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문득 오래전 어느 날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날 허드슨은 내게 돈을 쥐여주며 영화라도 보고 오라고 했어요. 나오는 길에 뒤를 돌아보니, 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 하나가 현관으로 들어가고 있더군요. 그래요, 그러고 보니 그날은 허드슨 부인이 집에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당시에 허드슨은 술을 자주 마셨고 그런 다음엔 언제나 주정을 했습니다. 주로 자기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많은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떠들었죠. 그는 자신이 엄청난 수의 군인을 무찔렀으며 흰옷 입은 사람들도 꽤 많이 죽였다고 떠벌리다가는 갑자기 소리치며 울부짖곤 했답니다. 휴…… 그럴 때 그의 눈을 봤어야 하는데요! 그 눈은 맹수처럼 붉고 입에선 육식동물의 뜨거운 김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었거든요. 때론 집 전체에 그 비릿한 입김이 가득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허드슨 부인은 작은 가방에 짐을 챙겨 어디론가 떠나버렸죠. 나는 울면서 그녀를 따라 현관까지 따라가곤 했지만, 양어머니는 뒤도 안 돌아보고 차에 올라서는 시동을 걸어 출발하는 것이었어요.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습니다. 허드슨이 피워낸 입김이 집안을 가득 채웠고 난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다녔죠. 양어머니는 이미 짐을 챙겨 어디론가 뜬 뒤였어요. 그때 아버지가 부르더군요.

‘자, 여기 2달러가 있다. 가서, 아무 영화나 보고, 샌드위치라도 사 먹어. 저녁때까진 돌아오지 말란 말이다, 알겠냐?’ 

나는 돈을 받아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재빨리 윗옷을 걸치고 집밖으로 뛰어나왔지요. 마침 시내에선 재미있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은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공상과학영화였는데……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고, 하늘은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으로 뒤덮여 새까맸어요. 난 잔뜩 긴장한 채 영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양아버지의 붉은 눈동자와 비릿한 입김도 다 잊어버릴 정도였지요.  

영화를 다 보고 돌아오니, 집은 뿌연 저녁 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나올 때 봤던 진한 화장의 여자는 이미 돌아간 것 같았고요. 난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발뒤꿈치를 들고 어두컴컴한 거실을 지나는데 ‘왔냐?’라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프리 허드슨, 내 아버지, 혹은 나를 키워준 사람. 그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는 내용이었어요. 다행히 마지막엔 지구방위군이 그들을 모두 무찔러요.’

그러자 아버지가 피식 웃었습니다.

‘그깟 외계인 따위…… 너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아냐?’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내게, 아버지가 또 질문을 던지더군요.

‘오늘 뉴스 봤어? 너, 진짜 무서운 것이 뭔지, 내가 알려줄까?’

나는 두 손을 모아쥔 채 대답했습니다. 

‘무슨 뉴스요?’

‘바보 자식. 아직 그 소식도 못 들은 게냐? 우린 이제 끝장이라고, 알겠어?’

그러면서 허드슨은 손에 쥐고 있던 맥주 캔을 우그러뜨렸습니다. 

‘놈들이 결국 선수를 쳤단다, 소련 놈들 말이야. 그 새끼들이 우주에 먼저 발을 내디뎠다고. 그래, 놈들은 스푸트니크라는 위성을 쏘아올렸어. 그때 다 죽여버렸어야 하는데, 제기랄!’

불을 켜자, 벌겋게 달아오른 채 기이하게 일그러진 허드슨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습니다. 아니, 차라리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요. 

‘물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아마도 난 허드슨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젓더니 비틀비틀 걸어서 현관 쪽으로 가더군요.

‘참전용사 모임이 있어. 늦을 테니, 먼저 자라.’

그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허드슨의 목소리였습니다. 

문이 쾅 닫히는 걸 확인한 후, 나는 조용히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거기엔 커다란 선반이 있었는데 그 위엔 수많은 통조림 캔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바로 쌓여 있었지요. 깔끔한 성격의 허드슨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축해둔 것이었어요. 나는 선반에 손전등을 비추고 통조림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봤습니다. 핵전쟁이 나면, 그러니까 소련이 결국 우릴 공격하면, 이 지하실로 대피한 뒤 과연 며칠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야채, 과일, 고기의 순서로 가지런히 정리된 통조림은 겨우 한 달분 정도밖엔 안 됐습니다. 갑자기 더 큰 불안이 밀려오더군요. 한 달이라니요. 그러니까 전쟁이 나면, 나는 한 달이 지난 뒤엔 죽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난, 거의 본능적으로 몇 개의 통조림을 챙겨 내 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다음 침대 시트를 들추고 그것들을 따로 숨겨뒀지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지만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졌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위성을 쏘아올렸다는 소련 놈들. 그자들이 우주를 선점한다면? 그때 지구엔 어떤 일이 닥치게 될지…… 얼마나 뒤척이다가 잠들었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릅니다. 그저 선잠이 들었었다는 것과 엄청나게 많은 꿈을 꿨다는 것만 기억할 뿐. 

꿈속에서 난 수천 개도 넘는 버섯구름을 봤고 폐허가 된 지구 위를 헤맸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어요. 처음엔 당연히 그게 꿈속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곧 눈을 번쩍 떴고 그 끔찍한 굉음이 현실의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전쟁이 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침대에 앉아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드디어 소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고 놈들이 쏘아올린 미사일이 영화 속 외계인들처럼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겠구나. 그런 상상을 하자 두려움에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두번째 폭발음은 들리지 않더군요. 마침내 나는 침대에서 일어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뭔가가 내 안에서 윙윙 울리며 결코 봐서는 안 될 것이 저 아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지요. 그래도 난 내려갔습니다.

귓속에서 윙윙대는 소리가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바닥에 널브러진 한 남자의 몸통이 보였습니다. 커다란 남자의 몸 아래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군요. 더이상 내려갈 수 없어서 계단 난간을 잡은 채 그만 나는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 발짝씩 걸어내려갔지요. 거실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그 한가운데 허드슨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붉은 카펫인 줄 알았던 것은, 그의 목에서 쏟아진 피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쏘았는데, 베테랑 군인답게 한 방에 뇌를 박살내버렸죠. 머리가 있어야 할 곳이 텅 비어 있던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탁자 위엔 나무 상자가 열린 채 놓여 있고, 거기엔 여러 종류의 총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어요. 그중에서도 죽은 허드슨 옆에 떨어져 있던 건 콜트 45구경 권총이었습니다. 그래요, 아마도 그는 잘 알고 있었겠지요. 군용으로 개조된 콜트 45구경의 위력을요. 단 한 방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날려버릴 유일한 총이라는 사실을 말이에요. 나는 전화기를 들고 9, 1, 1을 순서대로 눌렀고, 그다음 외쳤습니다.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잠시 후 구급대가 왔고, 경찰차의 사이렌도 요란하게 울려퍼졌습니다. 형사는 나를 조용한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름이 뭐니?’ 

‘완. 아니, 로버트. 로버트 허드슨.’ 

‘죽은 사람은 네 아버지야?’ 

‘아니요.’ 

‘그럼 누구지?’ 

‘내 양아버지.’ 

‘그가 왜 저런 선택을 했는지 혹시 아니?’ 

‘……’ 

‘하긴, 네가 뭘 알겠니. 이 집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지?’ 

‘네.’ 

‘그래, 알았다. 뭔가 생각나면 여기로 전화해라.’ 

그는 나에게 명함을 주고 뒤돌아서서 나갔습니다. 그때였어요. 허드슨을 죽인 범인이 퍼뜩 떠오른 건 말입니다!

‘아저씨,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 것 같아요!’

내가 다급하게 부르자 형사는 방문을 나가다 말고 뒤돌아섰습니다. 그가 도로 방으로 들어오더니,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더군요.

‘그래? 그게 누구지? 아는 대로 말해봐라. 비밀은 지켜줄 테니.’ 

‘그건, 그러니까, 허드슨을 죽인 건 소련 놈들이에요. 그들 때문에 허드슨이 죽었다고요. 확실해요.’ 

형사의 표정이 허탈하게 변하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낮에, 아버지는 놈들 때문에 우리가 다 죽을 거라며 술을 마셨어요. 그는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덜덜 떨며,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끔찍한 게 소련이라고 외쳤으니까요!’

형사는 애처로운 듯 날 한참 바라보더니, 손을 잡아줬습니다.

‘얘야,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은 나도 걱정이다. 스푸트니크 소식은 우리도 들었지. 하긴, 놈들이 그런 식으로 선수를 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여하튼, 정보 고맙구나.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소련 놈들은 국가가 굳건히 막아내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지? 참, 곧 네 양어머니가 오신댔어. 그때까진 이 방에서 좀 쉬렴.’ 

그런 다음 형사는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그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허드슨 부인이 현관으로 뛰어들어오면서 과장되게 울부짖던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다음날 지역신문에 조그맣게 실렸던 관련 기사도 약간은 기억납니다. 아마 이런 제목이었던 것 같아요. ‘2차 대전과 한국전의 영웅, 총기사고로 사망하다’.

그런데 이런 말을 아십니까? 어떤 생각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순간, 그건 이미 하나의 실체가 되고 만다는 속설 말입니다. 그 말의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그저 발설됐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요. 내가 겪은 일 역시 그러했습니다. 허드슨을 죽인 것이 소련과 그들이 쏘아올린 스푸트니크 때문이라는 나의 진술은 그뒤로 내게 일종의 실체적 진실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그 생각은 결코 떨쳐지지 않았어요. 내가 소련의 위협에 맞서는 비밀 정보기관에서 일하게 된 이유도 역시 그와 관련이 있을 테고요.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그날 난 결국 철원 평야를 원격투시하던 중 만난 초능력자와의 대화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고 해도, 그리고 내가 그에게 아무리 큰 친밀감을 느꼈다고 해도, 적국의 시민과 개인적으로 교류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건 아마 그쪽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편의상 ‘와이’라고 부르기로 한 그자 역시, 내가 사는 도시 이름을 들은 뒤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우린 그렇게 한동안 침묵하며, 온 정신을 집중하여 상대방을 탐색했습니다. 뭔가 몰래 알아낼 건 없는지…… 마치 눈을 부릅뜨고 적국의 비밀 금고를 뒤지는 스파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문득 그의 얼굴이 궁금해지더군요. 분명 추악한 외모를 가진 악마 같은 놈이리라 상상하며, 난 벽에 걸린 지도에서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넓은 땅을 노려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얘기했던가요? 원격투시를 하기 전 우리 초능력자들은 먼저 지도 위의 그 장소를 노려보는 단계를 거친다는 것을요.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지도 위 등고선들이 서서히 움직이며 삼차원적 형태를 갖춰나갑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삼차원의 공간에 도로와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날도 난 그렇게 또다시 천리안을 작동시켰습니다. 빨강으로 칠해진 드넓은 소련 땅, 거기에서도 모스크바라고 적힌 한 점을 노려보자, 드디어 그 차갑게 얼어붙은 도시가 눈앞에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비록 오랜 시간 천리안으로 세계 곳곳을 누벼왔지만 악의 제국의 심장부를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때 내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군요. 여하튼 난 와이의 목소리를 느꼈던 때의 감각을 최대한 되새기며 그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어느 광장에서 그의 기척을 찾아냈던 것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광장을 살폈습니다. 아니, 내 천리안이 그 돌로 만들어진 바닥 구석구석을 훑었다고 하는 편이 어울리겠죠. 어쨌든 광장은 조용했고 무척이나 넓었으며 지나다니는 이라곤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쪽에 푯말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엔 ‘루뱐카’라는 이름이 아름답고도 정교한 장식체의 키릴문자로 새겨져 있었지요. 루뱐카. 그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광장 한쪽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칠층 석조건물을 주시했습니다. 한참 전부터 거기에서 이상야릇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니까요. 만약 이 광장 어딘가에 와이가 은신해 있다면, 그가 있을 곳은 바로 저 건물뿐이라고 나는 확신했습니다. 그 앞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보니, 역시나 건물은 철저한 보안 시스템으로 보호되고 있더군요. 그저 총을 든 군인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더라는 둥,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요,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정신력으로 만들어진 강력한 방어막의 일종이었습니다. 순간 난 내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았죠. 그런 염력이 형성되어 있다는 건 그 석조건물 안에 엄청난 초능력자가 있음을 의미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무기력감이 나를 엄습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초능력자라고 해도 그 정도의 방어막으로 보호되는 건물에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곳이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가 툭하면 경고했던 소련의 초능력 부대의 주둔지인 게 확실했던 거고요. 건물 주위를 맴돌며 들어갈 만한 틈을 찾는데, 갑자기 어떤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동시에 내 입에선 쓰디쓴 신음이 터져나왔지요.

‘나쁜 놈! 악마 같은 자식!’

그렇습니다. 와이에게 느꼈던 그 생래적인 친밀감은, 사실 소련의 초능력 부대가 내게 건 마인드컨트롤에 의한 착각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지요.) 나는 분노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다니. 마치 첫사랑에 빠진 듯 설레어했건만. 결국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나는 속으로 울부짖었습니다.

‘바보 같으니라고! 적국의 스파이에게 그렇게 속아넘어가다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슬프게 포효할 때, 문득 어디선가 내가 낸 것과 비슷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엔 광장을 빙 둘러싼 건물들에 내 사념이 부딪혀 가상의 메아리로 되돌아온 걸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귀 기울여보니 그건 바로 와이가 내는 소리였어요. 그 역시 (어쩌면 나와 같은 이유로) 루뱐카광장의 석조건물 어딘가에서 분노와 슬픔에 겨워 흐느끼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곧이어 벌어졌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울부짖음이 공중에서 교차하며 공간을 뒤흔들더니, 생전 처음 보는 괴이한 파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계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인공적인 파장을 그리며 사방으로 흩어졌어요. 갑자기 루뱐카광장의 칠층 석조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강력한 방어막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내가 머무는 정보기관을 보호하던 방어막도 같이 무너져내렸고요. 순간 엄청나게 강렬한 공기의 파도가 고막을 때렸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니 내가 그 회색 방의 인조 양가죽 의자 위에 누워 있더군요. 사방을 두리번거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벽에 걸린 세계지도만이 한 귀퉁이가 떨어진 채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죠. 

‘아아, 모든 건 꿈이었군.’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작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다시 잠을 자보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이상하게도 정신은 점점 또렷해질 뿐이었지요. 서랍을 뒤져 수면안대를 꺼내어 쓰고, 이번엔 속으로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 네 마리…… 수백, 수천 마리의 양이 눈앞에서 울타리를 뛰어넘었을 즈음, 나는 정면 벽에 크고 둥근 거울이 생뚱맞게 걸려 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언제부터 저기 거울이 걸려 있었지?’

의문에 빠진 채 난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어요. 

거울은 뭐랄까, 김이 서린 것처럼 뿌옜고, 그 정중앙에 마치 안갯속에 서 있는 듯한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한참 동안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지요. 난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습니다. 그러나 거울 속의 상은 미동도 하지 않더군요. 이번엔 왼손을 들어봤지만, 거울 속의 나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손을 내리자, 놀랍게도 거울 속 내가 왼손을 흔들지 뭡니까! 그 거울 속 상은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어요. ‘안녕?’이라고 말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을 하다 말고―뭐라고 했냐고요? 당연히 저도 ‘안녕?’이라고 인사했지요. 달리 뭐 할말이 있겠어요?―난 갑작스레 모든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요, 그건 거울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거울이라고 여겼던 벽면의 그 둥근 형태는, 사실은 와이와 나 사이에 형성된 일종의 통로인 셈이었습니다. 마치 세상 모든 걸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그것을 도로 내놓는 화이트홀이 웜홀이라는 기이하게 뒤틀린 시공간의 통로로 연결되듯, 나와 와이 사이에도 어떤 초공간적 구멍이 뚫렸던 거지요.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상이 기실은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거울 속 나의 모습이라 여겨도 하등 이상할 게 없으리만치 나와 꼭 닮은 그는, 바로 와이였던 겁니다. 아마도 우린 동시에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아요. 서로를 바라보던 각자의 두 눈이 갑자기 화등잔처럼 커졌던 걸 보면 말이에요. 우리는 동시에 입을 벌렸고, 그다음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으며, 결국엔 서로 상대방을 가리켰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린 동시에 외쳤지요. 

‘뭐야? 너…… 너는 나였던 거야?’ 

슬프게도, 그후의 일은 기억에 없습니다. 문득 엄청나게 심한 현기증이 밀려와 양가죽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아버렸으니까요. 눈을 감기 전 본 와이의 마지막 모습 역시 나와 비슷했습니다. 그 역시 허물어지듯 자기 자리에 앉아버리더군요. 눈앞에 있던 거울, 아니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생겼던 통로가 서서히 닫혀버리는 광경을, 나는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거든요.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난 회색 방의 조그만 간이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머리엔 둥글고 꽉 끼는 철제 모자 같은 것이 씌워져 있고, 거기에서 나온 무수한 전선이 커다랗고 네모난 기계의 모니터에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화면엔 실시간으로 측정되는 내 뇌파가 현란한 그래프를 그리고 있었고, 옆에 놓인 프린터가 그 모든 기록을 인쇄하여 뱉어내고 있더군요.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난 침대에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게 뭐야? 지금 뭐하는 거냐고!’

이렇게 소리쳤지만, 목소린 입안에서만 맴돌 뿐이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일어났어?’ 

올려다보니, 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특별한 조치를 해놨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 그냥 듣기만 해, 엑스. 넌 어젯밤 소란을 피우고 날뛰다가 보안팀에게 저지당해 이런 조치를 받게 됐대. 나도 자세한 건 몰라. 어제가 내 아내 앤의 생일이었던 거, 알지? 그래서 외출을 했었는데, 아침에 들어오니 몰로디노프 박사가 나를 호출하더군. 난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연구실로 갔지. 그는 단단히 화가 나 있었어. 자네가 적국의 스파이와 접촉한 것 같다는 거야. 슈퍼컴퓨터로 특수제작한 방어막이 뚫린 것도 자네와 관련 있다며, 조금이라도 아는 게 있으면 다 불라고 협박하더군. 난 당연히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 사실이잖아. 하지만 그는 나마저도 의심하는 눈초리였어. 그러면서 몇 번이고 다그치고 구슬리고 하는 통에, 정말 힘들었다니까. 여하튼, 그의 말에 의하면 어젯밤 모두 잠든 뒤에 갑자기 복도가 시끄러워졌대. 무슨 일인가 하여 보안요원들이 나와보니, 자네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대며 복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고 있더라는 거야. 대여섯 명의 요원이 달려들어 겨우 자넬 잡은 뒤, 어쩔 수 없이 주사를 놓고 이렇게 안정시켜놨다는 게 화가 잔뜩 난 몰로디노프의 얘기였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엑스, 도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신음을 하자, 톰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그렇지. 자넨 지금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깜빡했어. 잠깐 기다려봐.’ 

그러면서 그는 내 머리에 연결된 전선 하나를 잡아 뺐습니다. 그러자 펑, 하며 목이 뚫리고 다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난 그에게 애원했습니다.

‘톰, 나 좀 일단 풀어줘. 내가 소란을 피웠다니 말도 안 돼!’ 

그러자 톰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미안해, 엑스. 몰로디노프의 명령이야. 너는 위험인물이니 절대 풀어주면 안 된다고 했어. 상부의 지시를 어길 순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만 얘기해줘. 그럼 내가 몰로디노프 박사에게 잘 말해볼게.’ 

나는 톰에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아름다운 철원 평야의 땅 밑에 켜켜이 쌓인 채 썩어가며 저마다의 사연을 두런두런 내뱉는 시체들이 있다고 하면, 과연 그는 내 말을 믿어줄까? 썩어가는 시체들로부터 흘러나와 지표면을 뚫고 새어나오는 끔찍한 악취의 존재를, 또한 그는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땅속을 배회하던 중 나와 똑같이 생긴 초능력자를 만났다고 한다면, 게다가 그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고 한다면, 도대체 톰은 어디까지 나의 말을 믿어줄까? 

그러나 나는 규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초능력 부대의 강령 제1조는 ‘원격투시를 통하여 관찰한 모든 사실을 반드시 팀의 파트너와 상사에게 보고한다’였으니까요. 저는, 이 강령을 어기고 투시를 통하여 얻은 비밀을 사적으로 남용하려다 쫓겨난 몇몇 동료들도 알고 있었어요. 그들은 그렇게 얻은 정보를 이용해서 주식과 로또를 구입하거나 스포츠 도박에 판돈을 걸었지요. 뭐, 그렇다고 해서 그걸로 큰돈을 번 사람도 없었지만 말이에요. 

여하간, 난 결국 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간밤의 일을 차례대로 설명했지요. 그런데 이상한 건, 내가 말하려는 것과 실제 입 밖으로 나오는 나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요, 내 안의 나와 바깥의 나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댔던 겁니다. 내 안의 나는 끊임없이 중얼거렸지만, 톰이 받아 적을 수 있었던 건 겨우 한 줄뿐이었다고 합니다.

‘철원 부근 땅속에 뭔가 있어. 거길 파보면 알 거야.’ 

톰은 노트에 내 말을 그대로 적은 뒤, 귀를 가까이 가져다대고는 다시 한번 물었습니다.

‘이봐, 엑스. 거기 땅 밑에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역시 내 대답 중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련…… 위성…… 스푸트니크…… 땅 밑…… 악취…… 시체…… 전쟁…… 군인…… 적국…… 초능력…… 방어…… 스파이.’ 

마침내 톰은, 더이상 받아 적기를 포기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래, 알겠어, 엑스. 일단은 상부에 보고할게. 어쨌든, 한국의 철원이라는 땅 밑에 뭔가가 있다는 거잖아?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공산주의자들과 관련되었다는 거고.’

그런 다음 톰은 아까 내 머리에서 떼어냈던 줄을 다시 연결했습니다. 그러자 눈앞의 모든 풍광이 일그러지고, 회색 방음벽으로 둘러쳐진 방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나는 그만 또다시 잠들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엑스는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침묵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완전히 지친 듯 보였다. 동공은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듣고 있던 존 휠러 교수가 물었다. 여전히 엑스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럼, 상부에선 당신이 보고한 걸 찾아냈습니까? 그곳에 묻혀 있던 것들의 정체는 대체 뭐였습니까?” 

그러자 엑스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옷소매로 입을 닦더니, 조용히 내뱉는 것이었다.

“글쎄요. 나 역시 거기에 정확히 무엇이 있었던 건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곳에서 지표를 뚫고 공기 중으로 서서히 새어나오는 악취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질병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해봤을 따름이지요. 그러니까 그건 어쩌면 일종의 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독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몸이 아니라 머리에(그러면서 엑스는 의수로 자기 이마를 툭툭 쳤다) 작용한다는 것 정도일 테고요. 물론 나는 나중에 그 독의 실체에 대하여 뭔가 깨닫게 될 터이지만, 그 자세한 전말은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닌 것 같군요. 왜냐하면, 그 일―독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일 말입니다―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렇기에―비록 내가 모든 걸 예견하고 있다 해도―지금 단계에선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렇게 목이 쉬도록 떠드는 이유는 오직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서이지, 결코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따위를 떠벌림으로써 흥미를 끌려는 게 아니니까요!

어쨌든 중요한 건, 그날 밤 철원 평야의 땅 밑에서 목격한 광경 덕분에 내가 국가로부터 표창장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얘기를 듣고 톰이 작성한 한 장의 보고서 덕분이었다고 할까요? 여하튼, 그전에 먼저 이걸 보십시오. 너무 조그맣게 나오긴 했지만, 여기, 구석에 서 있는 사람 보입니까?”

엑스가 가방을 뒤져 우리에게 내민 것은 또 한 장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줬던 낡고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자료들과는 달리, 이번엔 비록 복사본이긴 해도 깔끔하게 코팅이 되어 있었고 구겨진 자국도 전혀 없었다. 잡지 같은 데서 오려낸 걸로 보이는 그 흑백사진엔 여남은 명의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옷(줄무늬 윗옷에 백색 바지였는데, 엑스의 말로는 그게 초능력 부대의 단체복이었다)을 입은 채 한 줄로 서서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엑스가 가리킨 건 가장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얼굴이었다. 얼핏 봐선 눈, 코, 입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고 흐릿한 사진 속 남자의 모습은 그나마도 반쯤 잘려 있었다. 그러나 엑스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그 얼굴을 짚더니, 우리를 쳐다보며 의기양양하게 웃는 것이었다. 

“쑥스럽지만, 이게 제가 표창장을 받기 위해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의 사진입니다. 아, 물론 단체상이었어요. 아쉽게도 상장과 상패는 우리 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가 가져갔지요. 그 점이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뭐 그렇다고 해서 부대원 전체 수만큼의 상장과 상패를 제작할 순 없는 거잖아요. 어쨌든, 나는 그걸 몰로디노프 박사가 대표로 가져가는 데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상의 명칭은 ‘국가안전공로상’이었는데, 정보국에서 나온 국장 대리가 직접 수여했습니다. 잠깐, 뭐라고요? 그런 상은 들어본 적 없다고요? 당연합니다. 당신들이 그런 상을 들어봤을 리가 없지요. 왜냐하면 그건 국가가 부여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비밀요원들에게만 수여하는 일종의 극비 훈장 같은 거니까요. 따라서 우리의 수상 소식도 어디 보도되거나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정보기관 내부용 회람지에만 간단하게 실렸을 뿐이지요. 이게 바로 거기서 오려낸 사진이고요.”

그러면서 그는 좀전의 코팅된 종이를 또 한번 우리 앞에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