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회



12. 저자가 기묘한 위기에 처하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털어놓는 얘기지만, 그날 엑스가 연구실 문을 닫고 나갈 때, 난 뭔가를 보았다. 끝없이 뻗은 듯한 어두컴컴한 복도 저쪽에서 회색(혹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 두 명이 홱 지나갔던 거다. 그때 난 잠시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엑스의 뒤를 따라 나가 “누군가가 당신을 미행하고 있어요!”라고 말해줘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나 문고리를 잡은 채 한동안 서 있던 끝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변명 같지만, 곧바로 건물 전체의 불이 꺼지는 바람에 그들의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 두 남자가 실제였는지 아니면 온종일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탓에 보인 환영이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후로 나는 수도 없이 여러 번 후회했다. 그 순간 용감하게 달려나가 엑스에게 모든 걸 알려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러나 이미 모두 지나간 일. 이제 와서 후회하고 괴로워하면 무엇하겠는가. 그저 담담히 과거를 기록하는 수밖에.

어쨌든 그날 저녁엔 평소 잘 들르던 학교 앞 영국식 펍에서 맥주와 생선튀김을 먹었다. 엑스와 교수님과 함께 주문했던 피자는 다 식어서 고무처럼 질기고 맛이 없어 얼마 먹지 못했던 것이다. 바삭한 생선튀김을 씹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낮 동안 내내 다른 세상을 헤매는 듯 기괴한 기분이었는데,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달까. 술에 얼근히 취한 나는 사람들과 쿠바산 시가를 나눠 피운 후(시가를 나눠주자 다들 박수를 치며 기뻐했고, 흥을 못 이긴 나는 급기야 있는 돈을 다 털어 맥주까지 돌렸다) 혼자 어두운 밤거리를 걸어다녔다. 주머니엔 엑스가 적어준 호텔 주소가 들어 있었지만, 그곳으로 바로 갈 생각은 없었다. 아니,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여전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밤길을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모든 가게는 문을 닫고 어디선가 습기 찬 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도보 위론 때아닌 낙엽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때 저 앞 길모퉁이에 아직도 문을 연 카페가 보였다. 처마에 매달린 조명 아래 가게 이름이 적힌 간판이 보였다. ‘소원의 집’이었다.  

‘언제부터 저기 카페가 있었지?’

이런 의문도 잠시, 술이라도 깨야겠단 생각에 그 작은 카페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땡그랑 종소리가 울렸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카운터에서 주인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지금까지도 기억날 만큼 독특한 인상의 남자였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 판이 부엉이 얼굴을 한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는 내게 카운터 앞 의자를 권했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고 바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곧 엄청나게 향기로운 커피 향이 가게 안에 가득 차올랐다. 

“맘에 들지 모르겠소. 오늘의 커피인데,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요. 드셔보시구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겁고 검은 향기가 출렁였고 하루의 피로가 확 풀리는 듯 노곤해졌다. 문득 따뜻한 우유가 마시고 싶어졌다. 주인에게 우유가 있는지 물어보려는데, 이미 그는 돌아서서 청색 도자기 냄비에 우유를 중탕하고 있었다. 주인은 비스킷 두어 개와 우유를 내놓더니 낮게 속삭였다.

“원래 뜨거운 커피엔 부드러운 우유가 어울리는 법이지. 안 그렇소? 여하간, 이건 서비스요. 밤늦게 혼자 오는 손님한테만 주어지는 특전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비스킷을 베어물고 따뜻한 우유를 마셨다. 그런 다음엔 향기로운 커피를 또다시 한 모금 삼켰다. 갑자기 몸 전체가 물풀이 된 듯했다.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는 어둡고 깊은 심해에서, 카페는 잠수정처럼 떠 있었다. 한 줄로 서서 지나가는 앵무조개 무리를 보다가 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


“이봐, 뭐하는 거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자고 있다니, 제정신이야? 어젯밤 안드로포프 취임식 기사는 다 썼어? 보니까 로비에 전보가 몇 통은 와 있는 것 같던데? 너희 편집장 완전 열받았다고!”

누군가가 깨우는 바람에 나는 머리를 들었다. 얼마나 엎드려 잤는지 온몸이 뻐근했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계속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그러자 남자가 뒤로 화들짝 물러나며 놀랐다는 듯 웃었다.

“야, 앤드루, 이젠 아주 능청꾼이 다 됐구나! 좋아, 좋아. 뭐 썰렁하긴 해도 워낙 리얼한 연기였으니까 넘어가주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고 한동안 혼란에 빠진 채 머리를 쥐어뜯어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있는 곳은 한밤의 아늑한 카페가 아니었다. 뿌옇고 부드러운 조명, 향긋한 커피 냄새, 부엉이와 판을 합쳐놓은 듯한 주인장, 이런 건 간데없고, 보기만 해도 추운 회색 벽과 회색 테이블, 회색 침대가 좁은 방을 꽉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구석엔 페치카가 있었는데, 불씨는 이미 거의 꺼져서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갑자기 날 깨우는 사람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혹시, 당신…… 리하르트 베르베크? 네덜란드 주간지 스포르트 위크의 기자, 맞나?”

내 말에 남자가 정색을 했다. 

“이봐, 앤드루, 이제 연극은 그만두는 게 어때? 자꾸 그러니까 좀 무섭잖아.”

멍하니 서 있는 리하르트를 그대로 둔 채 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다. 얼마나 오래 엎드려 잤는지, 얼굴엔 옷 주름 자국이 가득했다. 수도꼭지를 돌려 찬물로 세수를 하고 대충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리하르트가 간밤에 인화해둔 사진을 신기하다는 듯 살펴보고 있었다. 

“주인공인 안드로포프는 대충 찍고, 웬 이상한 사람들만 잔뜩 찍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아니, 이자는 대체 누군데 이렇게 여러 장 찍은 거야? 그나마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지만 말이야. 보라고, 초점이 완전히 흔들렸잖아.” 

그러면서 그는 사진 속 한 사람을 가리켰다. 엑스였다. 아니, 이젠 와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어쨌든, 와이는(혹은 엑스는) 전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낡은 트렌치코트에 후줄근한 모자. 어딘지 모르게 기가 죽은 듯 보이는 발걸음. 

난 리하르트에게서 얼른 사진을 빼앗았다. 

“이리 줘. 그건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거라고!”

사진을 빼앗긴 리하르트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말이야, 앤드루, 지금 그럴 때가 아닐 텐데. 밑에 내려가보라니까. 너희 편집장이 보낸 전보가 계속 쌓여가고 있다고. 이제 어쩔 셈이야? 보아하니 기사도 안 써놓고 잔 것 같군!”

순간 눈앞에 편집장의 화난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가뜩이나 혈압이 높은 그의 안색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앤드루,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 역시 너 같은 놈은 해고가 답이라니까! 당장 짐 싸서 돌아오라고. 네놈 후임으로 갈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말이야! 미친듯이 욕을 퍼붓는 편집장의 쉰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불 꺼진 난로 위에 놓여 있던 사모바르에서 다 식은 차를 한잔 따라 마셨다. 뱃속으로 뭔가 들어가니 조금 머리가 맑아졌다. 간밤엔 온갖 기괴한 꿈이란 꿈은 다 꾸었다. 오래전 대학 시절에 유명한 물리학자인 존 휠러와 어떤 의문의 초능력자를 테스트했던 일이 고스란히 꿈속에서 재현되었으니 말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건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불과 수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난 머릿속에서 의식적으로 당시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린 채 지냈던 거다. 아니, 잠깐. 그게 아닌가? 혹시 내가 그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외부에서 어떤 힘이 가해졌던 걸까? 분명 엑스는 말했었다. 정보기관의 초능력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조종하여 중요한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곳 모스크바에서 수면 아래 묻혀 있던 과거의 사건들이 다시 떠오른 것도 설명이 된다. 전에 엑스는 이렇게 귀띔해줬었으니까. 여기엔 소련 초능력자들이 만들어둔 방어막이 있다고. 그 방어막 덕분에, 나에게 더이상은 워싱턴에 있는 초능력자들의 힘이 작용하지 못하게 된 것 아닐까?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 가설이 옳다면, 그동안 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정신과 기억을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때 리하르트가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앤드루, 정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정신 좀 차리라니까. 그 멍한 눈초리는 또 뭐고? 간밤에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구는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리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리하르트,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들이,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자들이, 세계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리하르트는 팔짱을 끼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서류가방을 뒤져 얇은 파일을 하나 꺼냈다.

“앤드루, 그런 식으로 비굴하게 굴지 않아도, 다 준비해 왔어. 자네가 부탁할 줄 알고 말이지. 사실은 로비에 너희 편집장이 보낸 전보가 쌓여 있는 거 보고 직감했거든, 이 자식, 밤에 기사도 안 쓰고 그 러시아 여자랑 한바탕 뒹굴었구먼. 이렇게 말이야. 흐흐, 어때, 내 말이 맞지? 시치미 떼지 말라니까. 여하튼, 겉으론 샌님 같은 놈들이 한술 더 떠요. 자, 이거 받아. 내가 스포르트 위크로 보내는 기사 중 일부를 짜깁기해서 네가 쓴 것처럼 하나 만들었어. 당장 편집장한테 송고하라고. 알겠지?”

나는 머뭇대며 그가 내민 파일을 받았다. 대충 읽어보니, 굳이 눈에 불을 켜고 살피지만 않는다면 누가 쓴 건지 가려내기 힘들 정도였다. 놀랍도록 교묘하게 나의 말투를 흉내낸데다 새 양복을 입고 걷고 있는 안드로포프의 사진도 선명하게 잘 들어가 있었다. 갑자기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고마워, 리하르트. 역시 너밖에 없다!”

거의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자, 리하르트는 당황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참 나, 오버 좀 하지 마. 나중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땐 자네가 대신 써주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얼른 가서 기사부터 보내라니까.”

그제야 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아래층으로 달려내려가 편집장에게 기사를 송고했다. 잠시 뒤 전보가 하나 도착했다. 

―대체 뭘 하다가 이제야 보내는 건가? 그나마 사진도 잘 찍었고 내용도 괜찮으니, 이번만 봐주는 걸세!

보기도 싫은 전보용지를 잘게 찢어 휴지통에 던져버린 뒤, 호텔 식당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으로 계란 반숙과 커피를 주문했다. 지독하게 맛없는 커피였지만 숙취해소제라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간밤 꿈속에서 만났던 부엉이와 판의 합성체 같은 카페 주인이 떠올랐다. 문득 그 집의 에티오피아 예가체프가 진심으로 그리워졌다. 왠지 우울한 마음으로 계단을 걸어올라가던 나는, 위에서 뛰어내려오던 남자와 어깨를 세게 부딪혔다.

“조심해서 다녀! 제길, 아침부터 짜증나게!”

내가 뒤돌아보며 욕을 했지만,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듯이 달려서 가버리는 것 아닌가. 뭐하는 인간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코트에 검은 바지, 검은 구두를 맞춰 신은데다 머리엔 러시아식 털모자인 검은색 샤프카까지 쓰고 있었다. 그걸 보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모스크바가 추운 곳이라곤 해도 이제 그런 털모자까지 쓰고 다닐 시기는 지났으니 말이다. 투덜대며 다시 계단을 오르려던 나는,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 발걸음을 멈췄다. 잠깐. 방금 저 남자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이 기분 나쁘리만치 낯익은 느낌은 뭐지? 그때였다. 발아래 뭔가 반짝이는 게 눈에 띈 것은. 허리를 굽혀 집어올리고 보니, 그건 내 방 열쇠였다. 키에 새겨진 273호실이란 숫자가 선명했다. 

‘이런, 칠칠치 못하게 열쇠나 떨어뜨리다니. 잃어버렸으면 괜히 곤란할 뻔했잖아.’

속으로 중얼대며 주머니에 열쇠를 넣다 말고, 나는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계단에 떨어뜨린 줄 알고 있던 열쇠가 안주머니에 떡하니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열쇠를 잘못 갖고 온 건가? 아냐, 그럴 린 없는데……’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확인해보니 ‘273’이란 숫자가 또렷했다. 그렇다면 내가 주운 건 호텔에서 보관하고 있던 여분의 열쇠란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단을 뛰어올라 잠긴 방 앞에 섰다. 주운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리자, 철컥 소리를 내며 스르르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방안은 엉망진창이었고 침대 시트와 베갯잇은 모두 뒤집혔으며 서랍과 옷장 문도 다 열려 있었다. 아까 그놈이 호텔 데스크에서 열쇠를 훔친 뒤 여기 몰래 들어왔던 게 확실했다. 그런데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난 스파이도 아니고 정보를 취급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유리 안드로포프가 새 양복을 맞춰 입었다는 기사 따위를 본국으로 송고할 따름이다.

“설마……?”

침대 옆 테이블 위를 본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주저앉고 말았다. 지난밤 인화해둔 사진이 몽땅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놈은, 와이의 사진을 노렸던 거다. 


혹시 어딘가에 사진이 떨어져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나는 방안을 온통 헤집었다. 그러나 와이가 찍혀 있던 사진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디 보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지. 그래, 처음부터 찬찬히 생각해보자고.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와이의 사진을, 그것도 선명하게 찍히지도 않고 초점까지 흔들린 그런 사진을 가져간 걸까? 아니지, 어쩌면 와이의 사진을 노린 게 아닐지도 몰라. 어떤 미친 도둑놈이 방에 몰래 들어와서 이것저것 뒤지다가 훔쳐갈 게 없으니까 홧김에 사진이라도 들고 튄 게 아닐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안도감이 들었다. 내 추리가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나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기자에게 그런 기괴한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사모바르에 물을 붓고 끓이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에 달린 외시경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리하르트가 머리를 긁적이며 서 있었다. 보조잠금장치까지 걸어뒀던 나는 얼른 사슬을 풀고 그를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러면서 목을 빼고 복도 좌우를 살폈지만, 미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빨리 들어와!”

낮게 속삭이는 내 목소리가 심각하게 느껴졌는지, 리하르트도 말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난장판이 된 방을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워싱턴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라도 받은 거야? 방이 왜 이래?”

“리하르트, 혹시 오늘 호텔 주변에서 수상한 놈 못 봤어? 검은 코트에 검은색 샤프카까지 쓴 놈이야.”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리하르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전혀. 그런 차림이었다면 금방 눈에 띄었을 텐데 말이야. 그나저나 앤드루, 난 네가 걱정이다. 아까부터 횡설수설 헛소리만 하고…… 솔직히 좀전에 목격했다는 수상한 사람도 뭔가 이상하지 않아? 요즘 같은 계절에 누가 그런 두꺼운 털모자를 쓰고 보란듯이 돌아다니겠어? 만약 네 말대로 방을 뒤져서 뭘 훔칠 계획이었으면 좀더 눈에 띄지 않는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겠지. 예를 들자면 벨보이 복장을 한다든가 말이야. 안 그래?”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어서, 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만 있었다. 사실 간밤에 엎드려서 선잠을 잔 탓인지 아직도 머리가 무겁고 멍했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졌고 땅바닥을 디딜 때도 마치 진흙으로 된 늪을 걷는 듯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내가 몽유병자처럼 비몽사몽간에 방을 다 파헤쳐놓고도 기억을 못하는 거란 말인가? 아니면, 아예 맛이 가버려서 있지도 않은 사람을 봤다는 망상에라도 빠졌다는 건가? 갑자기 머리가 심하게 아파왔다.  

그때 리하르트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딱지처럼 생긴 뭔가를 내놨다.

“……이거 받아, 앤드루. 누가 전해달라고 하더군.”

“이게 뭔데?”

두통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리하르트는 왠지 눈길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어제저녁, 내가 안드로포프의 단골 옷집인 류드밀라 양복점에 가서 뭔가 캐올 거라고 했던 거 생각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술에 취한 채 이렇게 떠들던 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난 지금 좋은 기삿거리를 하나 생각해냈어. 완전 특종감이지. ‘류드밀라 양복점에 스며든 서독 스파이’, 어때? ‘그들이 만들어낸 양복엔 제임스 본드도 울고 갈 정도의 최첨단 장치들이 달려 있고, 그걸 통해서 서방 정보기관들은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스포르트 위크 독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멋진 기사 아니겠어?”

“그래서? 정말 대단한 특종이라도 낚은 거야?”

내가 묻자, 리하르트는 풀이 죽은 채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약간 기대를 했던 건 사실이야. 너도 알다시피, 고관대작이 단골로 이용하는 양복점엔 뭔가 숨겨진 비밀이 많은 법이잖아.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재를 갔지만, 류드밀라 양복점은 말 그대로 그냥 양복점일 뿐이었어. 뚱뚱한 주인 남자와 얼굴이 불그스름한 주인 여자가 열심히 다림질만 하고 있더라고. 그들은 사상 검증까지 완벽하게 마친 열성 공산당원이었어. 벽에 걸린 당원증만 봐도 알 수 있었지. 서독의 스파이 따윈 숨어들 틈이 아예 없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끝까지 확인해보려고 난 그들에게 넌지시 물었어. 

‘혹시 화장실 좀 쓸 수 없겠습니까?’ 

그러면서 배가 아픈 듯 움켜쥐자, 주인 남자가 퉁명스레 말했어. 

‘이 뒤쪽 복도로 나가서 오른쪽으로 돌면 화장실이 있을 거요.’ 

난 고맙다고 한 뒤 양복점 뒤에 있는 문을 나왔지. 그런 다음 발소리를 죽여가며 어디 숨겨진 공간은 없나, 이리저리 돌아다녀봤어. 실타래가 가득 진열되어 있는 커다란 유리장이 보이길래, 살그머니 밀어보기도 했지. 어쩌면 그건 위장된 진열장이고 그 뒤편 벽엔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리고 그 지하엔 온갖 최첨단 무기와 무선통신 기기들이 감춰져 있을 테고. 하지만 암만 힘껏 밀어도 진열장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 거기 매달려 끙끙대며 땀을 흘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에 손을 턱 올리지 뭐야! 어휴, 그땐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여하튼 돌아보니, 주인 남자가―참고로 그의 이름은 페도로프였는데―날 노려보고 있더군. 그는 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어. 

‘여기서 뭐하는 거요? 화장실은 복도 오른쪽 끝이라고 했을 텐데?’ 

난 재빨리 둘러댔어. 

‘미안합니다. 왼쪽 끝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하여간, 다행이네요. 만약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게 화장실로 가는 문인 줄 알고 내일이 될 때까지 밀고 있었을 거예요!’ 

이렇게 대충 얼버무리고는, 그가 뭐라고 더 하기 전에 재빨리 오른쪽 복도 끝으로 달려갔지. 거기서 소변을 보고 손을 씻은 다음 밖으로 나오던 나는, 그만 거의 기절할 뻔했다네! 화장실에서 복도로 나오는 문 앞에 주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으니 말이야. 

‘이제 난 죽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어. 

‘무슨 문제라도……?’ 

그러고선 눈을 꽉 감았지. 나도 모르게 성모마리아를 향한 기도문이 흘러나오더군.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고, 왜냐하면 난 칼뱅교 신자니까, 여하간 죽음을 앞둔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간절한 기도가 내 입에서 마구 쏟아져나왔어. 

‘이제 곧 저 주인장의 거대한 팔뚝이 나를 덮치겠군!’ 

여기까지 생각하자 차라리 마음이 편해지는 듯도 했어. 듣기론 목이 졸려 질식사하면 죽은 뒤 모습은 끔찍해도 정작 본인은 황홀경에 취해 숨이 끊어진다잖아. 그때 주인 남자가 나를 툭 쳤어.

‘이보시오, 눈 뜨쇼. 난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살며시 샛눈을 뜨자, 주인은 껄껄 웃었어. 

‘하, 이렇게 새가슴인 인간이 뭔 생각으로 여기 잠입한 거지? 여하튼, 난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소. 그러니 그냥 눈을 크게 뜨시오.’ 

마침내 눈을 크게 뜬 내 앞에 그가 내민 게 바로 이거였어. 

‘이건……?’ 

내가 물었지만 주인은 그저 말없이 서 있더군.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속삭이듯 말하는 거 있지. 

‘당신이 묵고 있는 호텔에 앤드루 김이라는 기자가 있소. 그자에게 이걸 전해주시오. 그러면 당신 안전은 보장해주리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 이 말이오.’ 

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그가 건넨 딱지를 받아들었어. 그러면서 물었지. 

‘대체 당신의 정체는 뭡니까?’ 

그러자 그가 더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거야. 

‘기자 양반이 무엇을 상상해도, 난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두시오.’ 

잠시 후 난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이끌며 류드밀라 양복점을 나올 수 있었다네. 문을 나서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서 모퉁이를 도는데, 뒤에서 양복점 주인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지 뭔가.

‘리하르트 베르베크, 거기 서시오! 거기 서라니까!’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렸지만, 곧 그에게 다시 잡히고 말았지. 난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쳤어. 

‘이거 놔, 놓으라고! 경찰에 신고하겠어.’ 

그러자 주인은 큭큭 웃었어. 

‘경찰? 지금 경찰이라고 했소? 여기가 무슨 암스테르담 한복판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요? 하여간, 당신 같은 조무래기와 실랑이나 벌이려고 쫓아온 건 아니니 그리 아시오. 다만 전해줄 것 중 한 가지 빠뜨린 게 있어서 말이야. 자, 이건 유리 안드로포프의 취임식에 관한 기사요. 분명 앤드루 김이란 기자는 생각도 없이 퍼질러 자고 있을 테니까. 그자가 편집장에게 밉보여서 본국으로 송환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대충 기사를 썼다오. 이걸 당신이 앤드루 대신 송고해주면 좋겠소. 뭐 굳이 겁을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당부하자면…… 웬만하면 우릴 실망시키지 마시오. 알겠소? 그럼 이만.’ 

그때까지도 덜덜 떨고 있던 나는 기사를 건네받은 뒤에도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어. 정말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앤드루, 그놈들의 정체는 뭘까? 대체 무엇하는 자들이기에 네가 게으름뱅이란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걸까?”

그의 고백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까 내가 깨어났을 때 자신이 썼다며 준 기사의 실체가 겨우 이런 거였다니. 그것도 모르고 난 눈물까지 글썽이며 리하르트의 우정에 감동하지 않았던가. 실망한 내 표정을 보더니 리하르트는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 앤드루. 원래는 처음부터 다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문득 좀 으스대고 싶은 마음이 들지 뭐야. 여하튼, 난 너에게 다 전달했어. 그 딱지 모양의 편지도, 안드로포프에 대한 기사도 모두 말이야. 그러니 당분간은 날 찾지 마.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몰라도 너랑은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인 것 같아서. 그럼, 안녕. 난 갈게!”

“잠깐, 기다려봐, 리하르트! 자네 말은 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아까 오전만 해도 실실 웃으며 농담이나 하고 여유만만이더니 왜 갑자기 덜덜 떨면서 도망치는 거야, 응?”

그러나 리하르트는 말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문이 쾅 닫힌 다음에야 난 손에 쥔 쪽지를 내려다봤다. 그건 종이를 딱지 모양으로 접은 뒤 인장을 눌러 찍어 봉한 편지였다. 그런데 왁스 위에 찍힌 문양이 눈에 익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그리스어 알파벳이었으니까.


Ψ  


“……프사이? 그렇다면, 이것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쪽지를 펼쳤다. 거기엔 멋들어진 필기체로 이런 문장 한 줄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오늘밤 열두시, 류드밀라 양복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