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11. 엑스가 스카우트를 제안받았던 사실을 털어놓다


모처럼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고 얼굴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발간되던 그 소식지의 제목은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정보’였는데, 주로 기관 내부의 인사 동향 같은 게 실렸어요. 물론, 그 외에 기관의 요원들이 임무 수행으로 바쁜 와중에 짬짬이 쓴 수필이나 자작시, 독후감, 짧은 소설 등등을 수록하기도 했지요. 뭐, 자랑 같지만, 나 역시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정보’에 두 편의 콩트를 기고했었는데…… 동료들에게서 무척이나 좋은 평을 얻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용은 별것 아니었습니다. 두 편 모두 비밀 정보요원으로 살아가는 삶의 고충과 고독, 두려움 같은 게 주제였지요. 흥미로울 것 같다고요? 하하,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걸 읽어본 이들은 모두 문학성이 풍부하고 지성이 넘치는 작품이라고 칭찬했으니까요. 그들은 복도를 지나가다가 나를 만나면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인사하곤 했어요.

‘어이, 엑스, 이번에 랜덤하우스의 공모전에 도전해보는 게 어때?’라고요. 

또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는 한 동료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봐, 엑스. 네 작품엔 현대인의 우중충하고도 우울한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어. 게다가 그 난해한 언어는 또 어떻고.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면서 눈물까지 흘렸다니까요. 하긴, 비록 제가 그 분야에 대해서는 일천하지만,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마구 쏟아내며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게 현대문학의 주된 흐름이니만큼, 칭찬을 받은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전 그후로 자주 이런 생각을 하곤 했어요. 만약 내가 비밀요원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훌륭한 소설가가 돼 있을 거라는, 그런 상상 말이에요. 그러고 보면 왠지 초능력 요원과 소설가 사이엔 확실히 서로 닮은 구석이 보이지 않나요? 눈에 보이는 세상 이면의 진짜 모습을 찾아내려 고군분투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어쨌든, 방금 제가 보여드린 그 사진은,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정보’에 실렸던 기사를 복사한 것입니다. 화질이 그 모양인 것은 사무실에 있던 복사기가 워낙 오래되고 후진 거였기 때문이에요. 뭐, 지금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죠. 기왕이면 또렷하고 선명한 사진을 갖고 다니는 게 여러모로 좋을 테니 말입니다.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군요. 그날, 그러니까 국가안전공로상을 타던 날, 우리 팀엔 꽤 많은 회식비가 지급되었습니다. 그 돈으로 뭘 사 먹는 게 좋을지 갑론을박이 오간 끝에, 우린 다 같이 병원(아, 우리 기관은 외부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기관을 ‘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일종의 암호였다고나 할까요?) 앞에 있는 멕시코 음식 전문점에 가기로 했어요. 이름이 ‘엘 파소’였던가, 아무튼 거기서 칠리소스가 듬뿍 들어간 타코를 먹고 시원한 맥주도 여러 잔 마시며 모두 즐거워했지요. 몰로디노프조차 얼근히 취하여 한 손에 보드카 병을 들고 노랠 불렀을 정도니까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러시아 민요였는데, 오늘은 기분좋은 날이니 요원들에게 내렸던 금주령을 해제해주겠노라고 외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손에 손에 술잔을 든 사람들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내가 세운 공로를 치하하고 갔고요.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처음엔 상을 받고도 과연 이런 걸 내가 받아도 되는가, 라는 의문에 시달리며 찜찜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공을 세웠다는 것만 알지 무슨 공을 세웠는지는 전혀 모른 채 받은 상이니까요. 정보기관에선 모든 걸 비밀에 부쳤고 철저히 함구했습니다. 물론 나중에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한데…… 솔직히 지금도 나는 그게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내가 복도를 지나다가 어렴풋이 엿듣게 된 나의 공로의 내용에 대해선 조금 있다가 순서대로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궁금해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여하튼 간에 처음엔 그런 찜찜한 기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좋아하고 칭찬해주니 점점 더 뿌듯해졌고, 나중엔 내가 한 일, 아니 내가 ‘발견’한 뭔가가 인류 평화와 국가안보를 위해 꼭 필요했던 거라는 확신마저 가지게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론은, 그날 나도 무척이나 즐거웠다는 것입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 같이 2차 술자리가 열린 바로 몰려갔어요. 처음 보는 비싼 위스키 병 앞에서 다들 흥분하여 왁자지껄 떠드는데, 갑자기 몰로디노프 박사가 벌떡 일어서더니 ‘주목!’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순간 우리는 조용해졌고 바엔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홀 중앙에 바닥보다 조금 높은 단이 설치돼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있던 몰로디노프가 잔을 들더니 외치더군요. 

‘일단, 수상을 축하합니다. 물론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미스터 엑스지만, 그 뒤엔 우리 팀의 협력과 명확하고도 철저한 안보의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하진 못할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나를 비롯한 팀원들은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몰로디노프는 박수가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어요. 

‘그런데, 여러분의 공로에 특별히 감사를 표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는 건 내가 아직 말 안 했지요? 사실 오늘 받은 상은 정보국에서 수여한 것이지만, 엘 파소에서의 식사비와 이 집 술값은 우리 팀과 엑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은 모 기관에서 특별히 지원한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자, 여기 그분들이 오셨으니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그러면서 몰로디노프가 박수를 치자, 갑자기 홀 한쪽 벽면의 붉은 휘장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걸어나오지 뭡니까. 그들은 나와 같은 동양인이었고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마치 한몸인 양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인사하는 모습은 군인만큼이나 절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박수를 쳤어요. 누군가는 ‘와!’ 하는 함성을 질렀고 또다른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지요. 경내가 조금 조용해지자, 그중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더니 인사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들 덕분에 우리는 극악무도한 적의 침입을 그 시초부터 차단할 수 있었습니다. 철원 평야 밑에서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던 끔찍한 만행의 싹을 아예 잘라버린 거지요. 좀전의 식사와 이 술자리는, 우리나라의 높은 분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겁니다. 그분께선 여러분이 원한다면 3차까지 극진히 모시라며 신용카드를 지급하기까지 하셨어요.’

그 말에, 바로 뒤에서 열중쉬어를 한 채 서 있던 또다른 검은 옷의 남자가 성큼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번쩍이는 뭔가를 꺼내 우리 앞에 좌우로 들어 보이더군요. 그건 은빛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플래티넘 카드였습니다. 그가 퍼포먼스를 마친 뒤 주머니에 카드를 넣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처음 남자는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멀리 계신 그분이 여러분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하셨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그럼, 많이 드시고들 즐겁게 노십시오. 우린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검은 옷의 남자가 말을 마치고 손가락을 튕기자, 문이 열리며 악단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삼인조로 이루어진 밴드였는데, 한 사람은 트럼펫을, 또 한 사람은 통기타를, 나머지 한 사람은 탬버린을 들고 있었지요. 그중 리더인 듯한 탬버린 든 남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흥겹게 외쳤습니다.

‘신청곡 있으면 말씀하세요! 웬만한 음악은 다 연주해드리니까요!’

여기저기서 온갖 신청곡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톰은 손을 들고 마구 흔들며 닐 세다카의 <오, 캐롤!>을 들려달라고 날뛰더군요. 몰로디노프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검은 눈동자의 코사크 여인>이란 곡을 연주해달라고 생떼를 썼어요. 밴드의 리더가 난감한 얼굴로 ‘그 노랜 저희가 잘 몰라서……’라고 얼버무렸지만, 몰로디노프는 술에 잔뜩 취해 비틀대면서도 끊임없이 <검은 눈동자의 코사크 여인>을 듣고 싶다고 조를 뿐이었어요. 결국 그는 갑자기 악단이 한창 음악을 연주하는 무대로 뛰어올라 통기타를 뺏어 들었습니다. 

‘차라리 내가 직접 연주하겠어! 자, 여러분 주목하세요! 세상 최고로 아름다운 곡을 들려줄 테니까!’

몰로디노프가 통기타를 들고 자리를 잡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조용해졌습니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팀장의 말이니 안 들을 순 없었던 거죠. 나 역시 자리에 앉아 무대를 주목했지요. 몰로디노프는 ‘아아’ 하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휴, 그런데 그 노래가 어찌나 우울하고 슬프던지. 그래요, 그건 정말이지 구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런 곡이었습니다. 음악이 절정에 달할 즈음엔 몇몇 요원들이 흐느끼고 있었고, 톰도 왠지 의기소침해져서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정도였지요. 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쓸쓸한 곡조를 듣다보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애잔한 감정의 파도가 밀려왔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고향이 그리워 눈시울이 붉어졌으니까요. 축 처진 분위기를 다시 띄우려고 밴드 리더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는 두번째 곡을 연주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몰로디노프를 겨우 달래어 구석진 자리로 옮겨놓았습니다. 거기서 몰로디노프는 엎드린 채 흐느끼더니 어느덧 스르르 잠들고 말았지요. 밴드는 비치보이스의 <Surfing U.S.A.>를 연주하며 어떻게든 다시 흥을 돋우려고 노력했고요. 하지만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버린 분위기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톰은 외따로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 뿌루퉁한 얼굴로 혼자 술잔을 기울였고, 다른 요원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앉은 채 담배를 피울 뿐이었어요. 그럴 만도 한 게, 우린 모두 집을 떠나 정보기관 내 숙소에서 합숙하며 오직 나라와 인류의 평화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으니까요.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지만 다들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마침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어요. 그 어두컴컴한 술집에 계속 앉아 있어봤자 그리움만 더욱 커질 뿐이니 차라리 밖에 나가 찬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겠단 생각을 했거든요. 바의 뒤편에 난 문을 열고 나가자, 바로 화장실로 통하는 복도가 보였습니다. 일을 보고 난 뒤 손을 씻고 뒷마당으로 향했어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하고 은하수는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노래를 부르다보니 절로 두 볼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습니다. 목이 메어 다음 소절을 부르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 어디선가 남성 중창단이 부르는 듯한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뭡니까! 그들은 내가 멈춘 대목에서부터 노래를 이어 불렀습니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나는 깜짝 놀라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어디 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그 중창단(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이번엔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쓰다 버린 쪽박인가요. 꼬부랑 할머니가 물 길러 갈 때 치마끈에 달랑달랑 채워줬으면.’

그들의 합창에 이어, 나는 2절을 목청껏 불렀습니다.

‘낮에 나온 반달은 하얀 반달은 햇님이 신다 버린 신짝인가요. 우리 아기 아장아장 걸음 배울 때 한짝 발에 딸각딸각 신겨줬으면.’

마지막 3절은, 아아, 우리가 다 같이 불렀어요.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과 나의 솔로가 어우러진 노랫소리는 하늘 높이 퍼져올라 별까지 닿는 듯했습니다! 

그때였어요! 어둠 속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온 것은.

동시에 누군가가 손전등 불빛을 환히 비췄습니다. 음악이 주는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휘청거리던 나는, 옷소매로 눈을 비비며 겨우 정신을 차렸지요. 손전등 덕분에 환해진 뒷마당엔 네 명의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모두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은 아까 바에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보여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당신들은?’

내가 외치자, 남자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 무리의 리더인 듯싶었는데, 왜냐하면 좀전에 바에서 우리 공로를 치하할 때도 그가 연설을 했으니까요.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자, 남자는 내 팔을 힘껏 흔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엑스 씨. 드디어 이렇게 만나는군요! 국가를 위해 엄청난 공로를 세운 당신을 직접 뵙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도무지 무슨 공을 세운 건지 알지 못하고 있던 나는, 이번에도 엉거주춤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론 딴생각을 하고 있었지요. 얼른 들어가야 할 텐데. 이렇게 오래 혼자 밖에 머물러 있으면 내일 아침에 레오니드 몰로디노프가 시말서를 쓰라고 할 거야. 그는 우리에게 절대로 혼자서는 외부에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으니까. 그러느라고 나는 남자가 뭐라고 계속해서 중얼대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제안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으신지요?’

남자가 몇 번이고 다그쳐 묻는 통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습니다.

‘……무슨 제안 말인가요? 죄송합니다. 중요한 임무가 있어서 잠시 그 생각을 하느라 이야기를 놓치고 말았네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하자, 남자가 손을 내저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어요. 당신 같은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에겐 그에 어울리는 엄청나게 대단한 임무들이 줄지어 주어질 테니까요. 오히려 우리와 대화할 시간을 내준 것에 감사드릴 따름이지요. 저희 제안을 다시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지만, 매몰차게 거절하고 안으로 들어가기엔 왠지 미안했으니까요. 남자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자못 비장한 얼굴로 일장연설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아까의 그 카드를 하사하신 분께서는, 나라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인재를 애타게 갈구하고 계시지요. 엑스 씨, 우리가 보기에 당신이야말로 적임자입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낼 인재 말입니다. 따라서 제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자는 것. 업계 최고의 대우와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건, 그분의 특별한 약속입니다.’

나는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남자를 쳐다봤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그의 선글라스에 비친 내 얼굴뿐이었지요. 나의 침묵을 긍정적으로 해석한 그가, 이번엔 주머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습니다.

‘이걸 받으십시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니니까요. 생각해보고 언제든 연락 주시면 됩니다. 우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나라의 운명은 당신 개인의 운명 그 자체이기도 하니,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그 명함을 받아 왼쪽 옷소매에 쑤셔넣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나중에 숙소에서 소지품 검사를 당할 때 그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명함을 숨긴 뒤 뒤돌아서는데, 남자가 다시 불렀습니다.

‘엑스 씨,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괜찮다면,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이번에도 딱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남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가무를 즐겨왔습니다. 오래된 역사책에도 다 나와 있다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마지막으로 다 같이 노래 한 곡을 부르며 헤어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외국에서만 오래 지내 잘 모르시겠지만, 어떤 모임을 가진 후 함께 노래를 부르며 파하는 것은 예로부터 전해져온 아름다운 풍속입니다.’

문득 좀전의 감동이 떠올랐습니다. <낮에 나온 반달>을 합창하며 느꼈던 그 뭉클함!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옷을 입은 네 명의 남자들은 기뻐하며 한 줄 횡렬로 섰습니다. 리더인 듯한 사람이 내게 손짓을 하더군요. 그 중앙에 와서 자리를 잡으라는 거였어요. 나는 자석에 끌려가는 쇠못처럼 스르르 그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러고는 마치 원래부터 그 중창단의 일원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정중앙에 섰지요. 드디어 어디선가 반주가 흐르고(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반주는 차라리 우리 머릿속에서 흘렀던 건지도 몰라요), 리더인 듯 보였던 남자가 선창을 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어요. 그런데도 그 애절한 곡조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는 이상한 무아지경에 빠져 손에 손을 잡은 채 합창을 시작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가 알아서 화음을 넣었고,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멀리 은하수까지 울려퍼졌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얌전한 몸매에 빛나는 눈/고운 마음씨는 달덩이같이/이 세상 끝까지 가겠노라고/ 나하고 강가에서 맹세를 하던/이 여인을 누가 모르시나요.’

1절을 끝낸 뒤 잠시 숨을 고르고 2절을 시작하려는 찰나였습니다. 갑자기 술집 뒷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뛰어나왔습니다. 

‘엑스, 지금 뭐하는 거야? 몰로디노프 박사님이 찾고 있어! 이러고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단단히 화가 나 있단 말이야!’

달려나온 사람은 톰이었습니다. 심하게 긴장했는지, 어스름한 속에서도 창백한 낯빛이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난 얼른 사람들과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뒤돌아보니, 중창단(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뻘쭘한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더군요. 결국 난 그들과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헤어졌습니다. 술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니, 이미 마당은 텅 비어 있고 검은 옷의 남자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몰로디노프는 정말로 심하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는, 쭈뼛대며 들어오는 나를 보자마자 다그쳐 물었습니다. 

‘미스터 엑스,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겁니까?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밖으로 혼자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말입니다.’

나는 술집 뒷마당에서 바람을 쐬다가 만난 검은 옷의 남자들에 대해 털어놓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해왔는지, 그리고 마지막엔 다 같이 손을 잡고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말입니다. 그래요, 만약 어디선가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때 난 정말로 모든 걸 다 말해버렸을지도 몰라요. 옷소매에 감춰뒀던 명함까지 주섬주섬 꺼내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 바로 그 소리가 머릿속에 웅웅대며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응? 뭐라고?’

처음엔 톰이 속삭이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며 멀찍이 서 있던 톰에게 작은 소리로 반문했지요. 그러나 톰은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아무래도 헛것이 들리는 것 같았으니까요. 오랜만에 마신 술 때문에 감각기관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흔들며 웅웅대는 기묘한 소리를 쫓으려는데, 갑자기 선명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귀 안쪽 반고리관보다 더 깊은 곳에서 울려댔습니다.

‘그걸 보여주지 마. 그들에겐 아무것도 말하면 안 돼. 절대로! 알았지?’

이번엔 뭐라고 말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난 움찔하며 명함을 다시 옷소매 속에 깊숙이 찔러넣었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몰로디노프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더군요.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과식을 했더니 배가 너무 아파서 그만……’

그러면서 연극적으로 배를 문지르자, 몰로디노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마당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던데, 그건 뭐였습니까? 대체 누구와 접촉한 거지요? 듣기론 이상한 남자들과 합창을 하고 있었다던데……’

나는 톰을 휙 돌아봤습니다. 저놈이 그새를 못 참고 다 일러바쳤군. 이런 생각을 하자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치밀어오르는 분을 참으며 태연히 대답했지요.

‘뒷마당엔 술을 마시다 바람을 쐬러 나온 술꾼들이 꽤 많았습니다. 저는 그들과 잠시 어우러져 노래를 불렀을 뿐이고요. 제가 어린 시절 불렀던 동요를 가르쳐주자 다들 기뻐했고, 우린 다 같이 손에 손을 잡고 가무를 즐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맹세컨대 이게 다예요.’

대답을 마치고 몰로디노프를 힐끗 보니, 얼굴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가보세요. 다시 한번 경고하지만, 앞으론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우리 기관은 삼진아웃제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만약 두 번만 더 그런 돌출행동을 저질렀다간 영원히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 말입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혼자 구석진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습니다. 톰은 미안한지 내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할 뿐, 절대 가까이 다가오진 않더군요. 혼자 술을 따라 마시며 아까 그 남자들이 했던 제안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은 나지 않고, 그저 술만 계속 들이켜게 될 뿐이었어요. 몇 잔이나 마셨을까,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 되고 눈앞에선 술집 전체가 빙글빙글 돌아갔습니다. 점점 눈이 스르르 감기더군요. 에라 모르겠다. 그런 말을 중얼대며, 난 테이블에 엎드렸습니다. 그러고는 완전히 곯아떨어졌지요.

안타깝지만…… 그후의 일은 기억에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땐 회색 방에 누워 있었으니까요. 그 작은 간이침대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말이에요.” 

그때 존 휠러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 미스터 엑스. 얘기 도중 미안하지만, 정말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는 엑스가 떠드는 동안 나에게 열 번도 넘게 눈짓을 해오던 중이었는데, 아마 더는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 것 같았다. 스스로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꿈꾸는 사람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엑스는 교수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더니 마치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사방을 두리번댔다. 

“미스터 엑스, 대체 당신 자신의 이야기는 언제 시작할 생각입니까? 보세요, 이미 창밖은 어두워졌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어요. 우리가 궁금한 건 우편물 행낭을 분류하는 어떤 공무원의 얘기도 아니고, 악몽을 꾸다 깨어난 원폭 피해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또한, 술집에서 만난 남자들과 소리 높여 노랠 불렀다는 어느 초능력 요원의 괴이한 넋두리도 아니죠. 우린 다만 당신이 어떤 수준의 초능력을 가졌는지, 그리고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라고요.” 

교수는 이렇게 말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정말입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나는 당신을 검증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그들은 겨우 일주일의 여유를 줬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여기 있는 앤드루와 나 말입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거기에 어울리는 테스트를 진행한 뒤 보고서까지 작성해야 한다고요. 게다가 보고서 양식은 또 어찌나 복잡다단한지. 그걸 쓸 생각만 해도 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고요! 그러니 이제 제발 좀 짧게, 중요한 것들만 간추려서 들려주십시오. 그래주시지 않으면 우린 정해진 기한 안에 아무것도 끝낼 수 없고, 결국엔 당신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하고 부정적인 보고서를 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교수의 말에 엑스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이 일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라는 것 자체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려면 당연히 스스로의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과거의 어떤 이야기가 더 중요하고 어떤 이야기가 덜 중요한지를, 내가 어떻게 판단하죠? 사소하다고 여겼던 것이 알고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일들이 나중에 가서야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기도 하는데…… 내가 그 모든 인과관계와 사안의 경중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건 아무리 천리안을 지닌 저라고 해도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이거든요.”

말을 마친 엑스는 한동안 머리를 움켜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어둠과 침묵이 연구실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차올랐다. 보다 못한 내가 엑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미스터 엑스, 어차피 오늘은 늦었습니다. 내일 마저 듣는 게 어떨까요? 교수님도 밤에 푹 쉬고 오시면 당신의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내 제안에 엑스는 두 손을 비비며 문 쪽을 바라봤다. 

“그럼 이젠 어떡하지요? 그냥 이대로 숙소로 가야 하는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난 오늘의 기억을 완성하고 싶어요.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존 휠러는 이미 퇴근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꺼내 걸치고 문가에 놓여 있던 모자를 쓰더니, 엑스에게 말했다.

“앤드루 학생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우린 모두 지쳤습니다. 게다가 미스터 엑스, 당신이야말로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거울을 보라고요. 오래 이야기한 탓에 볼은 쑥 들어가고 눈 밑엔 다크서클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만합시다. 이어지는 당신의 얘기는 내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듣도록 하지요. 그럼, 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밤길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존 휠러는 나가다 말고 나를 돌아봤다. 

“연구실 뒷정리 좀 부탁하네. 문도 잘 잠그고, 알겠나?”

그 말을 남기고, 교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엑스는 한동안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손뼉을 치며 외치는 것이었다. 

“좋은 생각이 있어요, 앤드루 군! 오늘밤에 당신 혼자서라도 내 이야기를 듣는 겁니다. 그리고 그걸 여기에 기록으로 남기는 거죠(그러면서 엑스는 테이블에 놓인 소니 녹음기를 톡톡 건드렸다). 어때요? 아, 물론 뜻밖의 제안에 난감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오늘 이야기를 다 마치지 않으면 영원히 이 스토리의 끝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겠어요? 사실 난 아까부터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가 살아온 내력에 완전히 푹 빠져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존 휠러 교수는 오직 물리적이고도 과학적인 시각에서만 나의 이야기에 접근했지만, 당신은 그 너머의 뭔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난 역시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이따 밤에 숙소로 오세요. 거기서 시원한 맥주라도 한잔하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눠보자, 이 말입니다.”

그래도 내가 머뭇대자(사실 난 그때 존 휠러의 허락 없이 엑스를 만나러 가도 되는지 알지 못해 망설이고 있었다) 그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어깨에 메고 있던 낡은 가죽가방에서 나무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이걸 드리겠습니다. 쿠바산 최고급 시가예요. 사실은 두 분께 선물하려고 챙겨온 것이었죠. 그러나 교수님은 이미 귀가하였으니, 이건 모두 당신 것이 되었군요. 한번 피워보세요. 향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아, 그리고 또 있습니다. 만약 숙소로 와서 이야기를 마저 들어준다면 야식을 대접하겠어요.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의 소시지 안주가 아주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거든요. 자, 어떻습니까? 이래도 오지 않을 건가요?” 

결국 난 시가 상자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하지만, 내가 그날 엑스를 만나러 가기로 한 것이 결코 시가 몇 개나 소시지 안주 한 접시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음을, 여기에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이다. 나는 오직 뒷이야기를 어서 듣고 기록함으로써 존 휠러를 돕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에 의해 행동했을 뿐이며, 그 밖의 다른 생각은 눈곱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말이다. 

여하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엑스는 황급히 메모지 한 장을 쥐여줬다.  

“이게 호텔 주소입니다. 도착하면 카운터에서 ‘시민 케인’을 찾으세요. 본명을 숨겨야 하기에 숙박부엔 가명을 적었거든요. 참, 그리고 명심하세요. 난 극비리에 여기 와 있는 거고, 내가 하는 일은 정부의 아주 중요한 비밀 임무와 관계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내 말은, 이따 누군가 미행하는 자는 없는지 잘 살피며 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엑스는 갑자기 내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하고 사방을 두리번대며 속삭였다. 

“아시다시피, 세상이 어지러워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같은 초능력자들은 더욱 조심해야 하는 법이거든요. 그럼, 이따 봅시다.”

그는 의수를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차갑고 딱딱한 손을 쥐자, 엑스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호텔 주소를 적은 그 메모지는 반드시 없애버리세요. 문서세단기에 넣고 갈아버리든가, 그게 여의치 않으면 씹어 삼키는 방법도 괜찮다고 봅니다. 어쨌든 절대로 누가 봐선 안 된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주세요.” 

말을 마친 엑스는 한동안 연구실을 둘러보며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그러더니 드디어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