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6. 엑스가 수첩에 대하여 털어놓고, 정보기관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설명하다


그건 신문에서 오려낸 한 장의 사진이었다. 너무 오래된데다 하도 여러 번 접었다 폈다 한 나머지 거의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그 사진 속에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리본 커팅을 하기 위해 가위를 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엑스는 백인과 동양인, 군복을 입은 사람과 평상복을 입은 사람들 무리의 정 가운데 서 있는 땅딸막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길 보십시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편의상 무라카미라고 부르기로 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자, 극도의 불안으로 침울해진 그의 얼굴이 보입니까? 사진이 너무 흐릿해서 잘 모르겠다고요? 아니, 아니죠. 사진을 그런 식으로 보면 안 됩니다. 그렇게 봐서 알 수 있는 건 오직 겉모습뿐이니까요. 뭐랄까, 그건 사진에 찍힌 사람이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말입니다. 사진을 제대로 보려면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흐리고 뿌연 얼굴들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진짜 영혼을 직시할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러니 다시 한번 보십시오. 심안으로 말이에요. 어떤가요? 이제 뭔가 보이지 않나요? 시의회 의장의 어둡고 불안한 내면 같은 게 말입니다.”

엑스가 그 빛바랜 신문 조각을 다시 내밀었을 때, 난 그 부스러질 것 같은 종이를 조심스레 받아 찬찬히 살펴봤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헤드라인 역시 거의 지워져 눈을 가늘게 뜬 채 한참 봐야만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죽음의 시대…… 인류 평화…… 나가사키…… 기공식’. 신문 상단이 찢겨나가 발행 날짜나 제호 같은 것은 아예 확인할 수 없었고, 그 아래 인쇄된 짧은 기사는 누군가가 수없이 밑줄을 그은 탓에 도무지 읽어내기가 불가능했다. 그때 엑스가 사진 구석의 군복 입은 외국인(으로 보이는 누군가)을 가리켰다.    

“여기 이자가 미 공군 393사단 비행 중대 소령이었던 찰스 스위니입니다. 고쿠라로 가던 B29의 기수를 나가사키로 돌렸던 바로 그 사람이죠. 그런데 기공식에 참석한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해서 주민들의 빈축을 사게 됩니다. 원자폭탄이 투하된 그날 아침 날씨가 좋았다면 그냥 원래의 계획대로 고쿠라로 향했을 테고, 그랬더라면 나가사키의 시민들이 그렇게 많이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거라며 울먹였거든요. 아니, 생각해보세요. 결국 어디로 기수를 돌렸든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고, 만약 원자폭탄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또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했을 테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지 않지 않았다면…… 그래요, 이런 가정을 아무리 한없이 하면 뭘 합니까. 어차피 이 세계의 모든 건 죽음의 연쇄로 이어진 고리 속에서만 존재하는데 말이에요! 

아아, 죄송합니다. 내가 좀 흥분한 것 같군요. 어쨌든, 무라카미 의장을 주목해주십시오. 여기 한가운데 서 있는, 머리에 가르마를 탄 뒤 포마드를 잔뜩 발라 깔끔하게 빗어 넘긴 남자 말이에요. 정말로 중요한 건 그의 주머니지요. 아주 자세히 보면, 무라카미가 입은 윗도리 주머니에 뭔가 검은 것이 삐죽 튀어나와 있거든요. 안 보인다고요? 참 나, 그렇게 대충 흘낏 보지 말고 좀 제대로 보세요. 하, 이런 답답한 분들을 봤나. 거기 주머니 위로 살짝 솟아 있는 그 검은 수첩이 정말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요?”

휠러 교수와 나는 엑스가 가리키는 사진 속 아주 조그만 부분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러나 수첩은커녕 주머니가 달려 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사진은 흐릿했고, 그나마 그가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은 하도 자주 접었다 폈다 한 나머지 거의 찢어져 있었다. 참다못한 휠러 교수가 말했다.

“실례지만, 우리 눈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요. 대체 어디에 주머니가 있고, 어디에 수첩이 있다는 건지.” 

그러자 엑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나 같은 사람과 당신들 같은 평범한 이들이 똑같은 것을 볼 순 없겠지요. 나는 심안으로 세상을 보고, 당신들은 그저 ‘눈’으로만 세계를 파악하니까요. 

하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사진을 얻게 된 내력도 그야말로 굉장합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결국 그게 필연이 되어버린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그래요, 이제부터 그 사연을 우선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보자……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무척이나 추운 날이었지요. 그날 아침도 난 늦잠을 잤고―아,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잠을 많이 자야 한답니다. 모르셨습니까? 우리의 뇌 가동률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몇십 배에 달하죠. 초능력을 발휘할 땐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뇌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려야 하거든요. 그렇기에 금방 피로해지고, 잠도 더 많이 잘 수밖에 없는 거예요―직장으로 헐레벌떡 달려가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아직 정보기관에 들어오기 전이었고, 난 그저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이 상점에서 시간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곳의 매니저들은 직원이 단 일 분이라도 지각하는 걸 눈 뜨고 못 보거든요. 그래서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가고 있었는데, 하필 이상하게 그날따라 치킨 부리토가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나는 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어요. ‘말도 안 돼. 오늘도 지각하면 주급을 깎기로 했잖아.’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눈을 질끈 감고 뛰었지만 치킨 부리토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고, 급기야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입에선 침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거예요. 결국 난 에라 모르겠다 외치며 길모퉁이에 있는 부리토 가게로 들어갔답니다. 말이 가게지, 그저 조그만 포장마차에 불과한 그 집은 뚱뚱한 푸에르토리코 남자가 치킨 부리토와 소고기 부리토, 두 가지 메뉴만을 파는 곳이었지요. 난 그에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어요. ‘치킨 부리토 하나, 빨리요!’ 하지만 그가 굼뜨게 만들어 건넨 건 치킨 부리토가 아니라 소고기 부리토였습니다.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죠. 바꿔달라고 했지만, 그는 오히려 날 노려보더니, 어차피 맛도 비슷한데 그냥 먹으라며 팔짱을 꼈어요. 아마 그 거구의 남자는 자그만 나를 얕봤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잘못 본 거였어요. 나 역시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봤으니까요. 그런 다음 정신을 집중하여 그에게 심리 제어술을 시행하기 시작했죠. 우리 둘 사이엔 팽팽한 긴장이 흘러서 거의 불꽃 같은 게 튈 정도였어요. 알고 보니 그 남자도 만만치 않은 상대더군요. 그러니까, 일종의 숨은 고수였다 이 말입니다(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세상 곳곳엔 초능력의 고수들이 그런 식으로 숨어 살고 있답니다). 그는 내가 내뿜는 에너지를 교묘하게 막아내며 숨을 헐떡였어요. 우리 둘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혔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그 남자가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얼굴엔 포기한 표정이 역력했죠. ‘제길, 내가 졌소. 까짓거, 다시 만들어주지.’ 그는 뒤돌아서서 후다닥 부리토를 하나 만들더니, 신문지에 대충 싸서 던져주더군요. 나는 천신만고 끝에 손에 넣은 치킨 부리토를 들고, 다시 달렸습니다. 먹으면서 가는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코너를 돌며 덥석 베어먹는 순간, 입에 있던 부리토를 모두 뱉어내고 말았습니다. 나와의 대결에서 속절없이 지고 만 그 사악한 푸에르토리코 놈이 칠리소스를 병째 들이부어놨던 것입니다. 너무 매워서 눈물을 흘리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부리토를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습니다. 그놈이 치킨 부리토를 싸줬던 신문지 조각은 버리지 않았는데, 손에 묻은 소스를 닦을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여하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상점에 다다랐지만,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어디선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이봐, 넌 이제 해고야. 다시는 나오지 마. 불쌍해서 봐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보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매니저였습니다. 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만약 여기서도 잘리면, 정말이지 방세를 낼 돈도 없어 쫓겨날 판이라고 호소했지요.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지하철역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들어선 다음 제일 먼저 들른 곳은 화장실이었어요. 손에 묻은 칠리소스를 닦아내고 싶었고, 세수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가 실직의 충격으로 울었다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눈이 따가웠어요. 정말이에요. 어쨌든 손을 씻고 세수를 한 뒤 아까 주머니에 넣어둔 신문지를 꺼내 물기를 닦으려는데, 왠지 낯익은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오지 뭡니까! 그건 바로 ‘나가사키’라는 도시 이름이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난 이유를 알 수 없는 현기증을 느꼈어요. 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대합실로 비틀비틀 걸어들어와 다시 한번 종이를 펼치니, 이 사진이 가운데 떡하니 박혀 있었던 겁니다.

난 이 사진에 뭔가 있다는 걸 직감했고, 내가 느꼈던 현기증이야말로 그 ‘뭔가’가 보내는 ‘신호’라는 걸 알았습니다. 지하철역의 더러운 의자에 앉아,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서서히, 천천히, 나의 능력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내 온몸은 땀으로 뒤덮였으며 손발은 부들부들 떨렸지요. 그렇게 영원과 같은 시간이 흘렀을 때, 드디어 무라카미 의장이 사진을 찍을 때 웃옷 주머니에 꽂고 있던 물건의 실체가 내 눈앞에 떠올랐습니다. 그건, 그것은…… 내 아버지의 수첩이었습니다. 그래요, 아직 내 손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아버지가 나에게, 아니 나와 내 동생에게 남긴 유일무이한 유품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당신은, 그 수첩의 실물을 지니고 있진 않은 거로군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존 휠러가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교수님. 하지만 재차 말씀드리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겐 ‘실물’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좀 특별하다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실재’란 측면에서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그건 물리학자인 교수님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현대물리학도 모든 물질이 그 근원적인 상태에선 파동으로 이뤄져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까? 즉,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이렇게 말하며 그는 테이블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했고, 자신의 낡은 베이지색 코트 깃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사실은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파동에 불과하다는 것, 그게 양자론의 핵심 아니던가요? 따라서 일반적인 인간들이 보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고 만지고 느끼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어떤 식으로 감지되는지는, 교수님도 어느 정도 짐작하시리라 여기는데요. 그러니 말입니다, 교수님, 아버지가 남긴 수첩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결국 난 그걸 소유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자기 아버지의 유품을 실물로 보유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내가 아버지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겉모습만 보는 그들과 달리 난 심안으로 모든 걸 대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존 휠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파동은 그런 식의 SF적 상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신은 그걸 알아야 해요.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한 이후로, 수많은 사이비 과학자들과 자칭 초능력자들, 헛된 망상에 빠진 작가들이 발호하기 시작했지요. 그들은 현대물리학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인 양자론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마음대로 각색했고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 세계를 양산해냈습니다.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니라 할 수 없……”

그러나 교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엑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의수로 탁자를 내리쳤다.

“하, 정말 최고의 석학이라는 당신조차 이런 답답한 말을 하는군요! 하지만 파인만이 한 이 얘기를 교수님도 알고 있을 텐데요! ‘누군가가 양자역학을 이해했다면 그건 그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어떻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양자적 우주에 첫발을 내디뎠을 뿐, 그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는 거 아닌가요?”

얼굴까지 붉어진 채 소리치는 엑스 앞에서 결국 존 휠러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일단 내가 사과하지요. 자, 그러니 어서 당신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십시오. 부탁합니다.”

교수의 공손한 태도에 엑스의 표정은 금세 누그러졌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미안하다며 어깨를 움츠렸다.   

“과격한 반응을 보인 것…… 저도 사과드립니다. 사실 살아오면서 너무나 많은 오해와 질시에 시달렸어요. 사람들은 우릴 믿어주지 않았고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힐끗댔지요.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예민해지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누구든 제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 앞에선 나도 모르게 그런 태도가 나오니 말이에요. 휴…… 어쨌든,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볼까요?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죠? 아, 정말,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놈의 전자파 때문에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어요. 당신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저 녹음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자기적 파동이 끊임없이 내 뇌를 자극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엑스는 왼손으로 자기 이마를 툭툭 두드리며 의수로는 여전히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검은색 소니 녹음기를 가리켰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아, 기억났습니다. 그래요, 수첩의 존재를 깨닫게 된 계기까지 말씀드렸었죠? 사악한 푸에르토리코 놈이 치킨 부리토를 둘둘 말아준 그 신문지 조각에서 이 놀라운 사진을 발견했다는 얘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무라카미 의장의 웃옷 주머니였습니다. 한 손으론 가위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기공식 리본을 잡고 있는데, 그 사이로 보이는 양복 주머니에 뭔가 검은 모서리 같은 것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지요. 그리고 그 순간, 난 그것의 본질을 한눈에 알아차렸던 겁니다! 비록 흐릿하고 뿌연 흑백사진 속에 찍혀 있는 물건이지만, 거기에서 뿜어나오는 어떤 범상치 않은 기운, 아니 어쩌면 너무나도 낯익은 느낌(당연하지요, 그건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소중히 하던 유품이었으니까요)을 감지했던 거지요. 그 뾰족하게 튀어나온 뭔가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하여, 나는 지하철역 의자에 앉아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사진 속 한 점을 노려보고 있자니, 드디어 그 네모난 작은 얼룩이 점점 더 커다랗게 확대되며 눈앞에 떠오르더군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모든 힘을 끌어모아 더더욱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 사진을 노려봤습니다. 한 십 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커다랗게 확대된 얼룩이 서서히 형체를 띠며 삼차원의 영상이 되어 내 앞에 펼쳐졌어요. 그건…… 그것은, 낡고 오래된 수첩이었습니다! 심안을 이용하여 표지를 들추자,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세 개의 글자가 서툰 연필 글씨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아, 그건 바로 나가사키에서 속절없이 사라지고 만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죠! 나는 그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이. 득. 수.


하지만, 이름을 다 읽은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슬프게도 기억에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시립병원의 더러운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으니까요.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은 바로는, 한 추레한 차림의 행인이 나를 구해줬다고 합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중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의자 밑에 쓰러진 채 몸부림치고 있더랍니다. 뜻 모를 말을 중얼대며 이마에선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온몸은 그야말로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던 나를 그대로 지나치지 않고 역무원에게 연락해준 걸 보면, 그는 무척이나 친절한 사람이었나봅니다. 비록 그가 내 지갑에 있던 약간의 돈을 모두 털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진만은 남겨두고 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요! 여하튼 그렇게 하여 난 행려병자 신세가 되어 입원까지 하게 되었던 겁니다. 병원에선 내가 실려오자마자 몇 가지 검사를 했고, 한심하게도 ‘간질’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며 피로에 찌든 얼굴로 ‘간질 발작이었습니다’라고 중얼대는 레지던트에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어요.  

‘이봐요, 의사 선생, 아직 젊어서 잘 모르나본데, 나는 간질 환자가 아닙니다. 이건 그냥 일종의 증세라고요. 사실 난 초능력자고 머나먼 장소나 미래 혹은 과거를 투시할 수 있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어요.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것도 뭔가를 투시하느라(그러면서 난 그에게 아버지의 수첩이 숨어 있는 사진을 보여주려 주머니를 뒤적였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내 옷은 환자복으로 바뀌어 있었고 신문지 조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어요. 결국 나는 레지던트 앞에서 어깨를 으쓱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탈진해서 그런 거지, 결코 무슨 질병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앞뒤가 꽉 막히고 세상 모든 것을 의학 서적에서 얻은 얄팍한 지식으로만 재단하던 그 레지던트는, 나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더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차트를 펼치더니 ‘약간의 정신분열 기미도 보임’이라고까지 적어넣었던 거지요! 결국 난 간질 환자이자 정신병자라는 말도 안 되는 판정을 받고, 병원 꼭대기 층의 격리병동에 수용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억울하고도 슬픈 일 아닌가요? 단지 천리안을 가졌고 미래와 과거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 말입니다! 아무튼, 격리병동은 기이한 장소였습니다. 복도와 방과 침대, 그 모든 것들이 이끼 같은 녹색이었죠. 내가 입은 환자복 역시 짙은 초록색이었습니다. 그들은―나에게 간질이라든지 정신분열증 따위의 진단을 내린 이들 말입니다―하루에 한 번 아침마다 병실에 들어와 의문의 주사를 놓았습니다. 주사를 맞고 나면 곧 잠이 왔고, 그렇게 비몽사몽한 상태에 빠져 하루를 보내곤 했죠. 난 거기서 꽤 오래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 녹색의 방에서 지낸 지루한 나날들은, 결국 ‘전화위복’의 계기가 됩니다. 전화위복. 그런데 여러분 중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사람 있나요? 앤드루 씨, 그래요 앤드루라고 했죠? 당신이라면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요? 혹시 어린 시절 부모님께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나요?”

방금 전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꿈 얘길 들려주듯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대던 엑스가 갑자기 정색하며 질문했을 때,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언제나 서툰 영어로만 말을 걸었다. 

“그래야 네가 완전한 미국인이 될 수 있거든.” 어머니는 빨래를 널며 이렇게 말했다. 

“영어만 잘했어도 이렇게 살진 않았을 거다.” 아버지가 밤마다 소파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며 내뱉던 말이었다. 

그러나 내 부모의 발음은 언제나 틀렸고 서로의 대화는 다섯 마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서서히 말수가 줄어든 우리는 어느 날부터인가 완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고,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화위복이란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무슨 뜻이죠?” 

하지만 엑스는 아무 말도 없이 내 낯을 살피기만 했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얼굴에 신경이 쓰였던 걸까. 마침내 조심스럽게 팔짱을 끼며 그가 말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무리 부모가 동양인이라고 해도 못 들어볼 수 있으니까요. 암,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까 그 말은, 지금은 안 좋게 보이는 일도 나중엔 좋은 일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사성어인데요. 그때 병원에서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바로 그랬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엔 병원에서의 하루하루가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곳은 격리병동이었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난 매일 기이한 주사를 맞고 정신이 점점 더 흐릿해져서 드디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조차 헷갈리는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아버지의 수첩이 숨어 있는 무라카미 의장의 사진 따윈 기억에서 깡그리 사라진 뒤였죠. 그 상황은 나에게 완벽히 불운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행운으로 바뀌는 데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행운은 쿠키와 함께 찾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모난 하인츠 칠리소스 상자의 모습을 띠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된 사연인데요,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병원에선 일주일에 두 번씩 핸드메이드 쿠키를 간식으로 나눠줬습니다. 어느 교회의 나이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구운 거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쿠키를 나눠주러 직접 찾아왔고, 그때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신의 저주를 받은 거라고 일러줬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다 있담?’ 하고 흘려들었지만, 듣다보니 묘하게 설득되어 어느 때부터는 그들 앞에서 참회의 눈물까지 흘렸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들은 긴 설교를 끝내고 나면 항상 기도를 해줬어요. 그런 다음 팔에 걸고 온 바구니에서 핸드메이드 쿠키를 꺼내어 우리 앞에 내려놨습니다. 잠깐만,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건 쿠키가 아니라 건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걸 나눠준 사람들은 엄격한 자원봉사자들이 아니라 군복을 입고 온 군인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게 수제 쿠키든, 국방색 봉지에 담긴 건빵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중요한 건 어느 날 저녁 내가 그걸 먹다가 바닥에 떨어뜨렸다는 사실뿐이니까요.

난 다음날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전날 저녁에 떨어뜨린 쿠키가 어디 있나 찾기 위해 바닥을 더듬어보았죠.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건빵은, 아니 쿠키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였어요. 침대 밑 좁은 틈으로 뻗은 손끝에 상자 하나가 만져진 것은요. 그걸 끄집어내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병실 구석에 세워놓은 대걸레가 보이더군요. 난 그걸 가져와서 침대 밑을 마구 헤집었고 마침내 납작하게 찌그러진 하인츠 칠리소스 상자를 끄집어낼 수 있었습니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릎에 상자를 올려놓고 뚜껑을 열 때, 내 마음은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그 안에 칠리소스가 단 한 병이라도 남아 있다면, 나중에 맛없는 샌드위치를 배급받았을 때 뿌려 먹을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상자 안엔 소스 따윈 없었습니다. 대신, 웬 낡은 베이지색 코트와 신문지 한 장이 착착 접힌 채 들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펼쳤습니다. 그건, 그래요, 바로 무라카미 의장과 찰스 스위니 소령(으로 보이는 사람)의 사진이 찍혀 있는 바로 그 신문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수첩을, 속표지에 서툰 연필 글씨로 ‘이득수’라고 적어놓은 그 수첩을, 나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왔던 거예요. 격리병동 입원실의 공짜 밥과 쿠키에 빠져서 말입니다. 그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이 주사를 놓으러 오는 소리였지요. 순간 난 단번에 모든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떤 덫에 걸려 있는지. 그들이 그동안 놔주던 주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러니까 그들은 나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초능력을 없애기 위해 격리병동에 억지로 가뒀던 것입니다.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던 상점 매니저나 일부러 매운 칠리소스를 들이부어 지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 푸에르토리코 놈, 모두가 그들의 하수인이었던 거지요! 

그럼, 과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요, 당신들이 무척이나 궁금히 여기고 있음을 나는 압니다. 하지만 앞서도 알려드렸듯이 사건의 전개엔 순서가 있는 법이거든요. 그들이 누군지, 그때의 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까지 당신들은 좀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저 흥미와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 실제 일어난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고 싶진 않으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엑스는 좌중(이라고 해봤자 나와 휠러 교수뿐이었지만)을 둘러보더니 잔을 들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몹시 목이 마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긴 시간 떠들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탁하게 쉬어 있었다. 콜록대며 몇 번인가 기침을 한 엑스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런, 이런.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 못 견디는 눈치군요. 좋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만, 아주 약간의 힌트는 드릴게요.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집단을 말합니다. 인류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이죠. 그리고 지금도 그자들은 시시각각 곳곳에서 우리 모두를 노리고 있어요. 그들에겐 무서운 야욕이 있으니까요. (엑스는 또 말을 멈췄고, 나와 존 휠러의 안색을 재빨리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중얼댔다) 네, 당신들이 상상하는 바로 그놈들이 맞아요! 비록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순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거 한 가지만은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요. 그 사악한 자들은 결국 앞으로 삼십 년쯤 후의 미래에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 얘깁니다. 뭐라고요?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기다려보십시오. 어느 날 그들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라질 테고, 전설이 되었다가 결국엔 그마저도 모두 잊히고 말 테니까요! 

그럼 뭐가 남느냐고요? 글쎄요. 아마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 이후로 어떤 세상이 도래하게 되는지. 그냥, 이렇게만 생각하면 돼요. 그땐 전자기적 파동이 인간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요. 지구의 대기는 모두 그 파동으로 가득 채워지고, 그것은 쉴새없이 정보를 운반하지요.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저곳에서 이곳으로.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길에서도 집에서도 하다못해 잠잘 때조차도 그 파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때 지구를 위협하는 사악한 집단을 만들어냈던 ‘그들’이, 이번엔 그 파동 속에 기기묘묘한 신호들을 숨겨둘 테니까요. 그건 너무나 강력한 파장이라서 인간의 뇌를 사로잡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아요. 사람들은 그 파동이 펼쳐 보여주는 신기한 영상에 빠져, 세상의 다른 일들에 대해선 거의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그런 시절이 도래하면, 나와 같은 이들은 퇴물 신세가 되고 맙니다. 왜냐고요? 하,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초능력으로 겨우 얻어내는 모든 정보들이 괴상한 파동을 타고 온 세상에 넘쳐날 테니까요. 그땐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할 필요조차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전자기적 파동 위에 스스로의 비밀을 밝히지 못해 안달할 거라고요. 두고 보세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정보공개가 이루어질 가까운 미래를 말이에요. 

아, 이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너무 많이 흘러갔군요. 죄송합니다. 

그래요. 나는 건빵인지 쿠키인지 덕분에 침대 밑에 숨겨진 칠리소스 상자를 발견했고, 그 안엔 베이지색 코트와 신문 한 장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찾아냄과 동시에 잊고 있던 아버지의 수첩에 대한 기억을 다시 떠올렸고, 나를 향한 그들의 사악한 손길을 직감했지요.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기에, 일단 상자를 도로 침대 밑에 밀어넣은 뒤 눈을 감고 자는 척했습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는 순간 나는 온몸에 힘을 주었어요. 덕분에 근육은 굳어졌고, 주삿바늘은 속절없이 부러지고 말았지요. 그 여자가 짜증을 내며 다른 주사기를 가지러 갔을 때, 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러고는 하인츠 칠리소스 상자만 챙겨 품에 안고 병원을 빠져나왔던 겁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난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복도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속속들이 알았고, 초록색 환자복을 입은 덕분에 온통 녹색뿐인 그곳에서 교묘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지요. 얼마나 모든 것이 초록이었는지 벽에 딱 붙은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상상이 가지요? 

하지만, 그렇게 몸을 붙이고 출구에 거의 다 도달했을 즈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았습니다. 병원 탈출이라는 행운이 다시 불행으로 바뀐 기막힌 순간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