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통로는 엄청나게 좁았고 약간 위쪽을 향해 경사지게 뚫려 있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흙벽을 더듬어가며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갔다. 중간엔 어둠 속에서 뭔가가 몸 위를 기어 지나가기도 했다. 아마도 쥐며느리나 두더지 같은 게 아니었을까. 

과연 이 좁아터진 굴이 끝나기는 하는 건가, 라는 의문이 들 무렵 갑자기 머리가 어딘가에 쾅 부딪혔다. 비좁은 굴속에서 겨우 손을 뻗어보니, 와이가 말했던 대로 쇠로 된 뚜껑 같은 게 만져졌다. 살짝 밀어보았지만 뚜껑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한번 뚜껑을 위로 밀어올렸다. 통로가 너무 좁은 탓에 제대로 힘을 쓸 순 없었지만, 어쨌든 사력을 다했다. 마침내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움직였다. 동시에 수십 년간은 쌓여왔을 듯한 흙먼지가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이런 제기랄!”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눈을 비볐다. 먼지인지 흙인지 알 수 없는 뭔가가 눈에 들어가서 참을 수 없이 따가웠다.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겨우 닦아내고, 이번엔 뚜껑을 아주 조금만 밀어올렸다. 그러나 그 틈으로 밖을 내다보려던 나는 “우왁!” 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머리 위로 커다란 군용 트럭 같은 게 쏜살같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후로 몇 번이나 뚜껑을 밀고 밖을 엿봤지만, 도저히 도로 위로 올라갈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문득 와이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다. 이렇게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에 난 구멍이라면, 적어도 휴대용 잠망경 정도는 챙겨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가 류드밀라 양복점으로 불러놓고는, 길 한가운데 난 토굴 속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어놓다니.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골똘히 생각하며, 나는 축축하고 음습한 흙벽에 웅크린 몸을 기댔다. 산소부족 때문인지 서서히 머리가 멍해졌고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왔다. 

 

―일어나시오.

―눈 떠보라고요.

―아무래도 병원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대체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웅성대는 소리에 정신이 든 건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나서였다. (물론 시간이 한참 흘렀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다.) 눈을 뜨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들 노란색 안전모를 쓰고 있는 걸 보아, 공사장에서 일하는 이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걱정과 흥미가 뒤섞인 표정으로 날 보고 있었고, 내가 깨어나자 뛸 듯이 기뻐하며 외쳤다.

“봐, 깨났어!”

“이제 정신이 좀 드나보군!”

“아니, 하수도 구멍에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잠깐. 정말로 난 뭘 하고 있었지? 

어디 보자, 그래, 류드밀라 양복점이란 곳에 갔다가 와이를 만났고, 페치카 옆에 난 통로를 따라 겨우 탈출했지. 그런데 지상으로 난 뚜껑을 열려고 할 때마다 자동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그 안에 갇히고 말았던 거야. 그다음은……? 아아, 기억이 나질 않아.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혼란에 빠져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팔에 완장을 두른 남자가 물었다. 이 공사장의 십장인 모양이었다.

“좀 괜찮소? 여기가 어딘지 당신이 누군지는 알겠냐는 뜻이오.”

나는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줬다.

“우린 하수도 배관공사를 하러 나왔소.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가드를 설치하고 하수구 뚜껑을 열었는데, 안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뭐요! 하여간, 술 좀 작작 마시고 다니시오. 아무리 밤공기가 차갑기로서니, 보드카 병을 끌어안고 하수구 안에 들어가 누워 있을 건 뭐요? 쯧쯧.”

남자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보드카……라고요?”

어리둥절해서 묻자, 그가 턱짓으로 내가 누워 있던 땅바닥 옆을 가리켰다. 정말로 반쯤 비워진 보드카 병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들고 자세히 살펴봤다. 투명한 유리병 안에 황금빛 액체가 찰랑대고, 종이로 된 라벨이 반쯤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알 수 없는 화려한 문양의 상표 옆 둥근 로고가 내 눈길을 끌었다. 거기엔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그림 속 남자가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그 얼굴은 간밤에 류드밀라 양복점 지하에서 만난 와이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혹시 로고 속 얼굴이 또다시 어떤 신호를 보내지 않을까 싶어, 술병을 손에 든 채 멍하니 기다렸다. 보다 못했는지, 완장을 두른 남자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이보시오, 이제 정신을 좀 차리시오! 참 나, 얼마나 퍼마셨으면 아직도 그렇게 넋 놓고 앉아 술병만 뚫어지게 보고 있는단 말이오. 안 되겠군. 내 손을 잡으시오. 이리 따라오란 말이오.”

나는 못 이기는 척 남자의 손을 잡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옷을 털어줬다. 

“집으로 돌아갈 순 있겠소? 하여간 당신, 운좋은 줄 알라니까. 어제 하수구엔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만약 여기서 혼자 나오다가 재수없었으면 그냥 골로 갔을 거니까. 알겠소?”

그러면서 남자는 손으로 자기 목을 치며 죽는 시늉을 하더니, 주위를 어슬렁대며 호기심 어린 눈길로 기웃대는 인부들에게 냅다 소리를 쳤다.

“뭣들 하는 거야? 술 마시고 뻗은 인간 처음 봤어?”

그의 호통에 인부들은 투덜대며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저 안에서 못 나올 뻔했거든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난 이런 사람인데, 언제 이쪽에 올 일이 있으면 부르세요. 감사의 표시로 술이라도 한잔 살 테니까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내 이름과 호텔 주소를 적어 건네준 다음, 돌아서서 광장 반대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남자가 내 팔을 잡았다.

“잠깐, 이걸 가져가야지. 보아하니 무척 중요한 물건인 것 같던데.”

돌아보니, 그가 표지에 해변과 파라솔이 인쇄된 공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아, 이런. 이걸 깜빡했군요. 실은 아직도 정신이 없어서…… 솔직히 지금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대체 내가 언제 술을 마셨는지, 저 술병은 어디서 나온 건지, 정말로 술을 마시기는 한 건지. 여하튼 감사합니다.”

공책을 돌돌 말아 안주머니에 넣는데,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빠르게 속삭였다.

“그 안에 당신이 시카고 데일리로 보낸 기사 전문도 들어 있습니다. 가서 확인해보세요. 그리고 어서 정신을 차리세요! 당신이 하수구 뚜껑 밑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걸 본 와이가 나를 보냈단 말입니다. 자, 이제 가세요! 가라고요, 가라니까요.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진짜 술주정뱅이처럼 비틀대며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세요!”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광장을 벗어났다. 


*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프런트 데스크에 있던 지배인이 슬쩍 내 쪽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관심 없는 척 곧바로 고개를 외로 꼬는 것이었다. 

‘저자인가? 나를 미행하고 감시한 끝에 류드밀라 양복점 지하로 비밀경찰을 보낸 인간이? 분명 와이는 내 가까이 어딘가에 첩자가 있을 거라고 했으니까.’

의심의 눈초리로 봐서 그런지, 호텔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수상해 보였다. 이불과 수건이 가득 쌓인 손수레를 밀고 가는 세탁부는 계속해서 나를 곁눈질하는 듯했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팁을 받으려고 과도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벨보이 역시 음침한 눈빛으로 내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 정신도 차릴 겸 해장도 할 겸 호텔 안에 있는 커피숍에 들어서자, 앉아서 신문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 쪽으로 쏠렸다. 그들은 마치 스파이처럼 음산한 눈길로 나를 빠르게 쏘아보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신문이나 커피잔으로 시선을 떨구는 것 아닌가. 카운터에서 원두를 갈고 있던 바리스타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한 뒤, 난 잔뜩 경계하며 사방을 둘러봤다. 문득 와이가 전해준 엑스의 노트가 궁금해졌다. 안주머니에서 공책을 꺼내 바에 올려놓는데, 바리스타가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어젯밤엔 제대로 못 주무셨나봅니다."

순간 재빨리 공책을 옆으로 감추며, 나도 모르게 맞받아쳤다. 

“내가 잠을 잤든 못 잤든, 당신이 상관할 필요는 없을 텐데. 안 그런가요?”

젊은 바리스타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합니다. 혹 기분이 나빴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냥, 안색이 하도 안 좋아 보여서 인사치레로 물어본 것뿐이니까요.”

너무 심하게 반응한 것 같아 사과하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콱 잡았다. 우악스러우리만치 강한 힘이었다.

“누구야!”

고함을 치며 뒤를 돌아보니, 리하르트가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그래, 이제 돌아왔나보군. 대체 뭘 하다 온 거야? 그 우중충한 양복점에서 말이야.”

퍼뜩 어떤 기묘한 깨달음이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잠깐, 양복점으로 오라는 메모를 전달해준 게 리하르트였잖아. 그렇다면……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아는 사람도 저 녀석뿐이었단 거고. 그러고 보니 어제 객실에 찾아갔을 때도 좀 이상했어. 뭐랄까, 당황해하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그래 맞아, 그때 저놈, 뭔가를 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침대 밑으로 그걸 마구 쓸어넣었지! 그건 혹시 내가 잃어버린 와이의 사진들 아니었을까?’

벌떡 일어서서 리하르트에게 따져 물으려는데, 머릿속 어딘가에서 메아리처럼 소리가 울려퍼졌다.  

―기다려요.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닙니다. 이따가 아무도 없을 때 리하르트의 방에 몰래 가보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난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다들 자기 앞에 놓인 신문이나 잡지에 몰두해 있을 뿐, 나에게 속삭이거나 신호를 보내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 메아리가 웅웅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내가 누군지 짐작할 법도 하건마는, 참 답답하군요. 하여간, 지금은 리하르트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말아요. 어젯밤 있었던 일도 절대 말하지 말고요. 대충 아무렇게나 둘러대라, 이 말입니다. 그럼, 이만. 

“……와이? 와이, 당신이에요?”

나도 모르게 중얼대며 또 한번 카페를 둘러보는데, 리하르트가 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 앤드루, 대체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보니까 어젯밤 안 들어온 것 같던데. 류드밀라 양복점엔 잘 다녀왔어? 아니, 그보다도 와이는 또 누구야? 밤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렇게 초췌해져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름을 중얼대는 거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떠들던 리하르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눈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목소리로 묻는 것 아닌가. 

“말해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응? 암만 봐도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어디서 다쳤는지 상처까지 났잖아. 이 흙이랑 이끼는 또 뭐고. 머리에 왜 이런 걸 묻히고 다니는 거지?”

그러면서 나를 이리저리 살피던 리하르트가 문득 옆에 놓인 공책을 집어들며 말했다. 

“어라, 이건 또 뭐야? 어디서 이렇게 요상하게 생긴 노트를 구한 거지?”

순간 나는,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몸을 날려 그의 손에서 공책을 낚아챘다. 

“무슨 짓이야!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에 손대는 거지?”

그러나 리하르트는 순순히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공책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버티는 것이었다. 

“이거 왜 이래?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 아닌가, 앤드루? 도대체 이 안에 뭐가 적혀 있기에 그 난리를 치는 거야?”

실랑이를 벌이는데, 공책 사이에서 종이 몇 장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그걸 본 리하르트는 곧바로 공책에서 손을 떼더니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덕분에 공책 한 귀퉁이를 있는 힘껏 잡아당기던 나는 뒤로 나가떨어졌고 말이다. 

“뭐가 이렇게 빼곡하게 적혀 있어? 잠깐, 이거 전에 네가 시카고 데일리로 보낸 기사 아니야? 그런데 이건 뭐지? 이런 것도 써 보낸 적 있었어? 뭐야? 내용은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멋들어진 문장들이잖아!”

바닥에 나가떨어질 때 허리를 세게 부딪힌 탓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내 앞에서, 리하르트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