동을 피웠을지언정, 그와 나는 정보기관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생사와 고락을 같이해온 동기였습니다. 그러니 그도 마음만 먹는다면 날 이해해주고 응원해주고 북돋아주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때 그 순간에는, 그렇게 차분히 상황을 따져볼 여력이라곤 없었습니다. 그저 이 난관을 타개하고 무사히 정보기관으로 돌아가 노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지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문을 잡아당겼습니다. 불쌍한 톰은 문과 문틀 사이에 머리가 낀 채로 비명을 질러댔지요. 아니, 어쩌면 소리소리 지르는 대신 죽어가는 듯 신음했던 건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어쨌거나 톰은 숨을 쉬지 못해 헐떡였고, 얼굴은 산소부족으로 인해 점점 더 푸르스름하게 변해갔습니다.

“아악,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엑스?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비밀 정탐 얘길 물어본 건 그저 호기심에서 그런 거였다고. 난 단지 약값을 받으려고 찾아온 것뿐이야!”

톰이 곧 숨이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내뱉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문고리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습니다.

“뭐라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더군요. 문이 힘없이 열리면서 톰의 굳어버린 몸통이 객실 안쪽으로 털썩 넘어졌습니다. 나는 덜덜 떨며 그의 경동맥에 손가락을 얹어봤습니다. 맥박이 전혀 뛰지 않았어요. 그의 얼굴은 짙은 보랏빛이었고 동공은 놀라움으로 잔뜩 확대된 채 정지돼 있었습니다.

“일어나, 톰! 정신 차리라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도 하지 않는 톰 앞에서, 난 울부짖었습니다. 동료를 내 손으로 죽였으니, 도대체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동안 우리 둘이 찾아낸 세상의 비밀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밤새워 일하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마시던 커피는 얼마나 향기로웠는지! 온갖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눈물은 한도 끝도 없이 흘러내려 바다를 이룰 지경이었지요. 그렇게 한참을 쭈그리고 울던 나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톰의 시체를 방안으로 끌어당겼습니다. 문을 닫기 전에 복도를 내다보았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이는 아무도 없더군요. 욕실에서 타월을 가져와 대충 눈가를 훔친 뒤, 침대 옆 탁자에 놓여 있던 메모지를 들고 맨 위에 ‘사직서’라고 또박또박 적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뿐이었죠. 팀장인 레오니드 몰로디노프에게 모든 죄를 고하고 사직한 뒤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는 것. 

‘그래, 평생을 교도소에서 썩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죗값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나는 연필 끝에 침을 묻혀가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님께.’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브라더! 형!

하지만 처음엔 그게 와이의 목소리인 줄도 몰랐고, 톰을 죽인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져버린 내게 또다시 환청이 들리는 거라고 여기며 사직서 쓰기에만 열중했습니다. 

―형……?

또 한번 와이가 불렀지만, 그때도 난 여전히 종이 위에 죄를 고백하는 일에만 푹 빠져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얄궂은 운명을 타고났기에 살인범으로 생을 끝맺게 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니 다시 한번 울컥하며 슬픔이 복받쳐오르더군요.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형제와는 헤어져 오갈 데 없이 떠돌며 살아온 지 어언 십수 년! 겨우 몸 붙이고 지낼 만한 곳을 구하여 국가와 지구의 평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노후 대비로 연금저축까지 알뜰히 가입하였거늘,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여 사람을 죽이고 이젠 평생 감옥에서 지내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아아, 눈물은 한없이 흘러내려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 정신 차리고 내 말 좀 들어봐!

그제야 나는, 사직서를 쓰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물을 닦으며 사방을 두리번대다가, 천장에 있는 고비사막의 얼룩을 향해 중얼거렸죠.

“아아, 와이. 너구나. 내 동생.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더냐! 하지만 지금 난 너와 대화를 나눌 겨를이 없어. 어쩌면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르겠구나. 혈육인 걸 알자마자 이별이라니, 생각만 해도 슬프지만 어쩔 수 없어. 이것이 너와 나의 운명이라면…… 그래, 와이, 난 방금 사람을 죽였어. 그것도 내 동료를, 이 두 손으로 무참히 살해했다고.”

낮게 웅얼대며 흐느끼는 내 귀로, 와이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형, 그게 아니야. 내 얘길 좀 들어보라니까. 다 방법이 있어서 하는 말이라고!

그러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모를까, 이미 모든 건 엎질러진 물이요 깨져버린 달걀이었습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컵에 담을 수 없고 산산조각난 달걀 껍질을 도로 붙일 수 없듯, 숨이 끊어진 톰을 되살리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니, 가능해. 가능하다고, 형!

와이는 마치 내 마음속을 읽기라도 한 듯 외쳤습니다. 

“뭐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네가 톰을 되살려놓을 수 있다는 거야……?”

그러자 와이가 빠른 어조로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가능하지! 왜냐하면,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니까. 자,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할게. 사실 난 아까 고비사막에서 형을 만나면서, 동시에 또다른 감지 능력을 동원하여 형이 머무는 호텔의 복도를 살피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어떤 기이한 파노라마가 눈앞에 떠오르지 뭐야. 잠깐만, 조용히 하고 듣기만 하라니까. 그래, 내겐 그런 능력이 있어. 시간의 흐름을 통째로 조망할 수 있다고나 할까. 그게 어떤 메커니즘으로 발현되는지 따위는 나중에 말해줄게. 솔직히 나도 잘 모르니까. 어쨌든 내가 본 파노라마 속에선, 나와 형의 모든 과거가 영화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어. 그걸 보면서 나와 형이 샴쌍둥이였고 우리가 원래는 한몸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거야. 또한 동시에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고, 그가 만든 배가 어떤 식으로 바다에 가라앉았는지도 한꺼번에 알게 됐지. 그리고 잘 들어. 내가 마지막으로 본 건 우리들의 미래였어. 그 미래가 어떤 것이냐고? 글쎄, 그건 나중에 다 말해주겠다니까. 여하튼 난 형에게 곧 엄청난 위험이 닥칠 거란 걸 알았어. 누군가가 찾아올 거고, 형이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결국 그를 죽이게 될 거란 사실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어서 호텔을 떠나. 최대한 빨리 짐을 꾸린 다음 아무도 모르게 그곳을 빠져나가라고! 어서!

와이의 처절한 외침이 머릿속에 웅웅대며 울려퍼졌지만, 난 힘없이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미안하구나, 동생아. 네가 뭘 착각하는가본데, 난 벌써 톰을 죽였어. 그것도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그래, 그는 문틈에 목이 끼인 채 죽은 불쌍한 시체가 되고 말았다니까. 이제 자수하는 것만이 살길이야. 적어도 인간이라면, 죗값은 치러야 하잖아.” 

그러자 동생이 다급히 외치더군요.

―방금 그 일은, 사실 내가 찰나적으로 보여준 형의 미래에 불과해. 형이 곧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니 자리를 피하라고 충고해봤자 믿지 않을 게 뻔하니까, 미리 체험하게 한 거라고. 우리 정보국 과학자들이 개발한 3D 가상현실 미래 체험 시스템을 이용한 거라고나 할까. 3D라든가, 가상현실, 이런 게 다 뭐냐고? 그에 대해선 나중에 모두 설명해줄 기회가 있을 테니 알고 싶어도 조금만 참도록 해. 일단은 닥쳐올 운명을 피하는 게 급선무니까, 알겠지? 그리고 만약 내 말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면, 방안을 둘러봐. 형이 죽인 톰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란 말이야.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객실 여기저기를 찬찬히 둘러봤습니다. 좀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는 여전히 흐트러져 있었지만, 톰의 시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뭐지……?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낮게 신음하며, 나는 침대 밑을 들춰보고 옷장 문을 열어보기도 했습니다. 죽었던 톰이 어느새 되살아나 욕실 문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의 털이 오소소 곤두서더군요. 그러나 떨리는 마음으로 숨을 참으며 욕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 그곳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한 톰의 차가운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거지요. 난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분명 톰을 죽였고, 문짝으로 그의 목을 누를 때의 물컹한 느낌도 생생한데, 시체는 간 곳 없고 달라진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문득 오래전 몰로디노프 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떠오르더군요. 

“엑스, 앞으로 결코 긴장을 늦춰서는 안 돼. 내가 속해 있던 소련 정보기관의 능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거든. 그래, 자네가 뭘 상상한다 해도, 그들의 능력은 그걸 넘어설 거야. 그런 엄청난 파워를 이용하여 세계를 집어삼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그러니 분발하라고, 알겠나?”

그렇다면, 그날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경고했던 상상 이상의 초능력이란 게 바로 이런 거였을까요? 그때 어디선가 나를 재촉하는 와이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습니다.

―뭐하는 거야, 형? 이제는 좀 내 말을 믿으라고! 어서 그곳을 빠져나갈 준비를 하라니까.

난 어리둥절한 채 허공에 대고 외쳤습니다.

“아아, 정말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쨌든 네가 하라는 대로 이곳을 떠나도록 할게. 하지만 그전에 내겐 할일이 있어. 아까 휠러 교수의 연구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적어둬야 한다고. 적어도 아직까진 그럴 시간이 남아 있겠지?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줘!”

그러자 잠깐의 침묵 후 와이가 대답하더군요.

―그렇게까지 꼭 약속을 지켜야겠어? 휴, 어쩔 수 없지.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으니 잘 들어봐. 좀 있다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릴 거야. 그러면 아무 대답도 하지 말고 마치 안에 없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 있으란 말이야. 그러면 그는 일층으로 내려가서 형이 객실로 돌아오길 기다리겠지. 그러는 동안 형은 얼른 휠러인가 뭔가 하는 교수에게 남길 회고록을 쓰는 거야.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그래, 알았어!”

안도하며 외치자, 와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형은 참…… 아니, 됐어. 더는 말하지 않을 테니 얼른 회고록이나 적으라고.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어. 톰은 절대로 형을 오래 기다려주지는 않을 거야. 일층에서 얼굴을 신문 뒤에 숨기고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살피다가, 문득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거고, 결국엔 뛰어올라와 만능열쇠를 이용해서 몰래 문을 열어볼 테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회고록을 최대한 빠르고 간결하게 쓰면 좋겠어. 괜히 쓸데없는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보면 톰에게 꼬리를 잡힐 수 있다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연필을 손에 쥐다 말고, 퍼뜩 떠오르는 의문이 있어 허공에 대고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그런데 와이, 대체 톰은 왜 여기까지 찾아와서 그 난리를 치려는 걸까? 약값은 차차 갚겠다고 분명히 약속했는데, 그렇게까지 날 못 믿는 건가?”

내 질문을 듣더니, 와이는 피식 웃었습니다.  

―형, 정말 사람이 왜 이렇게 어리숙해? 톰의 정체를 아직도 모르겠냐고! 그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형을 감시하기 위해 심어둔 첩자야. 그동안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거야?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간 보여준 톰의 행동은 뭔가 미심쩍은 것투성이였거든요. 정보기관의 작은 회색 방에서 복도로 나가면, 언제나 그가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것이 떠오르더군요. 뭔가를 엿보는 듯한 음흉한 눈초리는 또 어땠고요. “여기서 뭘 하는 거야?”라고 물을 때마다, 그는 딴청을 피우며 손에 든 담배를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응, 담배 좀 피우러 나가던 참인데, 아직 안 잤어?”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말입니다. 하긴, 생각해보니 톰은 자칭 흡연자라면서도 라이터나 성냥을 갖고 있던 적이 없었어요. 언제였던가, 정보기관 뒷마당에서 다 같이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할 때, 화로에 불을 붙이려고 누군가가 물었지요. “성냥이나 라이터 가진 사람 없어?” 난 마침 옆에 서 있던 톰을 보고 말했습니다. “라이터나 성냥 갖고 있지 않아?” 그러나 톰은 무슨 소릴 하느냐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난 그런 거 안 가지고 다니거든.” 그 당시엔 별다른 의심 없이 흘려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나는 모든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친한 친구처럼 굴면서 뒤로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왔던 겁니다. 참을 수 없는 슬픔과 분노, 배신감으로 몸을 떠는데, 갑자기 와이가 소리쳤습니다.  

―형, 조용히 해봐! 그가 온 것 같아. 자, 알겠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이자,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방 바로 앞에서 멈췄고, 잠시 후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똑, 똑, 똑.

나는 문에 귀를 댄 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미동도 없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요. 밖에 서 있던 사람은, 일 분 정도 기다리더니 다시 노크를 하더군요. 똑, 똑, 똑. 똑, 똑, 똑.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그저 꾹 참으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복도에서 낯익은 톰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봐, 엑스. 안에 없어? 나야, 톰. 잠깐 문 좀 열어줄래?”

“……”

“아니, 대체 말도 없이 혼자 이렇게 멀리 떠나오는 법이 어디 있어? 몰로디노프 박사에게서 네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그 먼 곳에서 홀로 잘 있으려나…… 온갖 걱정을 다 하고 있는데, 마침 회계팀 직원이 와서 알려주지 뭐야. 남은 연차휴가가 사흘 정도 있으니 어서 써버리라는 거였어. 순간, 난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네가 있는 곳으로 휴가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지! 서둘러 짐을 챙긴 다음 버스 터미널로 뛰어가니 막차가 곧 출발하려던 참이더라고. 기사에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애걸한 뒤 미친듯이 달려가 표를 사서 시동을 걸고 막 움직이던 버스에 겨우 뛰어올랐다니까. 그런데, 그렇게 고생해서 와보니, 네가 없네. 객실은 텅 비어 있고…… 여하튼 참 아쉬워. 낯선 도시에서 너와 한잔할 생각에 들떠 있었거든.”  

“……”

문틈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이는 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쳤습니다. 아아, 그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 내가 이 두 손으로 죽인 게 아니었어!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문에 귀를 댄 채 서 있었습니다. 아마 톰이 조금만 더 오래 속삭였다면, 뭔가에 홀린 듯 잠금쇠를 풀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밖에선 더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낮은 구둣발 소리가 저벅저벅 계단 쪽으로 멀어져가더군요. 그제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문에 달린 유리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오직 텅 빈 복도의 어둠과 정적뿐이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린 끝에 톰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신한 나는 그제야 허공을 향해, 아니 정확히는 천장의 얼룩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와이가 아직도 거기 머무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다행히도 그는 나의 질문에 곧바로 응답해왔습니다. 

“이제 어떡하지?”

내가 묻자, 와이가 속삭이더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최대한 빨리 일을 끝내도록 해. 휠러 교수에게 보낼 이야기를 얼른 써버리라는 거야. 그런 다음엔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가.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와이의 말을 듣고, 난 객실 창의 블라인드 틈으로 어두운 밤거리를 내다보았습니다.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늙고 살찐 고양이 한 마리가 스르륵 지나가고 있었지요. 문득 뭐라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저 낯선 세상 속에서?

그런 내 심정을 읽었는지, 와이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습니다.

―형, 용기를 내.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순 없잖아. 거기 더 있어봤자, 결국 어떤 식으로든 톰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어. 왜냐하면 그는 계속해서 형에게 그 피라미드 그림이 그려진 각종 물건을 넘겨줄 테니까. 그럼 또 형은 마음이 약해져서 그걸 다 사들이겠지. 결국 빚은 점점 늘어나고 남는 것은 파산뿐! 그렇게 되면 형은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또다시 톰의 목을 조르게 될 거라고. 무엇보다도, 형. 그는 형을 속인 사람이야. 톰만이 아니라,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형을 감시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들은 형을 하나의 살아 있는 인격체로 대하지 않아. 그자들에게 형은 그저 인간 레이더 탐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니까. 비싼 돈을 들여 만든 고성능 탐지기가 망가지거나 엇나가지 않도록 관리하듯이, 형이 절대로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옥죄고 얽매는 거라고. 그러니 어서 나가. 이 어둠의 장소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그래, 네 말이 다 옳다 치자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지금까지 몸담고 있던 기관에서 벗어나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게 그렇게 간단하겠냐고. 그러는 너는, 너야말로 루뱐카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돌 광장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 아닌가? 만약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게 그렇게나 쉽다면, 당장 너부터 먼저 그곳을 뛰쳐나와야 하는 거 아냐? 왜 넌 하지 못하면서 나에게만 그런 걸 강요하는 거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그간의 삶에 대한 회한 때문에 와이를 향해 화를 냈지만, 난 곧바로 후회했습니다.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동생을 이제야 만났는데, 그리고 그애 덕분에 사람을 죽일 뻔한 미래도 피할 수 있었는데…… 나를 위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 그에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런 소릴 하다니요. 미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데, 아니나 다를까, 와이로부터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와이, 거기 있니? 성成아, 그래,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네 이름이구나! 잊지 않았지? 우리 둘이 같이 있어야만 모든 게 완성된다는 의미에서, 오래전 김호선이 지어준 이름이잖아. 이완李完, 이성李成. 사실 그동안 너를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몰라.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없기에, 급기야는 내가 기억하는 과거 전체가 꿈이 아닌가 여겼을 정도라고. 나한텐 샴쌍둥이 동생 따윈 원래부터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누군가가 들려준 허구이며, 그저 나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외톨이임이 분명하다는, 그런 생각에 빠져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머나먼 낯선 도시에서 널 만났는데도, 내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구나. 아우야, 형을 용서해다오. 그리고 아직 거기 있다면…… 다시 한번 대답해주지 않을래?”

그러나 암만 기다려도 와이에게선 어떤 신호도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쳤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에게 이걸 건네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하니 말입니다. 연필을 잘 깎아서 끝에 침을 여러 번 묻히고 맨 첫 줄을 적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고요한 울림이 전해왔습니다. 그건 뭐랄까, 기분좋은 공기의 파동 같은 거였는데요,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리저리 부드럽게 출렁이듯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생 와이의 목소리였습니다!

―형,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이곳 루뱐카 광장 어느 한구석의 비밀스러운 건물에 숨어 살면서, 난 언제나 번민했다고. 과연 이렇게 사는 길이 옳은 것일까. 정말로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인가. 아니, 무엇보다도 내가 진실로 세계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게 맞나? 하지만 나에겐 아직 완수해야 할 임무가 남아 있고, 그래서 섣불리 이곳을 뜰 수가 없다는 걸 꼭 말해주고 싶어. 

그 임무가 뭐냐고? 어디 보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어쩌면 그건, 오늘 낮 내내 형이 존 휠러의 연구실에서 했던 작업과 같은 종류의 일이라고 보면 될 거야. 기록을 통해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생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 형은 아버지(아무도 믿어주지 않지만, 전함 무사시를 침몰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와 어머니(여전히 나무뿌리들과 뒤엉킨 채 눈을 뜨고 있을), 그리고 철원 평야의 깊은 땅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온갖 사연을 지닌 시체들(그들 대신 엉뚱하게도 ‘땅굴’이라 불리는 기이한 지하통로만이 발견되었지만)에 대해 말함으로써, 그 모든 존재들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주었지! 뭐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그저 언젠가는 바람결에 흩날려 사라져버릴 사연들에 불과하다고? 형, 대체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설마 형조차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길 지지하는 건 아니겠지?

그래, 이젠 사실을 말하는 게 좋겠지. 이곳 차가운 돌로 뒤덮인 비밀의 광장 한복판에서 내가 밤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여길 떠나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들어, 형. 내가 대항하고 있는 자들은 쉽게 말해서, ‘기억을 정리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뭐하는 집단이냐고? 글쎄,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이해하기 편할까?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세상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이야. 어느 날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사서 나오다가 어깨를 부딪힌 이들 중에 섞여 있을 수도 있고,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타다가 눈이 마주친 누군가 중 한 명일 수도 있어. 또한 그들은 어느 시간대에나 눈을 뜨고 있기에, 지구가 자전하는 24시간 내내 세상에서 쏟아져나오는 모든 기록을 관리하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당장 악인으로 분류해선 안 돼. 그들은 나름의 (자기들이 선하다고 믿는)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행동할 뿐이니까. 다만 그 믿음(오직 자신들만이 선하다고 여기는 기묘한 고집을 말하는 거야)이 너무나도 공고하고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나머지, 세상엔 수많은 곁가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말살해버린다는 게 문제인 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세상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나머지 일이 있다고 믿는, 이분법적 사고의 소유자들이야. 사소하고 불필요한 기억들은 사라져주어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훨씬 더 질서정연하고 아름다워질 거라고 믿는 자들이지. 오래전 인류의 태동기에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이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들은, 자신들만 아는 비밀 언어와 기호가 세상을 덮고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해석하고 번역하는 능력은 우주가 그들에게만 선사한 일종의 특권이라고 믿고 있지. 그런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역사책을 다시 쓰고 과거를 기록함으로써 미래에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거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이 죽기 전 꼭 읽어야 할 책 백 권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인간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일 백 가지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정전과 정전이 아닌 것을 분류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지. 그렇게 하여 그들이 얻는 것이 뭐냐고? 그건 바로 힘이야. 자신들의 이름 뒤에 쌓여가 며 세계를 지배하는 어둡고 음산한 힘. 사람들은 점차 그 힘에 압도됐고, 마침내는, 자신들이 직접 느끼고 체험한 사연들 대신, 기억을 정리하는 자들이 건네준 자료만이 진정한 세계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믿게 된 거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디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아주 작은 점조직의 결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어. 그건, 파피루스 더미의 본질을 간파하고 스스로 기억을 컨트롤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의 집합체였지. 그 결사에 속하기로 작정한 이들은 지층을 탐사하는 고고학자처럼 기억의 층과 층 사이에 감춰진 진짜 이야기들을 찾아 나섰고 말이야. 그리고 이제 형도 짐작하겠지만, 나 역시 그런 결사의 일원이 된 지 오래야. 어떻게 해서 그런 조직에 들어갔는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몰라. 그건 마치 일종의 운명처럼 이루어진 일이니까. 다만 한 가지 떠오르는 건, 어떤 극야極夜의 밤에 일어났던 기이한 만남이야. 이제 그 만남에 대해 들려줄까 해. 그리고 그것은, 내가 형과 헤어진 뒤 살아온 나날에 대한 짧은 이야기라고 보아도 무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