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



9. 미스터 엑스가 동생과 헤어지게 된 이유를 들려주며 한 남자의 내면이 세계정세에 끼친 영향을 설파하다


어느덧 창밖엔 해가 지기 시작했다. 엑스의 얼굴에도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워졌고, 그래선지 그는 더더욱 선지자처럼 보였다. 황금빛 저녁 햇살이 그의 머리를 후광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모든 상황에 어울리게 자애로운 미소까지 띤 엑스가, 자장가를 부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와 동생을 한몸으로 만들어버린 그 버섯구름은, 다른 수많은 이들의 운명도 바꿔놓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운명이 뒤바뀌어버린 사람 중에 무척이나 감수성이 예민한 한 남자가 있었지요.

아니,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어느 유명한 휴양지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흑해 연안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라는 멋진 도시로 말입니다. 그곳은 오래된 휴양도시답게, 언제나 따뜻한 바람이 불고 부드럽게 찰싹이는 파도 소리가 지나는 여행객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주는 곳입니다. 자, 눈을 감아보세요. 수평선으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이 느껴지십니까? 짭조름한 바다 내음은 또 어떻고요. 이런,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십시오. 갈매기들이 푸른 창공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바닷가에만 머물다 그곳을 떠난다면, 당신들은 얄타의 숨은 보석을 놓치는 셈이 됩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도시 곳곳에 숨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젠 해안을 떠나 시내로 들어가봅시다. 즐겁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거리를 걷던 여러분은, 어느 순간 소박하면서도 구석구석 멋들어진 장식이 아기자기한 사랑스러운 건물 앞에서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될 텐데요. 아마도, 거기가 제정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여름 별장이었던 리바디아 궁전이라는 걸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겁니다.

글쎄요, 솔직히 니콜라이가 거기서 얼마나 자주 휴가를 즐겼는지……난 거기까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천리안을 지녔다고 해서 과거 모든 일을 시시콜콜히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우린 현재, 지금-여기와 관련된 사항만을 선별적으로 알아낼 뿐이지요. 어쨌거나,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단 하나예요. 크림반도의 그 아름다운 여름 별장을 정말로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정도?

어디 보자, 그는…… 몇 년도였더라, 하여간, 20세기가 채 밝아오기 얼마 전, 흑해 인근 그루지야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알코올중독자 구두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기 이름을 이오시프라 지었고, 제발 그가 남편을 닮지 않기만을 두 손 모아 기도했다지요. 하긴 주정뱅이 남편을 닮은 아들이 태어나길 바라는 여성이 세상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녀의 기도는 남들보다 훨씬 더 크고 깊고 간절했던 모양입니다. 어린 이오시프가 결국 어머니의 뜻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한 걸 보면 말입니다. 소년은 공부를 열심히 했고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러시아정교회 신부가 될 수 있는 상급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만약 그 아이가 정말로 정교회 신부가 되었다면? 그럼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혹시 20세기 세상의 절반은 성스러운 이콘과 러시아정교회 십자가로 뒤덮이게 됐을까요……? 여하튼 간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련 전체를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 채운 그 남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어린 시절엔 지역신문에 열심히 시를 써서 발표하던 문학 소년이었다는 걸 아는 이는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취향이 나중에, 그러니까 1945년의 세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쳤는지 알고 있는 이 역시 거의 없을 테지요. 무엇보다도, 날카로운 눈매에 작은 체구를 가진데다 열두 살 때 시장에서 당한 마차 사고로 왼쪽 팔을 영원히 못 쓰게 된 그 남자가, 소년 시절 어느 날 당대 최고의 작가였던 안톤 체호프와 해후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심안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는 나, 엑스를 제외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건 아닙니다. 그저 체호프가 소년 이오시프에게 짧은 편지 한 장을 전해준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 사연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는데……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므로 잘 들어주길 바랍니다.  

이오시프가 저잣거리에서 아름다운 그루지야 처녀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진 건, 그의 나이 대략 열대여섯 살 무렵의 일입니다. 뭐라고요? 그렇지 않다고요? 이오시프 스탈린의 그 어떤 전기傳記에도 그런 에피소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래요, 당신들의 견해가 맞을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세상엔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사람과 그가 살았던 시대만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학자들이 수없이 많고, 그런 이들이 적어내려간 전기엔 오직 사실만이 담겨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그들이 쓴 책의 글자와 글자 사이, 행과 행 사이, 혹은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 아무런 비밀도 숨겨져 있지 않다고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난, 그렇지 않다고 봐요. 비밀이 없는 전기라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비밀이 없는 전기란, 비밀이 없는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고 비현실적이며 거짓이자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비밀―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거나 혹은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 비밀들―을 알아내는 일은 나 같은 사람들의 의무이자 책임이 됩니다. 우린 세상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따라서, 이제부터 내가 들려줄 이야기는 백 퍼센트 진실에 가깝습니다. 소년 이오시프가 한 처녀에게 반해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 시는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경이로움을 낭만적으로 읊은 구식 소네트였다는 것 말입니다. 실은, 그 역시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이 우선이라는 교육을 받은 세대에 속하고,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시 말미엔 우울하고 기분 나쁜 클리셰를 덧붙여야 했지만 말이에요.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식으로요.


분홍색 꽃 피더니/연한 푸른빛 제비꽃이 되네/부드러운 산들바람에/계곡의 백합 풀 위로 눕고/짙푸른 창공에서 종달새 노래하며/하늘 높이 날고/목청 고운 나이팅게일/덤불에서 아이들에게 노래하네/꽃이여! 아 나의 그루지야여/평화가 내 조국에 퍼지기를/친구여 노력하세/국가를 빛내자.*


그의 시는, 티플리스 지역 문인회에서 꽤 호평을 받았습니다. (사족이지만, 티플리스는 그루지야의 수도였던 트빌리시의 옛 이름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오시프가 다니던 신학교도 이 도시 어딘가에 있었고요.) 게다가, 휴양지인 얄타로 가는 길에 티플리스 시내 여관에 잠시 묵으며 쉬고 있던 당대 최고의 작가에게 소개되는 행운까지 누렸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시내 중심가 약방 옆 조그만 여관에 머물던 그 위대한 작가가 누구일지는 이제 충분히 짐작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는 바로 안톤 체호프였습니다. 체호프는 이십대부터 앓아온 폐결핵 때문에 자주 바닷가로 휴양을 떠났는데,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로 얄타를 향하는 길이었지요. 교외의 작은 음식점에서 생선 수프를 먹고 들어와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다보며 다음 소설을 구상하던 그는,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생각에서 깨어났습니다. 

‘누구십니까?’

작가가 묻자, 문 뒤에서 여관 주인이 공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기자가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며 기다리는데, 어떻게 할까요?’

체호프는 잠깐 망설였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시골 신문사 기자를 만나고 싶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고, 문을 열며 말했습니다.

‘올라오라고 하십시오. 모름지기 진정한 문학가란 모든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티플리스 일보’라는 작은 신문사의 문예 담당 기자였습니다. 그는 최고의 작가가 인터뷰를 허락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고, 그후 둘은 약 삼십 분 정도 뻔한 이야기(체호프의 작품세계, 티플리스에 들른 이유, 앞으로의 작품 구상 등등에 대해서 말입니다)를 나누었습니다. 열심히 그 모든 대화를 받아 적고 난 뒤,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기자가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었지요. 그는 메고 온 가죽 가방을 뒤지더니 짧은 시가 담긴 원고 몇 장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이 시는 요즘 여기서 꽤 찬사를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소년이 쓴 거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조국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눈치 없는 기자가 내놓은 게 바로 이오시프 주가시빌리, 장차 이오시프 스탈린이라고 불릴 소년의 시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때 체호프는 모든 게 귀찮았고 그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몸이 아파 어디론가 휴양을 떠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시골 기자의 표정은 순수했고 안톤은 그 눈초리를 거절할 핑계를 찾을 수 없었지요. 결국 그는 종이를 건네받아 건성으로 빠르게 훑어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원고 마지막 장 구석에 다음과 같이 판에 박힌 격려의 말 한 줄을 손수 적어 돌려줬던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언젠가 시인으로 대성할 기미가 다분하군요. 건필하시기를.’ 

며칠 후, 그 문예 담당 기자는 이오시프에게 ‘유명 작가, 마을 출신 문학 소년의 시를 극찬하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린 신문 한 부를 보내줬습니다. 그 사이엔 안톤 체호프의 친필 격려 문구가 적힌 원고지도 같이 끼워져 있었지요. 소년은, 두근대는 심장을 겨우 억누르며 신문을 받아들었고, 언젠가 대시인이 될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운명이란 결코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모든 건 뜻대로 되지 않기 일쑤이고, 툭하면 상상조차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지요. 그건 이오시프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왜냐하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자기가 ‘위대한 시인’ 대신 ‘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이라는 혐오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그는 자신의 별명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그 역시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거짓으로 누덕누덕 기워진 자기 삶을 진실이라고 믿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가장 사악한 인간에게조차도 언젠가 한 번쯤은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 게 인생이듯(그나저나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군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어쨌든, 그 출처는 나중에 찾아보기로 하고요), 그루지야 출신의 인간 백정에게도 그런 은총의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그가 자신의 자작시를 읽으며 감상에 빠져드는 순간이었는데요. 우크라이나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굶어죽어가고 있을 때, 이오시프는 두꺼운 커튼이 쳐진 조용한 방에 들어앉아 어린 시절의 시를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엔, 자신의 풍부하고 여린 감성을 이해하고 북돋아줬던 오래전의 유명 작가를 떠올리며 금단의 책을 서랍에서 꺼냈던 거지요. 그는 책을 만지작거리기도 했고 품에 안아보기도 했으며 그렇게 한동안 감정에 북받쳐 있다가 드디어 천천히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를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오시프는 거기에 적색 잉크로 꼼꼼하게 밑줄을 그어두기까지 했습니다. ‘바닷가 거리에 새로운 얼굴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그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만 달싹거리며 소설을 읽었고,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땐 조용히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습니다.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진짜 삶이 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인지, 아니면 설레는 눈빛으로 시를 쓰던 티플리스의 문학 소년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함을 느꼈는데, 아마도 그 의문은 죽는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았겠지요……

여하튼, 이것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굳이 얄타에 별장을 마련한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의 배경인 아름다운 휴양도시에서 아주 잠시라도 티플리스의 문학 소년으로 되돌아가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그는 ‘뭐, 안 될 것도 없잖아?’라고 스스로에게 반문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존재가 되어 있었기에, 제정러시아의 황제가 쓰던 여름 궁전도 원한다면 모두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하여 그는 그 별장을 소박하고 시원하게 장식했고, 거기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없는지 내다보며 기나긴 여름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럴 때 이오시프의 옆모습이 어찌나 진지해 보였는지, 그의 전속 초상화가는 창가에 앉은 서기장의 얼굴을 그린 다음, 배경만 코뮌 회의장으로 바꿔 소련 전역의 관청으로 보냈을 정도였지요. 

뭐라고요? 그래요,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는 걸 나도 압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전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까지도, 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이 길고 장황한 사연들 대신, 그저 이렇게만 말하는 게 나았던 걸지도 모르지요. ‘1945년 2월,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얄타에서 회담을 하였다. 루스벨트는 당시 몸이 좋지 않았기에 지중해 연안의 따뜻한 장소에서 만나기를 원했으나, 스탈린이 끝까지 고집을 피웠다. 그는 얄타에 있는 자신의 여름 별장이 아니라면 회담을 보이콧하겠다고 했고, 결국 루스벨트는 아직은 추운 흑해의 바람을 맞으며 크림반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진 나머지, 회담이 끝난 두 달 후 죽고 말았다. 어쨌거나 얄타회담은 그후의 세계정세에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 세 파워맨이 나눈 대화의 주제 중 하나가 한반도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린 때로 자잘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 숨겨진 진짜 생활에 대한 기록들이니까요. 그리고 나는 당신들에게 바로 그런 비밀들을 들려주고 싶었던 겁니다. 내가 심안으로 알아낸 비밀들. 왜 이오시프는 그렇게도 얄타의 별장을 아꼈는지, 겨울 흑해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방문을 꺼리는 루스벨트를 뭐하러 굳이 그곳으로 초대했는지, 나중에 검은 버섯구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왜 그리도 공포에 떨었는지에 대한 내밀한 사연 말입니다. 

어쨌든, 결국 독일은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고 일본도 거대한 버섯구름 속에서 패망의 길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어느 오후, 이오시프는 두꺼운 휘장으로 가려진 자기 방에서 혼자 여행 가방을 꾸리고 있었지요. 어느 정도 일도 정리됐고 여름도 다가오고 있었으니 잠깐쯤은 휴식을 취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얄타의 별장을 떠올리며 휘파람을 불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베리야였습니다. 아시죠, 그 악명 높은 라브렌티 베리야. 소련의 비밀 첩보기관을 한 손에 쥐고 흔들며 수많은 사람을 골로 보내버린 그 베리야 말입니다. 그는 손에 한 장의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거기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피어난 버섯구름의 위력을 보여주는 몇 장의 항공사진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오래전부터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 심어놓은 스파이들이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정보를 통하여 맨하탄 계획의 진전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며, 소련 최고의 물리학자들을 동원하여 핵폭탄을 제조하는 연구에 몰두해오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리야가 가져온 보고서에 첨부된 검고 거대한 버섯구름 사진은, 이오시프의 내면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선 꼭꼭 숨겨왔던 ‘티플리스의 문학 소년’이 불쑥 튀어나온 것도 그 순간이었지요. 그 소년―‘강철(스탈린)’이라는 필명 뒤에 가려져 있던 여린 감성의 소유자였는데요―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도시 하나를 날려버린 무시무시한 무기를 먼저 손에 넣은 미국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마저 언젠가는 그 커다란 버섯구름 속에서 한낱 먼지로 화해 어디론가 날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으니까요. 

그때 베리야가 낮게 속삭였습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합니다. 핵무기를 완성하여 저들에 대응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적들에게 최대한 부드러운 시그널을 보내십시오.’ 

그는 겁에 질린 서기장에게 계속하여 속삭였습니다. 

‘마침 여기 아주 좋은 소재가 하나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신문이었습니다. 

‘뉴욕 데일리?’ 

이오시프가 시큰둥하게 반문하자 베리야가 웃었습니다. 

‘서기장님, 이 기사를 한번 보시지요.’ 

친절하게도 그는 영어를 읽지 못하는 서기장을 위하여 번역본까지 준비해 왔는데, 거기엔 극동아시아에 있는 어떤 나라의 소식 하나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쌍둥이들을 잘 보십시오. 거기에 바로 해답이 있으니까요!’ 

이오시프가 보니, 뿌연 흑백사진 속에선 각각 팔과 다리가 불구인 한국의 쌍둥이 아기 둘이 무엇이 그리 슬픈지 악을 쓰며 울고 있지 뭡니까. 

그래요! 여러분이 바로 맞히셨어요. 그애들은 바로 나와 내 동생이었습니다. 존 깁슨 기자가 펑, 하고 조명을 터뜨리며 사진을 찍어간 우리 형제 말입니다. 여하튼 베리야는 계속해서 이오시프에게 귓속말을 하였습니다. 

‘서기장님, 제게 아이디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도 이 병원으로 전갈을 보내는 거지요. 두 아이 중 하나를 모스크바 최고의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를 해주고 재활훈련까지 마치도록 배려하겠다고 말입니다. 즉 쌍둥이 중 한 아이는 워싱턴에서, 또 한 아이는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한 뒤 한반도에서 다시 만나는 이벤트를 벌이자는 건데요, 어떻습니까?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장면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저들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이는 동안 우린 서둘러 무기를 완성하는 겁니다.’

이오시프는 한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테이블에 내려놨습니다. 그러고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지요.

‘놈들이 받아들일까? 우리 제안을?’

그러자 베리야는 씩 웃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소위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자들 중에 그런 멋진 이벤트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마침내 이오시프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좋아. 그 쌍둥이 중 하나를 이리로 데려오도록 하자고.’ 

그런 다음 그는 다시 여행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얄타에서의 휴가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떠들던 엑스가 문득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목소릴 높여 외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얘길 하면서도 난 당신들이 내 말을 쉽게 믿지 못하리란 걸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교수님은 그런 사실을 어디서 알았냐고 반문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으시겠죠? 그리고 앤드루 군, 당신도 의구심을 잔뜩 품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군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즉 내겐 이 모든 이야기들의 ‘출처’가 확보되어 있으며 지금 당장이라도 여러분께 그것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그놈의 빌어먹을 ‘출처’ 말입니다. 하긴,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출처만 확실하다면 그 어떤 허구라도 믿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요. 여기 계신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러니 여기, 출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들려준 얘기들의 출처 말이에요. 자, 보세요, 보라니까요!”

그러면서 엑스는 옆에 놔두었던 검은 가방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는데, 퍼뜩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힌 게 그때였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오래전 어느 때던가―혹은 먼 미래의 어느 순간일지도 모르지만―나는 분명 지금과 똑같은 장면 속에 앉아 있었다. 그때도 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받아 적기 위해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지 않았던가. 따라서 나는, 잠시 후 저 남자가 가방에서 종이 두어 장을 꺼내 진지한 얼굴로 건네주리라는 사실마저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행동은 모든 이야기꾼들의 전형적인 습관 아닌가. 낡고 오래된 책장이나 서랍, 가방, 상자 같은 걸 뒤져서 자기 이야기의 ‘출처’를 찾아 건네주는 행위. 미스터 엑스가 곧 내밀 종이 역시 어떤 오래된 신문이나 보고서의 사본, 혹은 빛바랜 사진 따위에 그치겠지만, 그것들 모두가 그의 이야기에 진실이라는 무게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세상이란 그런 식으로 희미하게 출처를 획득한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이퍼텍스트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보게, 앤드루!”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존 휠러 교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많이 피곤한가보군. 어떤가,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는 게? 이제 저녁이 되었고 이분도 숙소로 돌아가 쉬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습니까, 미스터 엑스?”

그러나 교수의 말에 엑스는 울상을 지었다.

“아니,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잖아요. 게다가 오늘은 왠지 이야기를 좀더 하고 싶네요. 나의 기억이라는 게 워낙에 들쭉날쭉해서 말이지요. 오늘은 모두 떠오르는 과거의 일들이, 내일이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혹은, 오늘과 내일 떠오르는 기억들이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경우도 있고요(하긴, 이런 현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내다보는 나와 같은 초능력자들에겐 흔한 일이지만 말이에요). 여하튼, 중요한 건, 결국 오늘 말하고 있는 ‘나’와 내일 말하게 될 ‘나’는 당신들에겐 서로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에요. 좀더 쉽게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즉, 만약 인간이 자기가 지나온 과거 시간들의 총합이라면, 오늘 내게 떠오른 시간들이 내일 나에게 떠오를 시간들과 완전히 다를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요. 

말도 안 된다고요? 그러지 말고 생각해보십시오. 교수님, 당신은 정말로 지금의 당신이 어제와 똑같은 과거, 똑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고 확신합니까? 앤드루 군, 당신은 또 어떻고요? 나는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요. 당신들은 결코 어제의 당신들과 동일하지 않다고요. 왜냐하면,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털어놓은 기나긴 이야기들이 이미 당신들의 과거를 변형시켜버렸으니까요! 내가 들려준 얘기들은 공기의 파동이 되어 당신네 청각신경을 자극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신호들은 뇌의 뉴런을 타고 흘러들어갔습니다. 머릿속에서 수십억 개의 뉴런들은 새로 들어온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여 어딘가 적당한 구역으로 보내 저장하겠지요. 그런데 그 모든 과정에서, 먼저 저장돼 있던 정보들―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뭔가를 말합니다―이 과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을까요? 잘 아시겠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늘 내 얘기로 인하여 당신들의 머릿속에선 분명 어떤 기억들이 새로이 생성되었으며, 어떤 기억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고, 또 어떤 기억들은 미묘한 변화를 겪으며 변형되고 말았겠지요. 자, 한번 생각해보세요, 교수님, 그리고 앤드루 군. 오늘 나의 이야길 듣기 전까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기억들 중 일부가, 이젠 당신들 내부에서 불확실한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진 않았는지 말이에요.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뉴런에도 알게 모르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덕분에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고, 같은 이치로, 내일의 나는 당연히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만 괜찮다면, 나는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어요. 오늘의 기억은 오늘 완성하고 홀가분하게 잠자리에 들고 싶다, 이 말입니다.”

교수는 난감한 얼굴로 시계를 봤다. 그러더니 나를 한번 쳐다봤고,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마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먼저 피자라도 주문하는 게 어떨까요? 배가 출출하군요. 그리고 시원한 콜라도 마시도록 합시다. 앤드루, 책상 옆에 보면 전화번호가 적혀 있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게 되었다. 엑스는 내가 학교 앞 피자 가게에 전화를 걸려고 하자 재빨리 외쳤다.

“나는 콤비네이션 피자로 주문해주세요. 그리고 콜라는 반드시 펩시여야 하고요. 코카콜라에 대해선 좀 안 좋은 소문이 있는데―내가 소속되어 있는 정보기관에서 들은 일급비밀 같은 거랍니다―그건 나중에 따로 귀띔해드리죠. 아, 그리고 피클 추가해주시고, 핫소스와 파르메산 치즈도 잊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교수는 아무거나 먹겠다고 했으며, 그래서 우린 토핑을 전혀 얹지 않은 치즈피자를 주문하기로 했다. 


피자 치즈의 기름이 잔뜩 묻은 손으로 엑스가 우리에게 건넨 것은, 예상대로 몇 장의 종이였다. 

“이게 바로 내 이야기의 출처입니다. 정확히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가 준 신문 사본의 글자는 한 자도 읽을 수 없는 기묘한 언어였다. 존 휠러에게 그 종이를 내밀자, 교수가 중얼거렸다. 

“이건 러시아어로군. 자네 러시아어를 모르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엑스가 다시 그 사본, 그러니까 자기 이야기의 ‘출처’를 받아들었다. 

“그렇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러시아어입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소련 내에선 발행부수 1위를 달리는 매우 인지도 높은 신문인데 말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를 일종의 황색 언론으로 폄훼하기도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 비과학적인 사건, 초자연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소문들을 주로 싣는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하지만, 확인된 사실과 확인되지 않은 사실 사이에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또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 당신들은 그 차이를 알고 있는지요? 안다면, 누구 한 분이라도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주시겠어요? (여기서, 그는 허리에 손을 짚고 나와 교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둘 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제야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이더니 더욱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소련 정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뛰어난 매체였어요. 처음으로 제정된 레닌공로훈장의 첫번째 수훈자였거든요.”

엑스가 건넨 것은, 1947년 *월 *일에 발행된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한 면을 복사한 종이였다. 사본 맨 위 왼쪽 구석엔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장식된 뜻 모를 신문 제목(Комсомольская правда라는 글자였다)이 있었고, 그 옆엔 낫과 망치가 교차된 로고가 보였다.

엑스의 말마따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한때 소련의 대표적인 일간지였고, 발행부수 또한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가 그때 중요한 사실 하나를 착각하고 있었음을 여기 밝혀야겠다. 그는, 진짜 공산당 기관지였던 ‘프라우다’와 14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던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를 혼동했던 거다. 엑스가 말한 레닌공로훈장 역시 프라우다에 수여된 것이었으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21세기에 이르러, 그 찬란하던 공산당 기관지는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쇠퇴하고 말았다. 회고록을 집필하며, 나는 프라우다지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다. 놀랍게도 그날의 접속자 수는 겨우 763명에 불과했다. 칠백육십삼. 속으로 그 의미 없는 숫자를 중얼거리다 말고, 난 홈페이지를 닫았다. 엑스는 과연 이 모든 걸 내다볼 수 있었을까? 하긴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이르쿠츠크의 설인雪人을 다루던 황색신문도, 인류와 세계를 뒤바꾸려던 혁명지도 결국엔 쇠퇴와 몰락으로 함께 걸어가리란 사실을 말이다.  

미안하다. 회고록을 쓰다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생각의 곁가지들이 비 온 뒤 버섯 자라듯 빠르게 뻗어나가기 일쑤다. 방금도 그러했다. 굳이 쇠락한 제국의 기관지 홈페이지에 들어가볼 필요는 없었는데. 그럼에도 난 이상한 회한에 젖어 노트북을 열었고, 여전히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뒤덮인 프라우다의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옆에 있는 ‘번역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 궁금하지도 않은 러시아 공산당의 동향을 대충 훑어보다 말고, 이번엔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의 영문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화면엔 대문짝만한 비행접시의 사진이 실려 있고, 금년 모월 모일 시베리아 상공에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흥미진진하게 서술돼 있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여전하군. 이 신문은.’

어쨌든 그날 존 휠러는 엑스에게서 받은 신문 사본을 주의깊게 살폈다. 마치 러시아어를 전혀 모를지라도 그저 사본을 오래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한참 뒤 교수가 종이를 도로 내놓으며 한 말은 간단했다. 

“암만 봐도 모르겠군. 어쨌든, 이걸 복사해두도록 하지. 나중에 러시아어를 아는 사람에게 번역을 부탁해볼까 하네. 그래도 되겠습니까, 미스터 엑스? 우리가 이걸 복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지요?” 

그때 나는 교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엑스가 가져온 종이들을 모두 두 장씩 복사했다. 그런 다음 한 장은 교수의 파일에 끼워두고, 나머지 한 장은 여러 번 접어서 바지 주머니에 황급히 쑤셔넣었던 것이다. 

엑스와의 인터뷰 및 테스트가 종결된 뒤, 난 집에 돌아와 그 흐릿한 사본의 사본들을 순서대로 정리했고, 검은색 파일에 넣은 뒤 제목을 달아뒀다. 사실 파일의 제목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곧 그 검고 두꺼운 표지의 파일에 꼭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 내게 영감처럼 떠올랐음을 고백해야겠다. 서랍을 뒤져 검은색 매직을 꺼낸 다음, 난 하얀 종이에 ‘천리안 브라더스’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오려 파일에 붙였고, 책상 맨 아래 서랍에 집어넣은 뒤 열쇠를 돌렸다. 사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너무나 뻔해서 여기에 굳이 적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짐작했다시피, 나는 그 열쇠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열쇠 수리공을 불러 그 서랍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난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었다. 적어도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루지야 트빌리시에 있는 스탈린 박물관에 걸려 있는 시. 제목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