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


“푹 주무셨습니까? 많이 피곤했는가봅니다. 버섯차 한 잔에 그렇게 깊이 잠들다니.”

눈을 뜨니 엑스가, 아니 와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긴 어디지요?”

당황해하며 몸을 일으키자, 와이가 손을 내저으며 빙긋 웃었다.

“류드밀라 양복점 지하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내온 차와 과자를 먹더니 갑자기 잠이 들었고요. 깨울까도 생각했지만,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그냥 두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엔 무슨 악몽을 꾸는지 소리를 지르거나 발버둥을 치기도 하더군요. 어떻습니까? 지금은 좀 진정되었는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이곳은 어떤 곳이란 말인가. 어쩌면 내가 마신 버섯차가 기묘한 작용을 하는 걸까? 그간 의식의 저 아래 묻어뒀던 과거의 일들이 이리도 생생히 떠오르다니. 내 생각을 읽었는지, 와이가 차 한 잔을 더 따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드린 차는 시베리아 동부에서 나는 광대버섯을 말려서 끓인 겁니다. 아니, 놀라지 마십시오. 광대버섯이 독버섯으로 분류된 건, 먹으면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니까요. 광대버섯은 고대로부터 전해져오는 신비의 약재일 뿐입니다. 어떤 지방에선 ‘신의 버섯’이라고도 하지요. 그걸 섭취하면 인간의 정신은 의식의 한계를 뚫고 나와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경지에 도달하니까요. 시베리아의 샤먼들이 신을 만나는 의식을 치르기 전 광대버섯을 먹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 말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광대버섯을 먹고 만나는 게 결코 신은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자기 자신의 무의식입니다. 그 안에 담긴 광대무변한 정신세계라고나 할까요. 당신 역시 좀전에 이 차를 마시고 바로 그 광활한 세계를 여행했던 겁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요.”

작은 잔에 담긴 차를 바라보며, 내 몸 여기저길 만져봤다. 어딘가에 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고, 꿈인지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든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좀전에 꿈에서 겪은 모든 일은, 결국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뿐이니까요. 자, 이제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대체 어떤 꿈을 꾸었기에 그리도 발버둥치셨는지?”

꿈속에서의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꿈에서 당신의 형을 만났어요. 아니, 정확히는 형이 아니라 그가 남긴 노트를 봤다고 하는 게 옳겠지요. 하지만 그 안에 적힌 내용을 난 아직도 모릅니다. 오래전 그날, 어떤 괴한이 공책이 든 가방을 통째로 훔쳐서 달아났으니까요. 아마 소리까지 지르며 잠꼬대를 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겁니다. 난 그때로 돌아가 있었고, 그 남자에게 노트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발버둥쳤어요. 하지만 뭐, 언젠가부터 포기한 채 잊고 지내온 상태이지만 말입니다. 그후 저는 그 남자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호텔 주변을 배회했는지 모릅니다. 경찰에 신고는 했느냐고요? 아니요, 물론 신고 따윈 하지 않았어요. 그런 좀도둑까지 잡아주러 다닐 만큼 시카고의 경찰이 한가하진 않으니까요. 하여튼, 그렇게 한 달 정도 찾아다니다보니, 문득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군요. 뭐랄까, 이 모든 게 운명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할까요. 어쩌면 그후 일어났던 작은 에피소드가 저를 포기로 몰고 갔던 걸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엑스가 사라진 후 여름방학도 곧 끝났지요. 개강을 하고, 난 왠지 공부에 흥미를 반쯤은 잃은 채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복도를 지나는데, 포스터 한 장이 벽에 붙어 있더군요. ‘이야기가 있는 이론물리학 강연회’라는 행사의 홍보 포스터였는데, 맨 아래 적힌 한 줄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특별 강연: 존 아치볼드 휠러’, 이렇게 적혀 있었으니까요. 난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비록 단 하루였긴 하지만 존경하는 물리학자와 보냈던 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설레기만 했지요. 강연이 있던 날 아침,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나가 강당 맨 앞줄에 앉아서 휠러 교수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교수님은 전과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새 약간 살이 찐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강연 도중, 맨 앞줄에서 두어 번 교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그는 날 못 본 것 같았어요. 난 강연이 끝나자마자 복도로 달려나갔습니다. 휠러 교수는 다른 물리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그 앞으로 가서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교수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지난번엔 인사도 없이 헤어지는 바람에 무척 서운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뵙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휠러 교수가 나를 힐끗 쳐다봤습니다. 아아, 그런데 그때 그의 눈빛이라니.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볼 때처럼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더니 이렇게 말하지 뭡니까. 

‘미안하지만, 혹시 날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순간 나는 심하게 당황했습니다. 겨우 정신을 추스른 나는 더듬대며 이렇게 대답했지요. 

‘지난여름, 연구실에서 우리는……’ 

하지만 난 말을 끝맺지 못했습니다. 휠러 교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제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학생은 뭔가를 착각하는 것 같군요. 난 아무 기억이 없는데…… 여하튼, 별다른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스케줄이 꽉 차 있어서 말입니다.’ 

그는 여름방학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인사조차 없이 복도를 떠나버렸습니다. 다른 물리학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고, 난 또다시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지요! 터벅터벅 걸어서 강당을 나오다가 그들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영원히 휠러 교수를 원망하며 지냈을 겁니다. 오만하고 매정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을 보았고, 그제야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풀렸던 거지요. 

그러니까, 강당을 나오다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 퍼뜩 고개를 드니, 구석에 있는 쪽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휘리릭 사라지지 뭡니까. 생각해보니, 그들은 엑스가 연구실 밖 복도로 걸어나갈 때 환상인 듯 현실인 듯 제 눈에 띄었던, 바로 그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존 휠러 교수 역시 어떤 의문의 세력으로부터 계속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거죠. 그는 어떤 이유로 인해 비밀을 지켜야 했고, 그래서 날 모른 척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걸 깨닫고 나자,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교수님에 대한 서운함도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동시에 더 크고 근원적인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죠. 대체 엑스란 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거대한 비밀의 베일에 휩싸여 있어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 말입니다. 그제야, 휠러 교수가 남겼던 메모 역시 모두 어쩔 수 없이 내뱉은 거짓말이었나, 라는 의구심도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엑스가 사기꾼이며 불법 다단계 판매업자로 FBI의 수배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대체 이 모든 일의 배후엔 무엇이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몇 날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보냈습니다. 학교도 가지 않고 당연히 강의도 듣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결심했던 겁니다. 과감하게 대학을 때려치우고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파헤치는 언론인의 길을 가겠다고 말입니다!”

흥분하여 떠들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주먹까지 꽉 쥐고 있었다. 무안한 기분에 와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손을 폈다. 탁자 건너편에 앉아 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듣던 와이가 손가락을 맞부딪혀 딱, 소리를 낸 건 그때였다. 동시에 지하실 문이 열리더니 양복점 주인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들어왔다.

“……그걸 가지고 올까요?”

“네, 지금 당장 갖다주십시오.”

얼마 뒤, 양복점 주인은 금고 하나를 안고 다시 돌아왔다. 문엔 번호를 돌려서 열 수 있는 다이얼이 부착되어 있었다. 와이는 숫자 4, 5, 0, 8, 0, 9를 순서대로 돌리더니 금고 문을 열었다. 그는 안에서 공책 한 권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여기까지 당신을 부른 건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자, 펼쳐보십시오. 이걸 찾아서 오래도록 헤매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건……?”

나는 떨리는 손으로 와이가 내민 공책을 받아들었다. 

그 익숙한 표지 그림이라니!

그것은 내가 시카고 뒷골목 호텔에서 괴한에게 빼앗긴 가죽 가방에 들어 있던 바로 그 노트였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것과 똑같이 생긴 노트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장을 열자, 흐릿한 연필로 꾹꾹 눌러쓴 글자가 빼곡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공책을 한 장씩 넘기다 말고, 퍼뜩 어떤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그때 이 노트는 분명 신문 보는 남자에게 뺏겼다. 그는 완력으로 나를 쓰러뜨리려 했고 가방끈까지 끊은 끝에 공책을 강탈해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노트를 와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게 말해주는 결론은 단 하나 아닌가.

“당신은…… 그래, 당신이 바로 그놈이었군! 가방을 훔쳐간 놈!”

나는 노트를 품에 안은 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보니, 와이의 입술 역시 기묘하리만치 얇은데다 보랏빛을 띤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내 말에 와이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당신 추리가 옳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계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물리적 실체로만 이루어져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진실에 근접한 생각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앤드루 씨, 잊지 마십시오. 아까 당신이 잠들기 전 제가 한 말을 말입니다. 세계에는 의식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층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층에서 우린 뭐든지 할 수 있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복사본입니다. 원본은 당신이 본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난 노트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헛소리하지 마. 공책의 복사본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날 그 호텔에 복사기라도 있었다는 건가? 괜히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날 속일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고!”

그러자 와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오른손 검지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잊었습니까? 심안 말입니다. 우리가 심안을 가지고 있다는 걸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요?”

문득 공책을 든 손에서 힘이 빠졌다. 와이의 눈에 눈물이 고인 걸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재빨리 몸을 돌리더니 옷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 형 얘길 하려고 하니 퍼뜩 눈물이…… 여하간 실례했습니다. 그래요, 그날 우린 사실 같이 있었습니다. 형이 사라지던 날 말이에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와이의 말에 나는 또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체 이자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가. 이번에도 역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와이가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니,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는 좀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같이 있었던 것은 맞아요. 하지만 나와 형이 물리적인 실체로서 만남을 가졌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하지요. 아무리 초능력자에 천리안을 지녔다고 해도, 순간이동 같은 건 여전히 요원한 일이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날 우린, 예전에 루뱐카광장에서 만났을 때처럼 천리안을 통해 만났습니다. 일종의 정신적 조우, 혹은 영혼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언젠가는 각자 갇혀 있는 공간을 탈출하여 형제간의 회포를 풀자고 굳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그때 놈이 나타났던 겁니다.”

“놈……이라니요?”

“톰 말입니다. 형의 초능력 파트너 톰. 그자는 형을 미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그는 형이 적국의 초능력자와 텔레파시를 나눈 것을 상부에 보고하겠다며 형을 협박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게 꼬이고 말았지요. 아아, 그 일만 없었다면, 형도 그쪽 정보기관 일을 잘 마무리하고 좋게 그만둘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절규하듯 외치는 와이에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세상일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던가.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인생이 흘러왔고, 이젠 모스크바의 비밀스러운 양복점 지하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일을 겪고 있지 않은가. 

“신변에 닥친 위험을 감지한 형은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이참에 그 정보기관을 완전히 떠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탈출하기 전 공책에 당신에게 전할 말을 미친듯이 적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형을 말리고 싶었던 게 사실입니다. 난 형에게 텔레파시로 외쳤어요.

‘형,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노트에 일대기를 적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서두르라고. 그들이 오고 있어. 형이 딴마음을 먹었다는 걸 알고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보낸 자들이야!’

그러나 형은 우직하게 연필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자씩 적을 뿐이었어요. 이렇게 중얼대면서 말이에요.

‘안 돼, 와이. 이건 약속이라고.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난 평생 약속을 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알겠니?’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팔짱을 낀 채 초조한 심정으로 형이 어서 노트에 모든 걸 다 적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때 다시 심안이 스르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느새 아주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을 보고 있었지요. 어두운 로비 한구석에 이상한 남자가 앉아 있었고, 얼마 뒤 당신이 호텔로 들어왔습니다. 둘은 실랑이를 벌이고, 결국 그 괴한이 형의 노트가 든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달아나더군요. 그 모든 걸 내다보며, 난 결심했습니다. 저 공책을 지키자. 복사본을 만들어서라도 형의 기록을 구해내야 한다. 그게 나의 의무지, 라고 말입니다.”

퍼뜩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와이, 당신의 말엔 모순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초능력자라면, 형에게 그냥 미래를 말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공책을 좀더 잘 숨기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내게 노트를 전해주는 방법을 바꾸라고 한다든지. 적어도 미래에 닥칠 위험을 피하게 할 순 있었을 텐데요?”

그러자 와이가 쓸쓸히 웃었다. 

“당신 역시 과거, 현재, 미래의 흐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시간 속을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내가 경고한다고 해도 그 흐름의 큰 틀이 바뀌는 건 아니에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이 말입니다. 물론 당신이 노트를 빼앗기지 않는 우주도 어딘가엔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여기선―지금 이 우주에선 말입니다―당신은 노트를 뺏길 수밖에 없어요. 그걸 막을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의 복사본을 만들어 거기 적힌 기록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뿐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나는 공책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의 말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표지는 뭐죠? 게다가 뒷장엔 메이드 인 코리아, 라고 인쇄되어 있기까지 한데, 어떻게 그런 일이?”

“휴, 정말 힘들군요. 당신은 그래도 생각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그건 이렇게 된 일입니다. 일단 복사본을 만들기로 한 이상, 형이 적고 있는 모든 걸 그대로 적을 노트가 필요했어요. 난 얼른 주위를 둘러봤지만 쓸 만한 공책은 눈에 띄지 않았지요. 그때였습니다. 책상 한쪽 구석에 놓여 있던 당원 학습용 연습장을 발견한 것은요. 표지엔 레닌의 옆모습이 그려져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능력이 있거든요. 아마 형에게 들은 적 있을 텐데, 종이의 화학성분을 변모시켜 사진이나 그림을 그대로 인쇄해내는 능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난 눈을 감고 온 정신의 힘을 끌어모아 형의 노트 표지를 그대로 재현해냈습니다. 조악한 컬러로 인쇄된 해변과 파라솔, 뒷장에 자랑스럽게 인쇄된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문구까지 그대로 말입니다. 그런 다음엔 서랍에서 연필을 꺼내 쥐고, 형의 영혼에 감응하듯 빠르게 손을 움직였어요. 형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생각하고, 형이 꿈꾸는 것을 똑같이 꿈꾸었으며, 형이 적어내려가는 것을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적었지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바로 이 노트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어떻게 탄생한 건지. 

그럼 형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왜 사라져야만 했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 내밀한 사연을 당신은 궁금히 여기고 있을 테지요. 그 답을 알고 싶다면 그 노트를 보십시오. 거기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미래라고요? 여기에 엑스와 당신의 미래까지 적혀 있다고요?”

“정확히는, 미래와 과거, 현재가 마구 뒤섞여 있다고 보면 됩니다. 어쩌면 이 노트는 형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두 형제 모두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날 나는 형의 영혼에 감응하며 노트를 따라 적었지만, 사실은 나의 영혼에 감응한 형이 노트를 따라 적은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결국 이건, 우리 형제가 같이 만들어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또, 읽어보면 알겠지만, 뒷부분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그 나머지를 기록함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하는 것은 공책을 받은 자들, 당신을 비롯한 몇몇 다른 이들의 몫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가져가서 찬찬히 정독하세요. 그러면 왜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완결자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회상에 잠긴 듯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와이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쉿!”이라고 외쳤다. 그러고는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와이가 들어오라고 하기도 전에 지하실 문이 열리더니, 양복점 주인 페도로프가 발소리를 죽여가며 뛰어내려왔다. 

“그들이 온 것 같습니다! 이분을 어서 밖으로 내보내세요.”

양복점 주인은 페치카의 불을 서둘러 끄더니 천장에 매달려 있던 흐릿한 알전구의 스위치마저 내려버렸다. 

“그럼 저는 일단 다시 위로 올라가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행동할 테니, 뒷일은 알아서 처리해주십시오!”

그는 페치카에서 연기가 나지 않도록 주전자에 남아 있던 물을 뿌리고는, 작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계단을 올라갔다. 문이 닫히고 순식간에 어두워진 지하실에서, 나와 와이는 숨소리만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하며 서 있었다. 

“그들이라니, 누굴 말합니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물었다. 

“국가보안위원회의 비밀경찰 말입니다.”

“뭐라고요?”

비밀경찰이라는 말에,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들의 악명은 서방세계에도 자자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들에게 끌려가 어디론가 사라진 사람이 얼마나 많다던가. 그러나 와이의 목소리엔 여유가 넘쳤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안전할 테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알려드릴 것이 있습니다. 비밀경찰이 온 이유 말입니다, 그건 바로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누군가가 발설했기 때문이에요. 혹시 주위에 수상한 사람은 없던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와이의 말에, 나는 곧바로 반문했다.

“나 때문에 요원들이 오다니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난 그야말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개 신문사 기자란 말입니다. 기껏 써 보내는 기사라고 해봤자 안드로포프가 무슨 옷을 입었는가 따위의 별 쓸모없는 것들뿐이고요. 그건 당신의 오해입니다.”

그러자 와이가 부스럭대며 뭔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시커먼 지하실의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게 잘 보이는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내게 종이 몇 장을 쥐여줬다.  

“자, 받으십시오. 당신이 시카고 데일리로 보낸 기사의 전문입니다. 정확히는, 그 기사의 여백에 숨겨져 있던 내용까지 복원된 거라고 보면 되겠지요. 지금은 어두워서 한 글자도 읽을 수 없겠지만, 돌아가서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왜 비밀경찰이 당신을 쫓아왔는지.”

나는 와이가 건네준 종이 뭉치를 받아 대충 접은 뒤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양복점 주인이 고맙다고 한 것도 그와 연관된 거고요. 당신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어떤 일을 저질렀고, 그것은 소련 당국엔 일종의 반체제운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반체제운동이라니요? 정말 갈수록 점입가경이군요! 난 그딴 것에 전혀 관심 없습니다. 당신네 체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도 없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정확히는 전혀 아는 것도 없다고요! 아시겠습니까?”

내가 강변하자, 와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바로 거기에 요점이 있습니다.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좀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일은 당신도 모르게 일어났습니다. 바로 당신에 의해서 말이에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돌아가서 기사 전문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이건 정말 진심으로 드리는 충고인데, 호텔로 돌아가면 당장 이 도시를 떠나세요. 편집장에게 전보를 쳐서, 몸이 안 좋다고 둘러대거나 아니면 모스크바의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우울증이 도져서 더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엄살을 부리란 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여길 빠져나가 당신네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할 겁니다. 명심하세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에 수십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당신은 왜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는 겁니까? 반체제운동이라니, 당신이야말로 안드로포프의 정보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아닌가요? 엑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다.”

와이가 손을 뻗더니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어쩌면 그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 역시, 그 공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제 어서 가보십시오. 참, 그리고 조심하세요. 주변에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자는 없는지 잘 살펴보란 뜻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으로 왔을 텐데도 요원들이 뜬 걸 보면,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는 게 분명하니까요.”

“그런 건 당신의 초능력으로 알 수 없나요? 하아, 난 지금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일에 휘말려야 하는지.”

내 푸념에, 와이는 빠르게 속삭였다.

“우린 그저 천리안을 가진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걸 다 알아내는 전지전능한 존재와는 거리가 멀지요. 게다가 천리안으로 알아내는 과거, 현재, 미래가 완전한 상으로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건 마치 군데군데 비어 있는 퍼즐 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요.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이야기를 완결하는 것은 당신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그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순차적으로 등장할 텐데요―의 몫이라고 말이에요. 그리고 이야기가 생성되고 모여서 완결되는 이 모든 과정은 결국 어떤 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포석이 될 겁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 오래전 나와 형은 대충 내다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안개 속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처럼 부유스름했고 전체를 조망하기엔 너무나 단편적이었어요. 그러니 나중에, 그 답을 꼭 찾아주십시오. 나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나눈 이야기를 반드시 기억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문득 와이가 내 손을 잡았다. 형인 엑스와는 달리 양쪽 손 모두 따뜻했고 땀이 배어서 약간은 축축했다.

“이젠 정말로 가봐야 합니다. 공책은 잘 챙겼지요? 이리로 따라오세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의 문을 하나 더 만들어뒀으니까요.”

그는 어둠 속에서 나를 이끌고 구석으로 갔다. 온기가 느껴지는 걸로 보아 불 꺼진 페치카 부근 어딘가인 것 같았다. 와이는 한 손으론 나를 붙잡은 채, 다른 쪽 손으로 벽을 더듬었다. 잠시 후, 삐거덕대는 소리와 함께 페치카 전체가 반 바퀴 회전하는 것 같더니, 눈앞에 한 사람이 겨우 기어갈 만한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입구에 조그만 비상등이 켜져 있었는데, 그 흔들리는 불빛이 내게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듯 느껴졌다. 

“이 통로를 따라 쭉 올라가면 막다른 곳에 도착할 겁니다. 거기서 머리 위 뚜껑을 들어올리면 지상에 도달할 수 있지요.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차가 다니는 길로 통하니 눈치껏 올라가라는 겁니다. 잘못하면 차바퀴에 깔려 비명횡사할 수 있으니까요.”

뭐라고 대답도 하기 전에 와이는 나를 통로로 밀어넣더니, 뒤에서 쾅 하고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