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잠깐만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엑스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인가요? 자신이 샴쌍둥이였다든가 오래전 분리된 동생과 영영 이별한 상태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에요. 아니, 그보다도 몰로디노프는 어디서 이 사진을 구한 거죠? 둘은 무슨 관계인가요?”

“성격이 급하군. 자, 들어보라고. 이제부터 알아내야 할 게 바로 그거니까. 우린 엑스의 초능력 테스트를 진행하는 동시에 그가 하는 말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해. 녹음기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 녹음한 자료를 정보기관으로 보내면, 거기서 이야기의 개연성을 연구하여 그것이 얼마나 사실에 근접해 있는지를 분석할 거야.”

“그럼, 와이의 사진을 엑스에게 보여주는 건 어떨까요? 그가 동생에 대해 말해줄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내 말에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야. 정보기관은 아직 엑스를 신뢰하지 않고 있거든. 진짜 초능력자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중요한 정보를 함부로 누설할 순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우린 몰로디노프 자체를 백 퍼센트 믿지 못하고 있어. 그는 뛰어난 과학자지만 동시에 베일에 싸인 사람이니까. 게다가 몰로디노프가 한 말은 또 어떻고. 그는 우리에게 모스크바의 초능력자들이 뭘 하고 있는지 자세히도 말해줬어. 그들은 천리안을 이용해서 적국의 비밀 기지를 탐지하고 염력으로 그것을 파괴하는 훈련을 매일같이 하고 있다더군. 또 그들 중엔 사람의 생각을 읽어내는 자가 있는데, 그는 수시로 각국 지도자들의 머릿속에 대체 무엇이 들었는지 엿본다는 거야. 몰로디노프의 얘기론, 이 분야는 이미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사실 그의 말을 다 믿기가 좀 힘든 게…… 그렇게 해서 엿본 지도자들의 머릿속엔 별다른 게 하나도 없고 그저 텅 비어 있더라는 둥, 그런 이상한 소리나 해대니 말일세. 

여하튼, 망명한 직후부터 그는 우리에게 충고했어. 조만간 소비에트가 공들여 양성한 초능력 부대의 역습이 시작될 테니 최대한 빨리 대비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일세. 그렇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덥석 믿을 수 있겠나?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초능력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비웃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야. 무엇보다도 소련은 철저한 유물론자들의 나라야. 그들은 그 어떤 유사 과학이나 신비주의도 결코 인정하지 않아. 그런 곳에서 초능력자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들고 훈련까지 시키고 있다니, 도대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겠냐고. 안 그런가? 하지만 그때 몰로디노프가 회심의 한 방을 날렸어. 그의 이야기를 입증할 만한 굉장한 자료였지!”

소련에서 망명한 뇌신경과학자는 한 장의 사진을 내놓았다. 가로 19센티미터에 세로 27센티미터 정도 크기의 흑백사진에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장소를 배경으로 둥근 돔 같은 것이 여러 개 찍혀 있었다.

“그건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핵 센터를 하늘에서 조감한 사진이었네. 정부에서 극비리에 여러 가지 핵무기의 개발을 진행하고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만든 곳이었지. 처음에 우린 그걸 보고, 소련의 인공위성이 찍은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리 극비리에 건설했어도 고성능 위성으로 뒤지면 못 찾아낼 것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화학연구소에서 사진을 분석한 뒤 결과를 보내줬을 땐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그 사진이 만들어진 방식이 문제였던 거야. 그건 보통 사진처럼 인화지 위에 인화된 것이 아니었어. 평범한 16절 갱지의 분자구조를 직접 변형시키는 방식으로 새겨진 일종의 인장이었던 거지. 그리고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그건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이거든! 경악에 빠진 우리 앞에서 몰로디노프는 비웃듯 말했어. ‘이제 믿겠습니까? 그건 투시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네바다의 비밀 기지를 찾아낸 뒤, 그 광경을 오직 생각만으로 종이에 찍어낸 거란 말입니다. 지금 소련의 초능력 무기 기술은 이 정도에 달하고 있어요.’

정보국 관계자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네. 소련이 단지 ‘생각’만을 이용해 미국 본토를, 아니 더 나아가서는 세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게 시간문제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우리도 그들에 대항해 초능력 요원을 양성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건, 필연이었지.”  

하지만 초능력 요원을 발탁하는 일은 그리 녹록지가 않았다.

“초능력자를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물론 정부가 하는 일이라고 밝히진 않았어. 플로리다의 작은 방송국에서 래리 킹이란 사람이 하는 쇼에 출연할 거라고 위장했지), 그야말로 세상의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들었거든. 사기꾼, 거짓말쟁이, 마술사, 미치광이들이 우글우글했지. 거기서 우린 진짜 초능력자와 그렇지 않은 인간들을 구분해 걸러내야 했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서둘러야 했고, 과학자들로 구성된 검증위원회 위원들은 밤잠도 자지 못하고 미친듯이 일했다네.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샌드위치를 한 손에 든 채 우적우적 씹으며 자칭 초능력자라는 자들을 면담했지. 하지만, 이참에 한몫 챙기려는 인간들은 끝없이 꾸역꾸역 몰려왔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떠나버린 과학자들이 수두룩했어. 어이없는 건,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이 기초적인 초능력 테스트조차 통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야.”

교수가 말해준 1단계 실험은 다음과 같았다. 초능력자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검증위원이 세 장의 카드를 무작위로 고른 다음, 눈을 가린 초능력자에게 거기 적힌 숫자를 읽게 하는 것이다.

“만약 세 장 중 두 장을 정확히 읽으면 1단계는 통과였지. 그런데 처음엔 지원자 전원이 세 장의 카드를 모두 읽는 기적이 일어난 거야! 우린 너무나 놀랐어. 세상에 이렇게 초능력자가 많다니, 뭔가 이상하잖아. 실험이 잘못된 건 아닌가 싶어 그들이 사용한 안대를 직접 착용하고 카드를 읽어본 과학자까지 있었다네. 하지만 안대엔 아무 문제도 없었어. 나도 그걸 써봤는데, 눈앞은 온통 암흑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더라고. 결국, 1단계를 통과한 자들과 심층면접을 하기로 했지.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어떻게 카드에 적힌 숫자를 읽느냐는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어. 어떤 자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카드를 만지기만 해도 거기 적힌 숫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하더군. 또다른 이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외부의 상황이 이미지가 되어 저절로 마음에 떠오른다는 거야. 자기 눈에선 엑스선이 나오기 때문에 안대로 가려도 뭐든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 여하튼, 그들이 어떤 식으로 보든 간에, 그건 대단한 사실이었네. 지금까지의 물리학 이론을 모두 수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부산을 떠는 성급한 과학자들까지 있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나 역시 밤잠을 설칠 정도로 혼란스러웠어. 그들의 초능력이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걸 두 눈으로 봤으니 말일세. 그때 우리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네. 아마 자네도 익히 들어서 아는 사람일 거야.”

혼란에 빠진 과학자 그룹에 도움을 주겠다며 나타난 이는 바로 마술사 제임스 랜디였다. 그 유명한 ‘어메이징 랜디’ 말이다. 

“랜디는 그들이 속임수를 쓰는지 아닌지 단번에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했네. 그리고 결과는 그야말로 놀라웠지.”

제임스 랜디는 1차 테스트를 통과한 자들이 모두 사기꾼이거나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고 한다.

“그들은 ‘코 틈으로 훔쳐보기’라는 오래된 기술을 사용했던 거였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랜디는 자기 눈을 안대로 가려보라는 거야. 우린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시꺼먼 안대를 하나 구해다가 그 유명한 마술사의 눈을 가렸네. 그런 다음 그 앞에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 인쇄된 신문 한 장을 갖다놨지. 놀랍게도, 랜디는 거기 적힌 기사를 줄줄 읽어내지 뭔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하여 서 있을 때, 어메이징 랜디가 껄껄 웃으며 안대를 내려놓았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여러분? 이 정도 기술은 마술사들의 세계에선 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트릭에 해당하지요. 지금 여기 계신 고명한 과학자분들도 마음만 먹으면 한 달 안에 나와 똑같은 초능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저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열심히 연습만 하면 되지요.” 

그러면서 그는 안대를 위원회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여길 보세요. 아무리 두꺼운 특수 안대로 눈을 가린다 해도, 코 밑으론 좁은 틈이 생기거든요. 따라서 눈동자를 잘 굴리는 기술만 터득한다면 누구나 그 틈으로 비치는 카드의 숫자를 읽어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누군가가 진짜 투시력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하려면, 테스트 방법은 내가 정하게 해주십시오. 오직 나와 같은 숙련된 마술사만이 그자들이 속임수를 쓰는지 아닌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장담하건대, 내가 고안한 방식으로 테스트한다면 전원이 탈락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 겁니다. 뭐, 내기를 걸어도 좋아요.” 

결국 어메이징 랜디가 설계한 특수 안대가 제작됐고, 초능력자들은 다시 한번 테스트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엔 불만을 늘어놓았고, 새로운 안대가 피부에 알레르기를 일으키거나 호흡을 곤란하게 한다는 이유 등으로 착용을 거부했다. 

“아예 재실험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속출했네. 그들은 엄청나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짐을 꾸렸어. 이건 신성한 능력에 대한 모욕이라며 화를 냈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위원회에 저주를 퍼붓겠다는 협박을 하기까지 했지. 결국 지원자는 원래 수의 약 십분의 일만 남았고, 그들은 새로 만든 안대로 눈을 가린 채 카드의 숫자를 읽기 시작했네. 그리고 결과는, 그야말로 어메이징했지.”

제임스 랜디의 말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지원자들은 특수 안대를 착용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던 것이다. 

“우린 안도하면서 동시에 실망했어. 어쨌든 물리학 법칙에 어긋나는 초능력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입증됐으니 다행이었지만, 소련에서 개발중이라는 초심리학 무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하면 앞이 막막했으니까 말일세. 그때 몰로디노프가 바로 이 두번째 사진을 보여준 거야. 그는 사진 속 남자가 ‘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소련 최고의 초능력자라고 했어. 그러면서 그가 원래는 샴쌍둥이였고, 형과 분리 수술을 받은 뒤 어떤 기기묘묘한 사연에 의해 헤어지게 되었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늘어놓더군. 그런데 더더욱 기이한 건, 그가 해주는 얘기마다 모두 진실성이 있어 보였고 또 나름의 증거들도 갖춰져 있었다는 거지. 무엇보다도 몰로디노프에겐 소련에서 무의식 조종을 총괄하던 사람답게 위원회를 교묘하게 설득하는 능력이 있었다네. 그는 최신 물리학 이론까지 들먹이며, 와이로부터 얻어낸 정보를 이용해서 쌍둥이의 다른 한쪽이자 또 한 명의 초능력자인 엑스란 자를 찾아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네.”

존 휠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책장을 이리저리 기웃댔다. 그러더니 양장본의 크고 두꺼운 물리학 책 한 권을 꺼내 어딘가를 펼쳤다. 

“여길 보게. 자네도 들어본 적 있을 거야. ‘양자 얽힘’이라는 기괴한 이론에 대해서 말이야. 몰로디노프는 엑스와 와이가 서로 ‘양자 얽힘’과도 같은 관계에 놓여 있다고 했어. 즉,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에 대한 정보가 짝을 이룬 다른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결정하듯(그 둘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말일세. 극단적으론 우주의 양끝에 있는 입자라 해도, 서로 얽힘 관계에 있다면 한쪽의 변화가 곧바로 나머지 다른 한쪽에 반영된다는 게 이 이론의 해괴한 면이지), 와이의 정보가 엑스의 현상태를 결정짓는다는 거야. 그는 위원회에 쪽지 한 장을 건넸네. 거기엔 어떤 주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거기에 가면 자신이 보여준 사진 속 남자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을 테니 무조건 데려오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군.”

“그렇다면, 엑스는 정말로 그렇게 데리고 온 사람인가요? 몰로디노프라는 자가 일러준 시간과 장소에서 그를 찾아냈냐는 뜻이에요. 만약 그렇다면 엑스가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들이닥쳤던 검은 옷의 남자들은 바로……?”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네. 다만 한 가지, 아직 그를 다 믿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 이 모든 게 거대한 사기극일 가능성 말일세. 자, 이 사진 속 남자―소련의 초심리학 무기 개발을 책임지고 있다는―를 잘 보게. 이 눈, 코, 입, 이 기묘한 미소. 모두가 저 옆방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는 엑스와 너무나도 똑같지 않은가. 둘을 동일인이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을 정도야. 그렇다면, 엑스와 와이가 비밀리에 분리 수술을 받은 샴쌍둥이이고 둘 다 뛰어난 초능력자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느니, 차라리 모종의 음모로 인해 한 사람이 쌍둥이인 척 생쇼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게 더 말이 된다는 거지. 안 그런가?”

“그런데 위원회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엑스를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 정도 의심은 충분히 해볼 법도 한데 말이에요.”

내가 묻자, 존 휠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좀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몰로디노프는 뛰어난 심리 조종술을 지닌 자라고. 그는 유창하고도 괴이한 언변으로 위원회를 설득했어.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에겐 인신공격조차 마다하지 않았지. 소련에 대응하는 초심리학 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이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몰아가기까지 했으니까. 결과?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교수는 옆방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기 엑스가 앉아 있는 걸 보면 모르겠나? 결국 초심리학 부대가 급히 만들어졌고, 몰로디노프가 그 총책임자 자리를 맡게 된 거야.”

교수의 말에 의하면, 그 부대의 이름은 ‘제1지구대대’라고 했다. 

“그럼 엑스는 제1지구대대의 일원이군요? 그런데, 이상한 게 있어요. 대체 뭣 때문에 엑스의 초능력을 검증하는 테스트를 하려는 거죠? 이미 초심리학 부대도 만들어졌고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래, 실은 지금부터 하려던 것이 바로 그 얘기였네. 일단, 그전에 엑스에 대해 좀더 알아둬야 할 게 있어. 사실 그는 제1지구대대 내에서도 최고의 힘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일종의 파워맨이라네. 엑스가 천리안을 이용해 찾아내는 정보들이 어찌나 많은지, 수시로 그의 심안에 떠오르는 영상의 내용을 받아 적는 일만 하는 전담 속기사까지 따로 뒀을 정도라니 말 다 했지. 그가 초능력으로 본 영상들 중엔 달의 뒷면도 있고(엑스에 의하면, 달의 뒷면엔 소련의 비밀 기지가 있다고 하네. 그리고 그 기지는 오래전 지구인을 창조했던 초고도 문명의 외계인들이 건설한 뒤 버려두고 간 걸 재활용한 거라고 하고) 중국의 고비사막 지하 삼천 미터 깊이에 건축되었다는 벙커도 있네(그곳은 중국이 앞으로 미국과 핵전쟁을 벌일 때 공산당 지도부가 숨어 있기 위해 만든 은신처라고 하더군). 게다가 그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기이한 정보를 제공했어. 그의 말에 의하면, 북한이 언젠가는 일어날 두번째 전쟁에 대비해 지하에 비밀 루트를 건설중이라는 거야. 그러느라 엄청나게 많은 인민을 동원하여 공사를 벌이고 있지만, 그게 너무나 깊은 땅속에 만들어지고 있어서 아무도 감지할 수 없다는 거지. 그 통로는 맨틀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는데, 그게 말이 안 되는 건 차치하고라도, 정말 수상한 점은 엑스가 터뜨리는 정보들이란 게 죄다 진실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지. 도대체 누가 달의 뒷면이나 고비사막 한가운데, 혹은 한반도의 맨틀 같은 곳을 뒤져볼 수 있겠나? 따라서 그가 매일매일 수시로 알려주는 정보들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정보국조차도 혼란에 빠지고 만 거네.  

결국, 그들은 엑스에 대하여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기로 했다네. 아까 그에겐 그냥 물리학 연구에 필요한 가벼운 테스트를 하는 거라고 해뒀지만, 사실 우린 아주 정교한 검증 툴을 구성해서 그를 평가하는 중이야. 또 시간이 오래 걸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과거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는 것은, 엑스가 스스로에 대하여 얼마나 일관성 있는 진술을 하는지 알아보는 과정이기도 하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까지의 그의 얘긴 거의 허구 수준이라는 게 내 생각이네. 무엇 하나 확인 가능한 거라곤 없고…… 오히려 교묘하게 검증 불가능한 이야기들만 만들어내는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교활한 작자 같은데, 자네는 어떻게 보나?”

나는 교수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원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과거는 언제나 재구성되고, 따라서 한 개인이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린 시절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침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택했다. 

“알겠네.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군. 휴, 안타깝긴 하지만, 분명 검증 툴은 그가 거짓말쟁이라고 판단할 거야. 논리에 근거하여 그의 이야기 속 개연성을 낱낱이 따질 테니까. 그래도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 걸 보면 왠지 짠한 기분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으니까…… 조금만 더 참으며 들어주자고.”

그러다가 존 휠러가 시계를 봤다.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 자, 이젠 돌아가서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듣기로 하세.”


8. 꿈꾸다 깨어난 엑스가 전함 무사시의 침몰에 얽힌 아버지의 비밀을 들려주고, 자신이 미국으로 가게 된 사연을 털어놓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엑스는 의수를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대체 그의 나이는 몇 살이나 됐을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에 자신이 태어났다고 했으니 아직 이십대에 불과할 그의 얼굴은, 그러나 거의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처럼 시간에 찌들어 있었다. 교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남자 앞에 가만히 앉았다. 나도 조용히 기다렸다. 만약 존 휠러의 말대로 검증 툴이 작동하고 있다면, 이 남자가 초능력자 행세를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 그때 무슨 꿈이라도 꿨는지 엑스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와이! 기다려, 와이!”

잘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는 깨어나며 동생을 애절하게 불렀다. 얼핏 보니 볼엔 눈물 자국까지 있었다.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꾼 겁니까?”

그러나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엑스는 곧장 딴청을 피웠다. 그는 잽싸게 옷소매로 눈물을 닦았고, 억지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아뇨, 전혀요! 나는 좀처럼 악몽을 꾸지 않으니까요. 그나저나, 언제부터 와 계셨습니까? 내가 무척 깊이 잠들어 있었나봅니다. 너무 피곤해서 잠시 눈을 감고 쉰다는 게 그만……”

손을 비비며 미안해하는 엑스에게, 난 웃어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도 방금 들어왔으니까요. 저희야말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정말 죄송하군요.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느라고요.”

그제야 엑스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잔뜩 구겨진 코트 아랫단 실밥이 풀려 있었다. 

“그럼, 얘길 마저 해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천리안을 이용하여 아버지가 남긴 수첩의 존재를 알아냈다고 했지요? 그리고 거기엔 당신의 아버지가 어떻게 하여 일본 최대의 전함이었던 무사시호를 침몰시켰는지 적혀 있었고요. 이제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겠습니까?”

교수의 말에, 엑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음, 내가 그렇게 얘기했나요? 우리 아버지가 전함 무사시를 침몰시켰다고요? 뭐,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런 걸 겁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왜냐하면 내가 알아내는 모든 것은 그저 상상이나 꿈, 바람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니까요. 그것은 모두 다 엄연한 진실로서 무라카미 의장의 주머니에 꽂힌 수첩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그 배를 침몰시켰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일본군이 레이테만에서 쫄딱 망해버렸는지 말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들려드려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물은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수첩,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낸 방법, 이런 것들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면서 엑스는 옆에 놔두었던 낡은 가죽가방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엔 구깃구깃한 서류 묶음과 무엇에 쓰려는 건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전선 꾸러미, 고무줄이 칭칭 감겨 있는 구형 트랜지스터라디오, 그리고 몇 봉의 커피믹스, 찌그러진 종이컵 같은 것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중에서 엑스는 호치키스로 한쪽을 찍어둔 종이 몇 장을 끄집어냈다.

“아, 여기 있군요! 찾았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천리안으로 읽어낸 내용입니다.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의 주머니에 삐죽이 솟아 있던 아버지의 수첩 사진에서 말입니다. 자,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잠깐. 그전에 일단 심안으로 뭔가를 알아내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사실 이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닙니다. 타고난 초능력이 있다면 더 빨리 마스터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정신을 집중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다면 사물의 뒤편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지요. 잘 들어보시고, 교수님도, 그리고 앤드루 군도 꼭 한번 시도해보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그날, 병원을 탈출하려고 결심한 직후, 난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어느 조용한 구석을 찾아 숨어들었습니다. 바로 복도 맨 끝에 있는 세탁실이었죠. 그곳 냄새나는 빨래 더미 사이에 앉아 칠리소스 상자를 조심스럽게 연 다음, 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사진 속 무라카미 의장의 주머니를 노려봤던 겁니다.

아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정맥은 터질듯이 부풀어올랐어요. 조금만 더 에너지를 쏟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공포에 사로잡히려는 순간, 드디어 수첩이 눈앞에서 하나의 실체가 되어 두둥실 떠올랐습니다! 나는 허공에 떠 있는 그 수첩에 손을 뻗어 천천히 첫 장을 넘겼지요. 그러자 전에 봤던 아버지의 이름 세 글자가 다시 보이더군요. 이득수. 그래요, 나의 아버지. 사라진 내 동생의 아버지. 죽고 만 어머니의 남편. 그의 이름은 이득수였습니다. 다음 장을 넘기자, 흐릿한 연필로 꾹꾹 눌러쓴 아버지의 일기가 한 줄씩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사실 그건 일기라고 하기에도 뭣한 짧은 메모들에 불과했지만, 아들인 나로선 그것만으로도 죽은 아버지의 하루하루를 충분히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요. 나는 재빨리 펜을 꺼낸 뒤 종이에 아버지의 일기를 베껴썼습니다. 한번 정신을 집중하자 수첩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휙휙 넘어갔고, 그래서 미친듯이 받아쓸 수밖에 없었기에, 글씨가 이 모양으로 괴발개발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나저나, 여러분. 어떤가요? 내가 심안으로 뭔가를 읽어내는 방법이 좀 이해가 가십니까? 그걸 단계별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아요. 첫째, 노려본다. 두번째, 정신을 집중한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단계, 머릿속에 줄줄이 떠오르는 정보를 얼른 받아쓴다. 어떻습니까?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신들을 지도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검은 가죽가방에서 꺼낸 서류철을 건네다 말고, 엑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제안했다. 그러나 존 휠러는 못 들은 척하더니, 서류를 받아 한 장씩 넘기며 이리저리 꼼꼼히 살피는 것이었다. 마침내 종이 뭉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미스터 엑스, 여기 적혀 있는 글자들은 전혀 알아볼 수가 없군요. 대체 뭐라고 쓰여 있는 거지요? 앤드루, 자넨 알겠나?”

교수는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거기엔 판독이 불가능한 이상하고 기이한 기호들과 휘갈겨 쓴 알파벳, 한자 같은 것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반응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엑스는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훗, 당연히 당신들은 읽지 못할 겁니다. 그건 미래로부터 온 문자고, 천리안으로 투시된 뒤 자동기술법에 의해 서술된 내용이니까요. 자동기술법이 뭔지는 잘 알고 계시겠죠? 한때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들이 약물에 취해 아무 말이나 주절주절 내뱉으며 시詩랍시고 마구 떠들어대던 것들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 천리안 능력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자동기술법’이란 용어는, 그것과는 의미가 좀 다릅니다. 뭐랄까, 좀더 논리적이고 좀더 미래적이며 훨씬 더 정확하고 진실에 가깝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여러분에게 이걸(이때 엑스는 그 낙서투성이의 구겨진 종이를 우리 앞에서 다시 한번 흔들었다) 읽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제가 이 모든 내용을 해석, 요약, 정리하여 당신들에게 들려주겠습니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요. 나가사키로 징용을 간 뒤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일하다 원자폭탄이 터지던 날 세상을 뜨고 만 우리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무적의 전함이라던 무사시를 침몰시킬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사실, 레이테만에서 일본의 전함 무사시가 허무하게 가라앉아버린 일은 너무나 유명했고,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엑스라는 남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에 교묘하게 허구를 짜 넣는 방법을 터득한 타고난 이야기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의혹 속에서도, 나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엑스가 들려준 스토리는 재미있었고, 비록 믿어지진 않았지만, 왠지 모를 기이한 진정성 같은 게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곁눈으로 슬쩍 보니 존 휠러 교수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좀전에 엑스에 대한 검증 결과를 장담할 때와는 전혀 다른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기이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의 시작에는 주먹밥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단 한 개씩만 나누어주던 주먹밥. 반찬도 물도, 하다못해 단무지 하나 없이 그저 대충 뭉쳐진 밥 한 덩이. 아버지가 미쓰비시 중공업 조선소에서 일하며 하루에 그 밥 한 덩어리만을 배급받았다는 건, 아마 아까도 얘기 드렸을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겨우 주먹밥 한 개라니. 다 큰 성인 남자가 소금 바른 밥 한 덩이만을 먹으며 하루를 버텨야 했다는 거지요. 상상이 됩니까, 그 굶주림, 그 배고픔이? 그래서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렇게도 고국에 편지를 써 보냈던 겁니다. 여유가 된다면 약간의 조, 수수, 콩, 기장, 귀리 등등 뭐라도 좀 보내달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고향에 남은 이들에게도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습니다. 그들도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조선소에서 사람들은 그렇게도 우울하게 걸었던 겁니다.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적게 쓰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손은 혈당이 부족해 떨렸습니다. 눈초리엔 힘이 하나도 없었는데, 사실 정면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조차 그들에겐 역부족이었어요. 왜냐하면 너무나 배가 고팠으니까요. 

그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대한 전함 무사시호가 주포主砲를 수리하기 위해 조선소에 정박해 있던 그 아침 말입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서운 허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겨우 세상을 지탱하며 갑판을 가로지르던 참이었습니다. 문득 누군가가 그를 소리쳐 불렀지요. 그쪽을 돌아보니, 웬 작업복 차림의 일본인이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이, 거기. 이리 와봐. 지금 당장 저 위에 올라가서 이 나사를 모두 끼워놓고 내려오도록.’ 그러면서 그 일본인은 아버지의 손에 나사 여남은 개를 쥐여줬습니다. 사실 그는 무사시의 주포를 수리하는 임무를 맡았던 일본인 기술자였습니다. 그는 온 정성을 다해서 주포를 손봤고, 다 끝낸 후엔 걸레로 일일이 닦아 광을 낼 정도로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수리 공정을 모두 마치고 주포에서 내려왔을 때, 장교 한 명이 다가온 거지요. 그는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참, 깜빡하고 말하지 않은 것이 있소. 이 나사들을 다시 갈아 끼워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면서 장교는 나사를 건네줬고, 그걸 어디에 끼워야 하는지도 대충 설명한 다음 가버렸습니다. 기술자는 기분이 우울해졌죠. 어쨌든 그 역시 사람이었고, 따라서 아침을 먹으러 얼른 식당으로 가고 싶었으니까요. 마침 그때 조선인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그의 머릿속에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겁니다. 그는 생각했어요. ‘그래, 이 정도쯤은 슬쩍 맡겨도 되겠지! 어차피 가장 중요한 수리 공정은 완벽히 끝냈으니까’라고 말입니다. 그 기술자는 아버지에게 나사를 바꿔 끼우는 일을 맡긴 뒤 재빨리 식당으로 사라졌습니다. 밥과 국이 식기 전에 어서 한술 뜨려는 심산이었죠.

그리하여 드디어, 대망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아버지는 주포를 올려다봤지요. 그런 다음 결심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포신에 올라서도 아버지는 나사를 든 채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어요. 후들대는 다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지요. 시간이 지나 떨림이 가라앉자, 아버지는 나사 구멍을 찾았습니다. 거기에 있던 나사를 주의깊게 빼낸 뒤, 신중한 눈빛으로 새 나사를 돌려넣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바로 이 부분에 반전이 있는 겁니다. 아버지는 일부러 나사를 끝까지 조이지 않았어요. 아주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나사가 풀려 튕겨나오도록 대충 끼워놨던 겁니다. 

얼마 뒤, 임무를 마친 아버지가 홀가분하고 뿌듯한 얼굴로 사다리를 내려왔습니다. 마침 밥을 다 먹고 후식으로 차까지 마신 다음 그 아래를 지나던 일본인 기술자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대체 저놈은 뭣이 그리도 기쁘단 말인가. 아까와는 완전 딴판이잖아.’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곧 식후의 담배를 피워 물었고, 그래서 주포를 다시 확인해보지도 않은 채 그 자리를 떠났던 겁니다.

물론 어쩌면 아버지는 그저 너무나 배가 고파 손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나사를 잘못 끼우는 실수를 한 건지도 모릅니다. 수첩엔 간단하게 ‘잘못 끼워진 나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만 쓰여 있고, 아무리 내가 천리안을 가졌다 한들, 한 인간의 내밀한 의도와 욕망까지 완전히 포착할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가 의도적으로 그런 행위를 했든, 굶주림의 결과로 그런 일이 일어났든, 확실한 건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게 바뀌어버렸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결국 주포는 중요한 순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그렇게 전함은 침몰을 향해 달려갔으니 말입니다.

수리를 마친 무사시호는 넓디넓은 대양을 가로질러 필리핀 앞바다 어딘가에 도착했어요. 레이테라는 이름을 가진 섬 인근이었죠. (그 섬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어떻게 상륙했는가, 등등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뻔한 사연들, 역사책만 펼치면 지겹도록 읽고 또 읽을 수 있는 얘기나 해주려고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쨌거나) 일본군의 전함을 발견한 연합국 전투기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함장은 다급히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포의 포문을 열고 적의 전투기를 조준하라고. 포병장교들은 정확하게 계산된 각도에 맞춰 주포를 하늘로 향하도록 배치했지요. 자, 그리고 발사! 하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포문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어쩌면 뭔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튀어나온 대포알이 맛이 간 채 이리저리 비틀대다가 제풀에 지쳐 바닷물 속으로 고꾸라져버리고 말았을지도요.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헐겁게 돌려 끼워둔 나사 덕분에 주포는 망가졌고, 더는 작동하지 않기에 이르렀던 거예요! 

물론 지금도 일본 해군사史는, 전함의 허무한 최후가 주포에 헐겁게 끼워진 나사 때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사시가 그렇게 가라앉아버리고 만 이유에 대해 그저 ‘통신상의 문제가 있었다’라고만 주장하더군요. 연합국 전투기의 공격으로 전함의 통신기기가 파괴되고, 따라서 엄호해줄 다른 군함에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뿐이라고 둘러대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요. 진실이 무엇인지 말이에요! 아버지가 주린 배를 안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끼워넣은 나사. 그것 때문에 그 큰 전함은 레이테만의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던 거예요. 자, 이제 알겠지요. 내 아버지가 일본을 패망으로 이끄는 일에 어떻게 공헌했는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세상 그 누구도 전함 무사시가 나의 아버지 때문에 가라앉았단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더더욱 슬프고 아쉬운 것은, 아버지의 공로를 앞으로도 영원히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우울한 예감이지요. 생각해보십시오. 한 남자가 일부러 (혹은 실수일지라도) 헐겁게 돌려넣은 나사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큰 군함이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는 기이한 진실을, 누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려 하겠습니까? 차라리 통신기기가 파괴되어 다른 배와 연락이 안 된 무사시가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가라앉았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 있는 서술이 되겠지요. 

하긴 그러고 보면, 모든 지나간 일들을 설명할 때 우린 누구나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짜 맞추고 싶은 유혹에 빠져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일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방법이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이것의 원인은 저것. 저것의 결과는 이것.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퍼즐처럼 맞춰지는 것이 아니며 알고 보면 원래부터 퍼즐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모든 결과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원인이 존재한다면 또 어떻고요? 세상의 모든 일은 사실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강심장인 사람이 과연 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저 우연히 일어난 아주 작은 일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거대한 파도가 되어 한 사람, 혹은 전 지구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큼 강인한 자는, 또 몇 명이나 되겠어요? 그래서 인간은 지나간 시간을 설명하는 새롭고도 기이한 방법을 찾아야만 했던 게 아닐까요. 언제부턴가 그들은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모든 원인엔 결과가 따른다고 믿기로 작정했지요. 그런 다음,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사건들을 이리저리 짜맞추어 인과관계라는 걸 만들어냈던 겁니다. 그래요, 그걸 사람들은 플롯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우리는―교수님, 여기 앤드루 군, 심지어는 나마저도 말입니다―그런 식의 인위적이고도 허구적인 플롯을 짜내는 데 푹 빠져버린 나머지, 진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법을 잊고 말았습니다. 개연성 있어 뵈는 가짜 원인이 진짜 원인을 대체하고, 잘 짜맞춰진 허구적 결과가 진실로 일어난 실체로서의 결과를 대신하는, 그런 세상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리고 슬프게도 그런 세상에선 아버지의 수첩 따윈 무의미하며, 한 남자가 끼워넣은 나사 하나가 군함을 침몰시키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은 허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여하간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아버지의 사연을 편지에 적어 고향 땅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어요. 수없이 여러 번, 보내고 또 보냈지만,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일축했고, 도리어 증거를 내놓으라고 다그칠 뿐이었습니다. 결국, 내가 보낸 수많은 편지는 소각장에서 잘게 찢기고 태워져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나의 모든 편지는 그런 신세를 면치 못하겠지요. 언젠가 어딘가에서 한 소녀 혹은 소년이 그 자잘한 종잇조각들을 주워 정성껏 이어붙인 뒤 찬찬히 읽어볼 테지만, 그런 다음 그것을 자기만의 언어로 어딘가에 옮겨 적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건 아주 먼 미래의 일일 테니까요.”

미친듯이 떠들던 엑스가 잠시 말을 멈춘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가만히 보니 이마엔 땀이 흐르고 얼굴빛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