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5. 존 휠러가 녹음기를 가져오고, 엑스가 나가사키에서 온 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휠러 교수는 한쪽 팔에 끼고 온 검은 상자 같은 것을 조심스레 탁자에 내려놨다. 소니의 최신형 녹음기였다.
“아, 이건……?”
엑스가 녹음기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교수는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시다시피 녹음기입니다. 당신의 말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서 옆 연구실에서 급히 빌려왔지요.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요?”
교수가 녹음 버튼을 누르자,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엑스가 재빨리 정지 버튼을 눌렀고, 왜인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항의했다.
“잠깐! 이건 처음부터 약속에 없던 것 아닙니까? 난 내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기록되는 걸 원치 않아요. 아마 저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우린 너무나 많은 오해를 받으며 살아왔기에,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에 대한 기록이 대중에게 공개되길 원치 않는 거지요.”
존 휠러는 엑스를 설득하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당신의 기록을 대중에게 공개하기 위해 녹음하다니요? 이건 국가의 요청에 의한 실험입니다. 모든 건 철저히 검증되어야 하지요. 기록은 바로 그런 목적으로만 사용될 것입니다. 꼼꼼히 되짚어보며 진위를 판단하는 일 말입니다. 그러니 녹음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고 해서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그저 좀전까지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당신이 살아온 날들을 들려주면 됩니다.” 
결국 엑스는 한동안의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자꾸만 녹음기 쪽을 쳐다봤고, 툭하면 손을 비벼댔으며, 그럴수록 그의 이야기는 점점 두서가 없어져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혼란에 빠져 모든 시간과 장소를 혼동하기 시작했다(혹은 그랬던 것 같다). 
“전자파 때문이야.” 
중간중간, 엑스는 녹음기를 노려보며 혼잣말을 했고, 이야기가 엉켜버릴 때마다 화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초능력자들은 유별나게 전자파에 민감한 존재들이라는 것이었다. 
“변명같이 들릴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은 공기 중의 보이지 않는 파동을 타고 전달되거든요. 그런데 이런 기계가 앞에 있으면 아무래도 거기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전자기파장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건 일종의 기밀이지만, 그래서 내가 머물고 있는 정보기관의 숙소엔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우린 일주일에 한 번씩 대강당에 모여 <맨 프럼 엉클>을 보거나(이 스파이 영화는 우리 초능력 요원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무엇보다도 적국에 대한 정신 무장을 강화하기 위해 특별히 선정된 것입니다), 아니면 한 시간 동안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을 듣습니다. 뭐라고요? 답답하지 않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게 다 자유 진영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필요한 일들이니까요. 우린 그런 책임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어찌 됐든, 녹음기를 앞에 둔 다음부터 기이하게 흘러가버린 그날의 이야기 속에서, 엑스는 동시에 여러 개의 공간에 존재하기도 했고, 결코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멍하니 서 있는 스스로를 알아차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존 휠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나를 쳐다봤고, 눈짓으로 뭔가를 속삭였다. ‘안 되겠어. 이 남자가 하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마치 셰에라자드의 이야기를 듣는 술탄처럼 엑스의 말에 빠져들었다.
“결론은, 내가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외과 수술실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히는 생명을 얻은 대신 몸의 반쪽을 잃었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내게서 분리된 동생은 어디로 갔냐고요?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난 당신들이 그걸 매우 궁금해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모든 이야기엔 순서가 있고,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전개되는 거니까요. 물론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중간에 짜넣음으로써 내 인생을 좀더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얘기 속에선 각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가 마치 한 쌍의 카드처럼 정확하게 매칭되리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게 짜맞춘 인과관계야말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의 조합일지도 모릅니다. 세상 모든 결과들의 진짜 원인은 항상 감추어져 있는 법이고, 인간은 결코 그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 궁금하더라도 조금만 기다리세요. 내가 수술실에서 헤어진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는 건 좀더 나중의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기억났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김호선에게서 이 모든 얘기를 전해들었다고 말했었지요. 마치 당신들이 각자의 부모에게서 기억 이전의 삶에 대하여 전해들었듯 말이에요. 사실, 나중에 나를 미국으로 보내준 사람도 바로 김호선입니다. 그가 제프리 허드슨 중위―아아,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그는 나의 양아버지입니다. 따라서 이것 역시 기밀 사항에 해당하지만, 내 미국에서의 이름(그래요, 사회보장번호가 적힌 카드에 있는 그 이름 말입니다)은 록 허드슨입니다. 영화배우 록 허드슨의 팬이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지어줬지요―에게 나를 보여줬으니까요. 허드슨 중위는 키가 크고 약간 마른데다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전형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군복엔 훈장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이테만灣전투에서 세운 공로 덕분에 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그는 그걸 자랑하고 싶은지 언제나 가슴을 쑥 내밀고 당당하게 걸어다녔어요.
참, 그러고 보니, 당신들은 레이테만 전투를 아십니까? 아, 교수님, 알고 계신다고요? 하긴 그건 워낙에 유명한, 역사상 최대의 해전 중 하나니까요. 그럼 앤드루, 당신은요? 그래요. 당연히 모를 겁니다. 당신이 아직 아기였을 때 일어난 일일 테니까요. 그런데 레이테만 전투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필리핀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일본 전함 무사시호에 대해선 잘 알고 있더군요. 실은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때 밀리터리 마니아였고, 거대한 전함들의 프라모델을 줄곧 수집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함 무사시에 얽힌 나와 아버지의 인연은 알지도 못한 채 살아왔던 거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이제부터 정말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될 겁니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들 하세요.”
엑스가 말을 멈추더니 더욱 극적인 효과를 노리려는 듯 눈을 감았다. 존 휠러가 시계를 한번 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스터 엑스, 우리에게 허용된 시간은 며칠 안 됩니다. 그 안에 모든 걸 검증하고 보고서까지 제출해야 한다고요. 그야말로 기상천외하고도 기이한 사연이지만, 좀더 짧고 간략하게 줄여서 들려줄 순 없겠습니까?”
그러자 바바리코트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알고 있어요, 교수님. 하지만 전 제가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도 또한 알고 있는걸요. 제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요? 저는 초능력자입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죠. 아니, 마음만 먹으면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시공간을 잠깐 뒤바꿔버릴 수도 있을 정도라고요. 그러니 한번 주위를 둘러보세요. 혹시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당신은 정말로, 당신이 원래 존재했던 1965년 여름에 살고 있다고 확신하느냐, 이 말입니다.”
난 그의 말을 듣고 얼른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날짜는 정확히 1965년 8월 20일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남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달력을 확인한 내가 멍청했던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엑스가 피식 웃었다.
“순진한 앤드루 씨. 당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실수를 하는군요. 광속으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에 다녀온다면, 그때 당신의 손목시계는 몇 시를 가리킬까요? 그걸 생각해보세요. 제 말은, 서두를 필요 없다는 겁니다. 모든 건 이미 결정돼 있고 난 당신들에게 나의 과거, 현재와 아울러 미래까지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비록 지금 내가 부당한 평가를 받고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해도, 다가올 미래는 결국 내 진실을 입증해줄 겁니다. 그리고 난 그걸 위해 여기까지 와서 당신들을 만나고 있는 거고요.”
덧붙이자면, 그후 나는 수없이 그를 떠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의 혼란스러운 이야기 속에서 펼쳐졌던 미래가, 정말 그대로 하나씩 실현되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전 존 휠러 교수의 연구실에 앉아 있던 나는 당연히 그런 미래를 알지 못했고, 그래서 엑스를 살짝 미친 인간쯤으로 여기며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어쨋든 존 휠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계속해보시지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은 엑스는 탁자에 놓인 생수를 한 모금 마신 뒤 기나긴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아버린 전함 무사시를 만든 사람은 바로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독일의 거대 군함 비스마르크호보다도 훨씬 컸던 그 엄청난 배를 침몰시킨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 역시 우리 아버지더라, 이 말씀입니다. 하,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뭐라고요? 믿어지지 않는다고요? 뭐, 그럴 만도 합니다. 나 역시 그런 사연들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실제로 확인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나가사키에서 그렇게 돌아가시고도 한참 후에 전달된 유품 상자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이거죠. 하지만 비록 아직 일어나진 않았다 해도, 이제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백 퍼센트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일어날 일은 언젠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게 양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룰이니까요. 하긴, 휠러 교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양자론의 확률 세계에서 통용되는 다음과 같은 법칙에 대해서 말입니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사건은 결국 일어난다.’ 그나저나 이걸 처음 말한 사람이 혹시 하이젠베르크였던가요? 그 유명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했던.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또 말이 길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겁니다. 즉 내가 앞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물건―아버지의 공로를 증명해줄 만한 뭔가―을 손에 넣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나가사키로부터 발송될 작은 유품 상자 안에 들어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 작고 검은 수첩. 아버지가 비뚤비뚤한 글씨로 상형문자처럼 적어놓은 그 모든 사연들. 아아,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에게 수첩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한 사람의 생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그가 남긴 수첩보다 더 정확한 게 어디 있을지! 그러나 장담컨대, 가까운 미래에 수첩이란 물건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훗, 두고 보십시오. 그때가 되면 아무도 수첩 따위에 뭔가를 기록하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첩의 대용품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그것의 이름을 나는 아직 모르지만, 미래에 사람들은 거기에 뭔가를 적을 겁니다. 적어도 수십 년 내에 말이에요. 그것은 전자기적 파동과 0과 1이라는 두 개의 숫자에 의해 작동합니다. 그리고 거기 적힌 메모는, 그 기계를 새것으로 대체할 때 헌 기계와 함께 없어지고 마는 거지요. 그 안에 담겨 있던 약간의 생의 진실마저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거고요. 어떤가요, 무척이나 슬프고 삭막한 미래 아닙니까? 하지만 벌써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수첩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연필도 있지요. 누구나 그걸 들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뭔가를 기록하면 되는 거예요. 자, 그러니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가올 어느 미래에 내가 아버지의 수첩을 통해 알게 될 그 모든 사연들에 대해 말입니다.
아버지는 나가사키로 끌려가 미쓰비시 중공업 조선소에서 강제노역을 하며, 틈날 때마다 그 날의 일과를 기록했습니다. 그가 연필을 어디서 구했는지 혹은 수첩은 어디에서 얻었는지, 이런 지엽말단적인 것들은 그냥 넘어가도록 합시다. 그런 건 저기 학교 안에 앉아 있는 역사학자들이 연구할 문제이니 말이에요. 중요한 건, 거기에 아버지가 전함 무사시의 건조에 참여했던 이야기와 그 커다란 배가 레이테만 인근 바다에 수장되고 만 사연이 아주 꼼꼼히 적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네, 네, 잠깐만 기다리시라니까요. 수첩에 적힌 내용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아버지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 때문에 죽고 난 후, 그 수첩은 그야말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이름 없는 수첩엔 신경쓰지 않았으니까요. 아마 미쓰비시는 미쓰비시대로, 나가사키는 나가사키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다들 바빴기 때문이겠죠? 그렇다고 아버지의 고향 사람들이 그 수첩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 푸르고 깊은 동해 건너에 살고 있던 사람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예로부터 외적의 침입을 많이 받았다는 그 나라 사람들 역시 너무나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어요.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이 끝난 뒤 찾아온 기쁨도 잠시, 그들은 곧 서로 적이 되었고,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고, 그런 다음엔 굶어죽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해야만 했으니까요. 결국 아주 오랫동안 그 수첩은 갈피에 끼워져 있던 몽당연필 두 자루와 함께 나가사키 시내에 있는 원폭자료관 지하 창고에서 여러 가지 유품들과 함께 굴러다녀야만 했습니다. 거긴 그 옛날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 입었던 다 떨어진 바지라든가, 밑창이 닳고 닳아 구멍이 뚫린 고무신, 고향에서 보내온 약간의 조와 수수를 담아두는 데 썼던 누렇게 바랜 마직 주머니 같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빛도 들어오지 않았고 비라도 오면 바닥에 물이 고였기에, 거기선 많은 것들이 서서히 부패되어 마지막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지요. 아버지의 수첩 역시 조금만 더 늦게 발견됐더라면 그런 운명을 맞이했을 겁니다. 썩어서 사라져버리고 결국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無로 변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렇게 되기 직전 누군가가 그것들을 지상으로 끌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니까,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히로히토의 라디오 방송이 끝나고도 꽤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이 엄청나게 끔찍한 악몽을 꾸다 깨어나게 됩니다. 편의상 그를 가와사키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가와사키 의장은 번쩍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꿨어요?’ 아내가 묻지만, 가와사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입에 담기 두려울 정도로 너무나도 무서운 꿈이니까요. 의장은 다다미방의 문을 열고 나와 조그만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볼 겁니다. 방금 전 그의 꿈속에선 그 하늘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고, 그 사이로 아직도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혼들이 구슬피 울며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지요. 그는 언제부턴가 이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오래전 도시의 하늘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난 뒤부터 일어난 일들이었지요. 국가도, 오사카항에 가면 언제나 주둔해 있는 미군들도, 그건 버섯구름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하나둘씩 짐을 챙겨 어딘가로 가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이곳은 저주받은 게 확실하네. 자네도 괜히 여기서 머뭇대지 말고 빨리 떠나게나.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죽어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야.’ 영문 모를 암으로 아내를 먼저 보낸 시장이 결국 사임하고 멀리 떠나며 남긴 말이 이 정도였으니, 당시 도시의 민심이 얼마나 흉흉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가와사키 의장이 그런 악몽을 꾼 뒤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도시가 점점 죽어가는 건 구천을 떠도는 억울한 영혼들 때문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잘 달래준다면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시름시름 앓다 죽어가는 사람도 생기지 않을 거라 믿는 겁니다. 그는 도시 구석에 있던 조그만 원폭자료관을 떠올립니다. 거길 새로이 정비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하나씩 새긴 위패를 세워주자, 아마도 그런 계획을 세우겠지요. 의장이 얼마 남지도 않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제시한 이 의견은 바로 만장일치로 통과됩니다. 처음에, 의회 의원들은 위패를 둘 새로운 부지를 확보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예산 부족이라는 문제에 부닥치게 되지요. 그리하여 지하 창고를 깨끗이 치우고 깔끔하게 꾸며 위패를 안치할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어차피 창고엔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조선인들의 유품이 몇 점 남아 있을 뿐이니 상관없지 않냐고들 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그들은 죽은 나가사키 시민들의 이름을 위패에 새기려고 했을 뿐, 그 외의 다른 사람들, 즉 이름도 없이 죽은 다른 존재들에 대하여는 어차피 신경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하 창고를 정리하기 며칠 전, 그들은 미쓰비시 중공업 부지에 남겨져 있던 조선인들의 유품에 관한 서신을 한국 정부에 보냅니다. 편지엔 모년 모월 모일, 자료관 지하 창고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유품들을 모두 치우려고 하니 찾아가길 바란다는 나가사키 시의회의 공고와 함께 몇 장의 목록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고무신, 바지, 곡식 주머니 등등, 창고에 남아 있던 물건들의 종류와 개수가 적힌 목록표였지요. 그리고 나에겐 지금 그것이 보입니다! 리스트 맨 뒷장에 쓸쓸히 기록되어 있을 다음과 같은 한 줄이 말이에요. ‘수첩 1권, 연필 2자루. 표지 안쪽에 수첩 주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세 글자의 한글이 적혀 있음.’

하지만 그 서신은 담당 부서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서신을 맨 처음 받은 한국 정부의 우편물 분류 담당 직원이 실수를 저지르는지도 모르지요. 사실 그때 그는 좀 우울한 기분으로 우편물 행낭을 열어보는 중이었습니다. 벌써 점심시간이 반 이상 지났는데도 열어서 확인해야 할 행낭이 아직 다섯 개나 더 남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앓고 있는 불행한 공무원이기도 했습니다(편의상, 이번엔 그 공무원을 오씨라고 부르기로 합시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하루 세끼 쌀밥을 먹어야 소화가 잘되고, 그래야 정신 집중이 되어 일의 능률이 오르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쌀은 밀이나 다른 곡물에 비해 장에 부담이 덜 가고 소화가 잘되는 곡식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일 년 전 국회에서, 높은 분들은 ‘점심엔 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말고, 팔지도 말자!’라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킵니다.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니만큼 오씨는 그 취지를 십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점심마다 밀가루로 된 음식을 먹는다는 건, 그에겐 크나큰 고역이었습니다. 소화가 안 되고 장이 더부룩하니 언제나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수척해져갔던 거지요. 그래서 결국 복통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그는, 하필이면 그날 정부 청사 건너편 작은 골목의 밥집에 몰래 점심 예약을 해뒀던 것입니다. 비록 정부미米지만 쌀밥에 된장국이라도 먹으면 장이 편안해져서 오후엔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 여겼으니까요. (물론 나중에 그는 우편물 행낭을 확인하느라 밥집에 가지 못하게 됐던 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매일 점심때면 밀가루 음식 대신 쌀밥을 먹으러 몰래 들르던 직장의 높은 분들이 포진해 있었으니까요. 그것도 모르고 그날 단 한 번 쌀밥을 먹으러 들렀던 오씨의 동료는 호된 질책을 당하고 시말서까지 쓰는 수모를 겪게 되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오씨는 그런 미래를 알 리 없었고, 따라서 나가사키에서 온 우편물 행낭을 확인할 즈음엔 우울의 극치를 달리고 있던 겁니다.) 
그런데 교수님, 그리고 앤드루 씨, 당신들은 우울할 때 일을 해본 적 있습니까? 그래요, 기분이 다운되면 누구나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오씨 역시 예외는 아니었어요. 게다가 나가사키에서 온 그 봉투엔 수신인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았고, 그저 ‘관계자 앞’이라고만 되어 있었지요. 아니, 관계자라니, 대체 누가 관계자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오씨는 자기가 직접 ‘관계자’를 찾아 서신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건 그날의 점심식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그의 기분은 땅속까지 가라앉고 우울은 바닥을 쳤습니다. 허기와 복통, 분노로 인해 어둡고 창백해진 얼굴로 봉투를 여니, 하물며 그 편지는 모두 일본어로만 적혀 있지 뭡니까. ‘후.’ 그는 한숨을 내쉽니다. 편지 뒤에 호치키스로 대강 찍어서 묶은 몇 장의 표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건 아마 그때였을 겁니다. 종이를 한 장씩 넘겨보던 그 공무원은, 뭐라고 쓰여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목록의 맨 끝에서 드디어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세 글자의 한글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네,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지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지요! 
이득수.
그렇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 그것도 한국인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오래도록 그걸 들여다보다가, 혹시 정부 부처 관계자들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오씨는 청사 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묻습니다. ‘혹시 이득수란 사람 알아?’ 하지만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결국 그는 복도에 걸린 괘종시계가 두시를 가리킬 즈음 사무실로 돌아옵니다. 점심을 못 먹은지라 무척이나 의기소침해져 있던 오씨는 왠지 입이 쓰고 화가 났습니다. 아니, 화가 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건 미래형 문장들이에요.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 모두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일종의 예언이란 뜻이지요.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지구적 규모의 대예언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개인적 규모, 한 사람의 망각되고 만 수첩에 대하여 예언하는 것도, 우리 같은 초능력자들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싶군요. 한 사람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건 한 세계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일과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여하튼, 허기가 지고 복통이 심해져서 화가 난 오씨는 결국 수신인 불명의 그 기이한 편지를 ‘보류’라는 딱지가 붙은 검은색 파일에 끼워, 사무실 구석 철제 캐비닛 맨 아래 서랍에 던져넣고 맙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담배라도 한 대 피운 뒤 다시 돌아와서 그 편지봉투의 수신인인 ‘관계자’에 대해 알아볼 요량이겠지요. 그러나 오씨가 청사 현관 앞 화단의 돌멩이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던 그 짧은 시간 동안, 편지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고 맙니다. 그 사연은 다음과 같은데, 그날 원래 오씨와 같이 식당에 쌀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던 동료 공무원(다시 한번 우린 편의상 그를 박씨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박씨는 앞서 말했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밥집에 단 한 번 들렀다가 시말서까지 쓰게 된 불운의 사나이 말이에요)은 슬프고 불안한 마음으로 청사 현관으로 걸어들어옵니다. 마침 저기 건너편 화단에 오씨가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박씨의 눈엔 보이지 않지요. 국가 재건의 이 중대한 시기에 혼자만 쌀밥을 먹으려다 들키고 말았으니, 앞날이 너무 걱정되어 그 어떤 것에도 눈길을 돌릴 수 없던 겁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걸로 보여 처벌을 감면받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의욕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캐비닛을 정리하는 작업에 돌입합니다. 그동안 처리를 미뤄뒀던 ‘보류’ 파일들을 모두 깔끔하게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 순간이지요. 박씨는 성큼성큼 구석으로 걸어가 녹슨 철제 캐비닛 문을 열고 맨 아래 서랍에 있던 파일 뭉치를 가방에 쓸어담습니다. 원래 그 파일 안엔 박씨가 꽤 오래전부터 대충 분류하여 넣어뒀던 몇 장의 편지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건 거의 대부분 서독 남부에 있던 에슈바일러 탄광이라는 곳에서 부쳐온 일괄 우편물이었습니다. 그즈음 에슈바일러 탄광에선 약 삼백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지하 천 미터가 넘는 깊은 갱도에서 석탄을 파내고 있었는데, 대체 그들이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정부 관계자에게 편지까지 보냈던 것일까요? 설마 그 광부들이 그 편지에 ‘이곳은 날씨가 참 좋고 바람은 산들산들 불어온다.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라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적어 보낼 린 없을 테지만, 어쨌든 그것들은 외교적으로도 그리 중요하지 않고, 따라서 굳이 관계부처 책임자에게 전달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만한 그런 서류들인 게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박씨가 그걸 굳이 ‘보류’ 파일에 보관해두진 않을 테니까요. 네, 맞습니다. 독일에서 광부들이 보내온 편지는 그야말로 별것 아닌 내용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말이에요. 고국에서 보낸 고춧가루를 여기 사는 한국인 통역이 가로챈 것 같은데 정부 차원에서 확인을 좀 해달라, 광부복이 너무 커서 일하기 힘드니 우리에게 맞는 옷을 지급하라고 독일에 요청해달라, 등등 말입니다. 사실 박씨는 한국에서 보낸 고춧가루가 머나먼 독일 땅에서 분실된 사건을 어느 부서에 보고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맞지 않는 광부복에 대한 문의는 어떤 부서에 어울리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옷에 대한 것이니 문화예술 관련 부서일까? 혹은 그 옷을 지급하려면 돈이 들 테니 재정경제 관련 부서일까? 아니, 어쩌면 결국 모두 외국에서 온 것이니 외교통상일지도 몰라. 이런 식으로 고민만 거듭하다가 그냥 어쩔 수 없이 ‘보류’라는 파일에 넣어두는 걸 택한 거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쌓이고 쌓인 ‘보류’ 파일의 양이 어느 수준을 넘으면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속한 부서의 원칙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 ‘처리’란 게 대체 무엇이냐고요? 네, 당신들이 상상하는 바로 그대로입니다. 보류 파일이 캐비닛 서랍을 꽉 채우면, 박씨와 오씨는 그걸 커다란 자루에 담아 청사 뒤 소각장으로 지고 갔습니다. 그런 다음 그 모든 사연들을 와르르 쏟아넣고 성냥불을 붙였지요. 보류되고 만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활활 타올라 무無가 되었습니다. 아니, 무無가 될 겁니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나중에 박씨는 <이제는 말할 수도 있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해명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고요? 하, 정말 답답하군요. 이건 모두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던가요? 두고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삼십 년 후, 저기 머나먼 극동아시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모니터링해보라고요. 그럼 화면에 한 전직 고위공무원이 나와 어느 우울했던 시대에 대하여 더듬대며 회고하는 장면을 보게 될 테니까요.) 여하튼, 거기서 그는 이렇게만 말합니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안 그래요?’
 
그럼 이제 다시 박씨와 캐비닛 이야기로 되돌아가볼까요? 그는 서랍을 열고 수많은 ‘보류’ 파일들을 미친듯이 자루에 담습니다. 서두르는 게 좋단 생각이 들어 손놀림은 점점 더 빨라지지요. 그러느라 그는 나가사키에서 온 서신이 아직은 ‘처리’되어야 할 때에 도달하지 않았음을 미처 인지하지 못합니다. 결국,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의 직인이 찍힌 그 누런 서류봉투는 갖가지 사연이 적힌 다른 편지들과 함께 자루에 담겨 소각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불이 붙었고 너무나도 가뿐하게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습니다. 아니, 불어옵니다(살짝 귀띔해드리자면, 사실 그건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 나의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이 일으킨 바람이었습니다. 그때 그 어느 추운 땅에서 내 동생은 기침을 하고, 그로 인해 주변의 공기에 미세한 난류亂流가 형성되더니 그 기류가 점점 커져 서울까지 불어가는 거대한 편서풍이 되는 거지요―잘 아시겠지만 요즘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나비효과라고 부르더군요―어쨌든 그런 식으로 나의 동생은 아버지의 수첩을 망각으로부터 구해내지만, 그 자세한 사연은 좀더 나중에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바람 덕분에, 소각장에서 타오르던 종이 몇 장이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올랐고요. 그렇게 날아오른 종이 중 하나가 바로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의 편지에 첨부되어 있던 목록의 맨 뒷장이리라는 건, 이제 여러분 모두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시겠지요?
때는 바야흐로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고, 그래서 종이는 훨훨 날아 국토를 가로질러 영서 지방의 어느 마을에 도착합니다. 거기서 그 종이는 마치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상공을 몇 바퀴 돌더니 어떤 작은 집 마당에 천천히 떨어지지요. 때마침 마당에서 놀고 있던 한 소녀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종이 한 장을 발견합니다(어쩌면 소년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는 조심스레 그 종이를 집어들고 앞뒤로 살펴본 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처음엔 삐라인 줄 알았지만(그래서 신고할 마음도 먹지만, 왜냐하면 그런 걸 신고한 반 친구가 경찰서에서 주는 공책과 삼십 센티미터 자를 자랑스레 갖고 다니는 걸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으니까요), 왠지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될 테지요. 그냥 구겨서 버릴까 하다가 문득, 그 소년 혹은 소녀는 자기 집 다락방의 낡고 오래된 마분지 상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이는 때로 심심함을 견딜 수 없을 때 다락방에 올라가 거기 마구 쌓여 있는 물건들을 뒤지는 취미가 있었거든요. 그중 가장 재미없는 것이 바로 그 마분지 상자였습니다. 그 안엔 아이가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잔뜩 적혀 있는 수첩과 노트와 누런 신문과 빛바랜 옛날 사람의 사진 같은 것들이 가득하니까요.
사실 그 상자는 예전에 거기 살던 노인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라고 하는데, 물론 아이가 그에 대하여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긴 그건 당연한 일인데, 원래 젊고 어린 존재들은 마치 딴 세상에서 온 듯 왕창 늙어 있는 주름투성이 인간에게 무관심한 법 아닙니까. 그들이 늙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적어도 스스로가 이젠 젊지 않다는 자각을 하기 시작할 즈음이 아닐까요? 어쨌든, 소년 혹은 소녀는 자기가 주운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다락방 마분지 상자 안에 있는 것들과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마침내 아이는 종이를 잘 접어서 다락방으로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런 다음 그 마분지 상자를 열고 무심하게 던져넣지요. 그러고도 한참 후, 그러니까 정말로 무척이나 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아마도 나나 교수님 같은 사람들이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을 그런 미래에, 아이는(그땐 이미 그도 무척 나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만 말입니다) 다락방의 마분지 상자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젠 그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바로 내 아버지의 수첩을 비롯한 마분지 상자 안 물건들의 기기묘묘하고도 구구절절한, 그야말로 웃기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그런 사연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럼, 이쯤에서 우리는 다시 원폭자료관 증축 공사를 준비하던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에게 돌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건 그 편지가 아니라 거기 첨부된 목록 맨 끝에 기재된 낡은 수첩의 행방이니까요.
의장은, 편지를 보낸 뒤 며칠 동안 회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미 알다시피, 회신 같은 건 오지 않지요. 한국에선 아무도 지하 창고 구석에 쌓여 있는 다 떨어진 고무신이나 낡은 바지, 혹은 한때 콩이나 조, 수수 등을 담았던 곰팡이 핀 마직 주머니 따위엔 관심이 없으니까요. 만약 의장이 미신을 믿지 않았다면, 그런 유품들은 애당초 더 빨리 불에 타 없어졌을 겁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죽은 자들이 남긴 물건엔 그들의 영혼이 들러붙어 있을 거라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요, 무라카미(아니, 가와사키였던가요? 하긴,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이제부터 나가사키 시의회 의장의 이름은 그냥 무라카미로 하겠습니다) 의장은 두려웠던 겁니다. 만약 죽은 자들이 유품을 함부로 없애버렸다고 자기를 원망하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심장이 미칠 듯 두근댔지요. 그래서 사진 속 그의 표정이 그리도 어두웠던 겁니다. 아, 무슨 사진을 말하는 거냐고요? 바로 이겁니다. 한번 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