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회



밤이 되어 어두워진 철원 평야에서, 내가 뭔가를 느꼈다고 방금 말씀드렸죠? 그래요, 그건 아주 깊은 땅속에서 일고 있는 기이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아니 무수한 웅성거림이었던가요? 아무튼 그 지독한 악취는 의문의 목소리들과 함께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참으며 있는 힘을 다해 그곳을 응시하자, 드디어 지하의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그건,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하고도 기괴한 광경이었습니다. 땅 밑에서 시체들이 겹겹이 쌓인 채 썩어가고 있었으니까요! 정말입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어요! 시체는 수십 구도 아니었고 수백 구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수천, 수만, 혹은 수십만, 아니 어쩌면 수백만, 혹은 그 이상에 이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 땅,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을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평야 밑에 묻혀 있더란 말입니다. 썩어가는 시체들은 군인의 복장을 한 이도 있었고, 민간인의 복장을 한 이도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각각 아군과 적군의 복장을 한 채, 마치 죽은 뒤엔 하나가 되기로 작정이라도 했다는 듯 서로서로 뒤엉켜 있었고요. 그들은 모두 죽은 지 무척이나 오래되어 보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망각된 채 땅 밑에 켜켜이 쌓여 부패하고 있었죠. 지독한 악취는 바로 그자들의 몸에서 천천히 새어나와 지표를 뚫고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던 거고요. 그리고 그 냄새를, 나는 그렇게나 멀리 떨어진 대륙에서 오직 초능력만을 이용해 감지했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 냄새 분자들의 일부가 바람을 타고 대양을 건너 내가 있던 작은 회색 방까지 흘러와, 정말로 나의 콧속 후각세포를 자극했던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의견 4.
여기서부터 저자는 철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여러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는 이 부분을 서술하기 위해 가능한 많은 자료를 조사했던 것 같고, 결국 엑스가 언급한 엎드린 말 모양의 나지막한 야산의 이름이 ‘백마고지’라는 것을 알아낸다. 또한 그는 1950년 발발하여 1953년 휴전협정과 함께 끝났던 (그러나 알고 보면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고들 하는) 전쟁에 대한 온갖 사료들을 인용하며 ‘백마고지 전투’라는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투를 상기시킨다. 그에 의하면 그 엎드린 말 모양의 언덕을 탈환하기 위해 양측은 장장 열흘간의 전투를 벌였으며, 그때 죽은 사람의 수는 만오천 명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폭격으로 백마고지의 높이는 거의 1미터 이상 낮아졌으며 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거기서 흘러내린 피는 강물처럼 평야를 따라 굽이쳤다.” 그러나 앤드루 김은 이런 식의 멘트로 문단을 끝맺으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들은 썩어가고 있었기에 죽은 자들이었지만, 여전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선 살아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아니요. 좀비 같은 게 아닙니다. 서양의 B급 호러 무비 속에서 비틀비틀 걸어다니는 우스꽝스런 존재들과 그들을 동급으로 취급하진 말아주십시오. 땅 밑의 그들은 ‘진짜’였으니까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고 이 코로 냄새 맡았어요. 그래요, 거기, 그 깊고 깊은 땅속에서 어떤 자들은 팔이 떨어진 채로 또 어떤 자들은 다리가 떨어져나간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움푹 파인 눈구멍에선 구더기가 우글대고 있었지만, 손가락이 이미 완전히 썩어 부스러진 그들은 아무리 가려워도 긁지 못하더군요. 나는 죽은 자들이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꽉 쥐고 있는 이름표도 하나씩 살펴봤습니다. 거기엔 그 사람들의 생과 사가 죽은 자들만의 언어로 아로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이는 제주도에서 훈련을 마치자마자 총 쥐는 법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철원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아주 어린 소년이었지요! 그들 중 어떤 이는 후난성 출신의 농부였습니다. 그는 국가로부터 신발을 지급받지 못했고 그래서 발에 무명을 감고 밤마다 산속을 걷고 또 걸어 여기까지 오느라 발가락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있었어요. 그 옆에 있던 어떤 이는 코네티컷에서 온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메릴린 먼로의 사진을 아직도 주머니에 넣고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이미 죽어 완전히 썩은 채 마치 연기처럼 땅 밑을 부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런 식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끊임없이 중얼대고 있었던 겁니다. 그때 문득 제주도에서 왔다는 소년이 썩어가는 입을 벌려 내게 물었습니다. ‘언제 그 푸른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후난성의 농부는 한숨을 쉬며 걱정했습니다. ‘추수 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코네티컷 출신의 젊은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했어요. ‘도대체 난 왜 여기 있는 거죠?’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 역시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니까요. 어쨌든, 그들이 제각각 떠드는 사연들은 너무 크고 많아 고막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썩어가는 시체들의 악취는 점점 심해져 나는 토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에 처했습니다. 아마 그때 거울을 봤다면, 내 얼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겠지요. 평화롭게만 보이던 가을 평야에 숨겨져 있던 참혹한 공포를 직면해 하얗게 질려 있었을 테니까요.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온 건. 시체들의 두런거림 말고요, 네, 정말로 살아 있는 사람의 기척 말이에요. 나는 숨을 죽였습니다. 켜켜이 쌓인 시체와 어둠과 구더기뿐인 땅속을 돌아다니는 자라니. 그는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정체가 뭐기에 이런 음산하고 끔찍한 장소를 한밤중에 배회하는 걸까요? 시체를 먹고 산다는 귀신의 이야기가 생각나, 제 등골은 더욱 오싹해졌습니다. 물론, 난 용감한 편이고 미신을 믿지도 않습니다. 보통 땐 그렇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달도 뜨지 않은 깊은 밤, 땅속 가득한 시체들 사이에 누군가 돌아다니고 있다면, 당신들은 어떤 기분을 느끼겠습니까? 비록 내가 심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거든요. 여하튼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땅속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시귀屍鬼라도 찾아낼 요량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움직이면 그쪽도 움직였고, 내가 움직임을 멈추면 상대방 역시 완전히 조용해져버리더라는 사실입니다. 정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어요. 아무리 뒤져봐도 살아 있는 사람이라곤 없는 그 깊은 땅속에서 그런 기이한 기척이 느껴지다니 말이에요. 결국,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그저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저쪽도 조용해지더군요. 이번엔 눈을 한번 굴려봤습니다. 그러자 저쪽 역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게 아닙니까? 마침내 난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습니다. 그 의문의 상대에게 일종의 텔레파시를 보낸 것이지요. 
―넌 누구냐?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적막 속에서 죽은 자들의 중얼거림만이 들려올 뿐이었지요. 착각이었나 싶어 모든 것을 그만두려는 찰나, 갑자기 머나먼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는 너는 누군데?
나는 그 소리를 귀가 아니라 머리로 들었어요. 아니, 마음으로 들었다고 해야 하나요? 마치 공기 전체를 울리는 파동에 내 온몸이 공명하는 느낌이었죠. 특별히 몸의 어떤 부위에 소리가 느껴지는 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 내부로부터 진동이 울려퍼지는 거지요! 놀랍게도 그건 텔레파시를 통해 전해지는 소리였습니다. 난 당황했어요. 그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 여기까지 텔레파시를 보낼 만큼의 능력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또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던 걸지도 모릅니다.
―나? 나…… 나는 엑스다.
바보같이 그 순간 저는 그만 그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다른 식으로 멋지게 말할 겨를 같은 건 없었지요.
―그래? 그럼, 나는 와이라고 해두자. 와이, 어때?
상대방은 바로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느낌을 아십니까? 생전 처음 보는 이가, 오래도록 알아온 사람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런 기분 말이에요. 그건 기시감도 아니고, 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군요. 처음 보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그런 느낌을 갖게 될까요? 왜, 다들 그러잖아요. 첫눈에 반하면, 서로는 마치 원래부터 상대방을 알아왔던 것 같은 강렬한 감정에 빠져든다고 말이에요. 비록 그것이 사실은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무한정 분비되는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이라고 해도, 그렇기에 그런 감정은 채 석 달도 되기 전에 사라져버리고 두 연인에게 남는 것은 오직 환멸뿐이라고 해도, 바로 처음의 그 느낌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하여 인류는 지금처럼 번성하게 된 거라면서요? 그래요, 내가 그 악취 진동하는 철원 평야에서 처음으로 감지한 기이한 존재에게 느낀 감정 역시 그와 비슷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유도 없이 무작정 빠져들고 마는 괴이한 느낌 말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차차 밝혀드리겠지만, 나의 그런 직감은 결코 틀린 게 아니었어요. 그때 난 올바르고도 정확하게 상대방을 알아봤고, 언어라는 이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의 본질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상대방, 그러니까 편의상 ‘와이’라고 부르기로 한 그쪽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역시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고, 따라서 우린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아왔던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허우적댔던 겁니다.
―혹시 당신, 천리안을 가지고 있나?
이번엔 그쪽에서 먼저 물었습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습니다. 그에게 비밀을 발설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라는 소련 출신 신경과학자는 우리가 모든 검증 테스트를 통과했을 때 특별히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무엇보다도 비밀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지금 모스크바에 있는 소비에트연방 정보국 내엔 여러분보다 몇 배나 많은 수의 초능력자들이 모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까요. 그들이 언제 어떤 식으로 당신들에게 접근하여 국가안보와 지구 평화에 직결되는 중요한 정보를 빼내려고 할진, 솔직히 아무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당신들보다 훨씬 오랜 시간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최정예 특수요원들이에요. 그중엔 멀리 떨어진 장소에 있는 인간의 마음에 침투하여 그 당사자를 자유자재로 주무를 수 있는 이들도 꽤 여럿이지요. 그러니, 다시 한번 당부합니다. 철저히 비밀을 지키고, 아무도 믿지 말 것이며, 절대 스스로를 드러내지 마십시오. 이건 명령입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하여 심지어는 가족에게조차 비밀에 부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나의 파트너인 톰은 아내인 앤에게 자신이 국립보건원 신경정신과 의사라고 일러뒀다더군요. ‘아니, 혹시 앤이 의심하지 않던가?’ 내가 묻자 톰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전혀. 내가 여간 리얼하게 연기를 잘했어야 말이지. 게다가 장기 입원해 있는 위험한 정신병자들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밖엔 집에 갈 수 없다고도 했더니 무척 아쉬워하더라고. 어때? 이 정도면 대단한 거 아닌가?’ 실제로 톰과 일을 하고 있으면, 간혹 그의 바지 주머니에 든 호출기가 요란한 소릴 내며 울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톰은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며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복도로 달려나가곤 했어요. 하긴 그러고 보면 톰이야말로 철두철미하기 그지없는 친구였습니다. 완벽한 신경정신과 의사 흉내를 내기 위하여 나와 일할 때조차도 언제나 하얀 가운을 입고, 왼쪽 윗주머니엔 ‘신경정신과 과장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던 걸 보면 말이에요.
그럼 나는 가족들에게 뭐라고 해두었냐고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겐 그런 식으로 속여야 할 가족이란 게 아예 없었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아주 오래전, 나는 내 팔을 수술해주겠다는 미국인 중위를 따라 워싱턴으로 건너왔다고요.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아, 미안합니다. 초능력자의 가장 큰 단점이 바로 이런 거죠. 갑자기 모든 게 흐릿해진다고나 할까. 지금처럼 말이에요. 여하튼, 그 중위, 그 사람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와서 치료는커녕 나를 이런 신세로 만들고, 때리고 구박하고, 아무 곳에나 던져두고, 그 맛도 없는 인스턴트 중국 음식에 뜨거운 물도 아닌 찬물을 부어서 나 혼자 먹게 하고, 아아, 죄송합니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죠? 그래요, 그자, 내 양아버지의 이름은 제프리 허드슨이었습니다. 아니, 내가 뭐라고 했다고요? 하하, 잘못 들으셨겠지요. 아니면 내가 잠시 농담을 했던 걸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않아요. 그는 천사 같은 남자였고, 전쟁 영웅이었으니까요. 엄마를 잃고 수술도 제대로 되지 않아 생사의 기로를 헤매던 나를 워싱턴으로 데리고 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시켜주기도 했지요. 물론, 나는 수술을 받았고, 그것도 아주 잘 받았기에, 보시다시피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허드슨은 퇴원한 나를 마치 친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웠어요. 내 양아버지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나 역시 지금쯤은 당신처럼 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허드슨은, 자살했습니다. 하필이면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에 다녀온 날 밤에 말입니다. 하긴 그가 사실은 죽으려던 게 아니라, 그저 전직 베테랑 군인으로서의 추억에 사로잡혀 총기들을 모두 꺼내놓고 마른 수건으로 닦던 중 우발적 사고가 일어났던 거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지역신문엔 그렇게 났고요. 여하튼, 허드슨 부인은 남편이 죽자 유족연금을 일시불로 수령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홀로 남겨진 나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성인이 되어 그곳을 나온 뒤부턴 이렇게 완전히 혼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겐 톰처럼 굳이 속여야 할 가족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말하려고 이렇게 긴 이야길 또 주절댔나봅니다.  
그럼,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정보기관 깊숙한 곳에 있는 회색 방에서 지독한 악취의 근원을 찾아 헤매던 나의 얘기, 썩어가는 시체가 켜켜이 쌓인 채 저마다의 사연을 중얼거리는 바로 그 철원 평야에서 내가 누군가를 만났던 바로 그 순간으로요. 그 의문의 인물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당신 천리안을 가지고 있나?
나는 무척이나 오래도록 망설인 끝에 결국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너도…… 그런가?
오랜 침묵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반갑다. 이 지구상 어딘가에 나와 같은 능력을 지닌 자가 존재하다니.
순간 나의 가슴은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소릴 들으면 들을수록, 아니, 그가 보내는 텔레파시를 느끼면 느낄수록, 뭐라 말할 수 없는 친밀감이 밀물처럼 밀려왔으니까요. 그건 거의 애정에 가까운 것이었고, 후천적으로 얻은 게 아니라 생래적으로 타고난 듯한 강렬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워싱턴에 있어. 물론 그 장소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사정상 밝힐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런데 너는 어디 있는 거지? 나와 가까운 곳에 있나?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쪽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 그런 적막이 그와 나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지요.
―이봐, 아직 거기 있는 거야?
나는 불안해져서 물었습니다. 아아, 담배라도 있다면.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능력 요원이 된 후, 정보기관은 술과 담배를 제한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뇌의 중추신경에 작용하여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방해가 된다면서요. 하지만 그 순간 난 마치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불안해졌고, 그래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찾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간이침대의 머리맡에 놓인 조그만 서랍장을 거칠게 열었을 때, 그 안은 텅 비어 있었어요. 숨겨놨던 담배를 톰이 모두 치워버린 겁니다. 이런 제길. 난 욕을 했습니다. 내일 아침 가만두나 보자, 톰! 속으로 외치는데, 갑자기 상대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안타깝게도 우린 서로 적이야. 너와 대화를 계속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군.
나는 그 소릴 또 놓칠세라 허둥지둥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적이라니? 대체 넌 누구지? 어디에 있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 모든 게 통할 것만 같은 사람을 만났는데, 만약 그가 정말 나의 적이라면, 그래서 더는 어떤 대화도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 아닙니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내 입술은 바짝바짝 말랐고 심장은 미칠 듯이 두근댔습니다. 
―난 모스크바에 있어. 알겠나? 물론 더 자세한 위치는 말할 수 없고 말이야.
순간 나는 깊은 탄식을 내뱉었습니다. 우리가 결코 가까워져선 안 되는 사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는 악의 제국의 시민이었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지구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협하는, 그런 세력의 일원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