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3. 엑스가 자신의 기이한 탄생에 대하여 증명하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한국 땅에서 태어났지요. 나의 아버지는 일본에 강제징용되어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노역하던 중 1945년 8월 9일 투하된 원자폭탄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들(나와 내 동생, 앞으로 차차 말하겠지만 우린 쌍둥이로 태어났어요)을 낳고 산욕열을 앓다 얼마 후 돌아가셨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와 내 동생 역시 1945년 8월 9일에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너는 어릴 때 이러이러했고 그때 세상은 저러저러했다’라고 말해주기 전엔, 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 말이지요. 하긴 세상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모두 그런 식으로 주입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유아기나 유년기의 모든 사건, 그리고 태생 이전의 역사적 사실이 모두 다른 누군가를 통해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아, 아니라고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요? 하지만 제 경우엔 확실히 그렇습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 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 온통 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건, 정말이지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구석이 있거든요!”

여기까지 말하고, 엑스는 잠시 탁자 위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물을 마셨다. 그러더니 예의 그 조용하고 예절 바른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여하튼,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모두 잃었습니다. 아니, 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남겨진 건 샴쌍둥이로 태어난 동생뿐이었던 겁니다. 하긴 그가 형이고 내가 동생이라 해도 상관없겠지요. 우린 어차피 한날한시에 어머니의 몸밖으로 나왔으니까요. 게다가 처음부터 우린 한덩어리였고 마치 영원히 헤어지지 않겠다는 듯 꼭 붙어 있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결국 우리는 서로 떨어지게 됐고, 그 이후론 다신 볼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지요.” 

말을 멈춘 엑스가 담배를 찾았다. 그때만 해도 ‘금연’이라는 개념 같은 건 없었고, 따라서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경고 문구 같은 것이 담뱃갑에 인쇄되어 있지도 않았던 터라, 엑스는 자연스럽게 입에서 연기를 내뿜었다. 곧 존 휠러 교수의 좁은 연구실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같은 담배 연기로 꽉 차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연기 속에서 엑스는 마치 상반신만 보이는 유령처럼 둥둥 떠 있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우린 그야말로 천애고아나 마찬가지인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우릴 거두어준 남자가 바로, 이 사람이지요.” 

짙은 연기 속에서 그가 주머니를 뒤지더니 조그만 흑백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딘지 낯익어 보이는 사진 속 얼굴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죽은 내 부모의 오래된 앨범에 끼워져 있던 많은 얼굴들과 닮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기고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포즈를 취하던 가엾은 이들. 은색 반사판과 번쩍이는 조명이 달린 사진기 앞에서, 그들의 내면은 불안으로 요동쳤다.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을 여전히 믿으면서도 그런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바짝 긴장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엑스가 보여준 사진 속의 남자 역시 그러했다. 그의 꼭 다문 입술은 초상화가 대신 펑, 하고 요란하게 불빛이 터지는 기계 앞에 자신을 내맡겨야 했던 사람만이 느낄 법한 기이한 불안으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는 걸 한참이나 바라보던 엑스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호선이란 사람입니다. 내가 태어나던 당시 조선에선 알아주는 지식인이었고, 부자였지요. 나에겐 은인이랄 수도 있는 남자이기에 항상 이렇게 사진을 가지고 다닙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는 게 낫겠군요. 김호선은 나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내 근원과 출생에 대한 모든 기억과 기록이 그로부터 나왔으니까요. 사실, 나의 진정한 첫번째 기억은 해가 환히 비쳐드는 어느 창가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서 난 카드 맞히기 놀이를 하고 있지요. 내 앞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는데, 분명 김호선과 그의 애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얼굴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난 그저 카드놀이에만 열중하고 있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들은 두꺼운 마분지로 만든 카드 한 벌을 내놨고, 그걸 뒤집어서 문자나 그림이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내게 맞혀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어렸던 나는 카드 뒷면의 보이지 않는 형태를 모두 맞혔습니다! 정확히 기억해요. 내가 뒤집힌 카드를 손으로 가리키며 ‘일!’이라고 외치면, 남자는 그걸 들춰서 맞는지 확인하곤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놀란 표정으로 장하다며 내 머릴 쓰다듬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어렸기에, 내 유일한 보호자의 칭찬이 그저 행복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는 다음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난 또 칭찬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최대한 정신을 집중한 채 카드를 노려봤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마음속 어딘가에 그 뒷면에 그려진 형태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말했습니다. ‘사과요. 사과가 그려져 있어요. 빨간색이네요.’ 그 순간 여자가 외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군요. ‘오, 이런! 이애는 천재가 아닐까요?’ 그러자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천재 같은 거랑은 달라. 이애는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 바로 니체가 말한 초인일지도 몰라. 이건 기적이야, 기적.’ 그때만 해도 나는 누구나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나 아닌 다른 이들도 모두 그렇게 심안으로 사물을 볼 거라 믿었다, 이 말입니다. 난 내가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지요.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나의 첫번째 자발적인 기억은 최초의 천리안千里眼 테스트를 받던 봄날의 그 창가라는 것. 그 이전의 모든 사건은 김호선이 종종 저에게 들려준 옛날얘기 같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한국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는 나가사키의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만주에서 마적단 노릇을 하다가 중국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역시 산욕열로 죽기는커녕 샴쌍둥이였던 나와 동생을 팔아넘긴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잘살았을지도 모르고요. 지금도 그렇듯이 오래전부터 샴쌍둥이는 경탄과 신비의 대상이었고, 많은 이들이 여러 가지 목적으로 그 기괴한 생명체를 필요로 했으니 말입니다. 때론 과학적인 목적으로(아마 그들은 우릴 해부하여 자연의 신비를 캐낼 생각이었을 겁니다) 때론 종교적인 목적으로(예나 지금이나 우리 같은 존재들은 신의 분노를 대변합니다. 흉측한 모습을 한 우리는 미치광이 종교인들이 신자들을 겁주고 을러대기 딱 좋은 존재였을 테니까요) 혹은, 그저 곡마단의 구경거리 같은 돈벌이 수단이 되기 위해(자연을 거스르는 기묘한 생명체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건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 같은 존재들은 여기저기로 팔려갔을 것입니다. 아니, 사실 알고 보면 난 샴쌍둥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애초부터 형제 같은 건 없었을 수도 있지요. 내 한쪽 손이 의수인 것은, 나와 동생이 분리될 때 각각 한쪽 팔과 다리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고아로 떠돌던 내가 경성 시내에서 전차에 치였을 때 손을 하나 잃고 말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렇지만 과거에 대한 이 모든 가능성은 김호선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로 인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되어버렸고, 나의 시원始原은 오로지 하나의 줄거리로 고정되고 말았던 겁니다. 이를테면, 샴쌍둥이,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원폭 투하, 죽은 어머니, 사라진 동생, 이런 것들로 말입니다. 하긴, 그렇다고 해서 김호선이 나에게 모든 걸 다 말해준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분리되어 떨어져나간 동생에 대하여는 별로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그가 죽은 뒤에야 난 그가 남긴 노트를 훑어볼 수 있었고, 나와 내 동생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그 노트(표지에 ‘비망록’이라고 적혀 있는 옛날식 공책이었어요)에서 알게 된 사실들을 간단히 요약하여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린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지하의 은밀한 수술실에서 금지된 수술을 받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건 정말로 기적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샴쌍둥이의 분리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그런 수술은 그저 의사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일종의 실험에 불과했으니까요. 아마 의사들도 처음부터 우리가 살아날 거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학문적 호기심과 실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거의 서른여섯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우리를 각각 떼어놓았을 때, 나와 동생은 이미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고 하니 말이에요. ‘실패야. 역시, 이건 현재의 의학기술론 불가능한 일이었어.’ 수술을 진두지휘했던 외과 과장이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하자, 다들 수술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피투성이로 누워 있던 나와 동생에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그때 그녀는 우리를 가엾게 여겼던 걸까요? 알코올을 묻힌 솜으로 나와 동생의 봉합 부위를 잘 닦은 후 몇 겹의 무명천으로 잘 싸둔 뒤 복도로 나가는, 그런 자비로운 행동을 한 걸 보면 말입니다. 여하튼,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환자들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그녀는, 문득 아까 무명천으로 잘 싸둔 죽은 두 아기를 떠올렸습니다. ‘어디 좋은 데라도 묻어주면 좋으련만!’ 마음씨 고운 간호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휑뎅그렁하고도 음산한 지하 수술실의 문을 열었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도 깜짝 놀라 소릴 질렀겠지요. 왜냐하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두 아이가 살아 숨쉬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비록 기운도 없고 사실은 거의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숨이 붙어 있었고 작은 몸을 조금씩 꿈틀대기도 했습니다. 간호사는 수술을 집도한 외과 과장에게 달려갔습니다. ‘선생님, 애들이, 그애들이……’ 간호사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헐떡거리자, 의사는 짜증을 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그제야 그 친절한 간호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말했습니다. 분리 수술을 받은 샴쌍둥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말입니다. 외과 과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건 그에게도 분명 희소식이었을 테니까요. ‘샴쌍둥이 분리 수술, 세계 최초로 성공!’ 신문의 이런 헤드라인이 벌써부터 눈에 보이는 듯했겠지요. 그는 당장 수술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이 좀전에 억지로 떼어놨던 쌍둥이가 가냘픈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는 걸 보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두 명의 분리된 샴쌍둥이에겐 특실이 주어졌다고 합니다. 비록 몸에 큰 흉터가 생긴데다 한 아이에겐 팔이 하나 부족했고, 또다른 아이에겐 다리가 하나 부족했지만, 여하튼 그들은 살아남았고 서서히 회복되어갔으니까요! 이제 곧 현대 의학 기술의 총아가 될지도 모를 그 아이들을 위하여 외국에서 최고급 분유까지 공수됐습니다. 깡통에 활짝 웃는 통통한 아기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한옆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상표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분유였지요. 듣기론 ‘새 둥지Nestlé’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 회사가 아이들이 자라날 때까지 무상으로 분유를 공급하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는군요. 왜 그들이 그런 선심을 베풀었냐고요? 글쎄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로 넘치는 박애 정신과 인류애, 그리고 의학기술 발전에의 열망 같은 것들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좀 다른 종류의 소문이 떠돌았던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 기괴한 쌍둥이에게 자사의 분유를 공급함으로써 몇 푼 들이지 않고도 세계적인 홍보가 가능하다는, 그런 계산속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덕분에 분리된 쌍둥이들은 공짜 분유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넓은 바다를 건너오는 동안 부패하는 걸 막기 위해 철저히 지방을 제거한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탈지분유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게 빨아먹고 더 달라고 보채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커가는 동안, 아마 의사들은 샴쌍둥이 분리 수술의 최초 성공을 보고하는 엄청나게 두툼한 논문을 발표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의사들이 그런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관하여는 영국의 저명한 의학 저널인 『랜싯』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을 참고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 역시 제가 나중에 확인한 거지만 말입니다. 강조해 말씀드리는데, 나는 김호선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그리고 나중에 그의 비망록을 통하여 알게 된 이야기들 모두에 대하여 나름대로 사실 확인을 시도했었어요. 왜냐고요? 음, 그건 아무래도 최대한 진실에 가까워지고 싶다는 소망 때문 아니었을까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만큼은 오직 사실만을 알고 싶다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어쨌든, 유서 깊은 의학 저널인 『랜싯』은 그 명성만큼이나 철저하고 꼼꼼하게 기록물을 보존하기로도 유명한 잡지입니다. 세계 각지의 의학계에서 보내온 모든 편지와 논문, 연구계획서 등등을 거대한 도서관에 보관해두고 있다고 하니까요. 몇 년 전, 나의 요청에 따라 당시 편집장이었던 로버트 레이턴 경은 어떤 논문 초록의 사본 한 부를 보내왔습니다. 뭐, 당연히 배송료는 착불이었는데, 그 가격이 얼마나 비쌌던지 제가 좀 당황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받자마자 포장을 뜯고 서류를 넘겨보니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겉표지에 감춰진 진짜 표지가 나타났습니다. 왼쪽 상단엔 ‘의학 전문지 『랜싯』 편집장 귀하’라고 적혀 있고 오른쪽 하단엔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외과’라는 글자가 한자로 쓰여 있는 오래된 표지 말입니다. 논문의 제목은 ‘세계 최초 결합쌍생아 분리 수술의 과정과 향후 과제’였는데, 역시나 한자로 또렷하게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에겐 그 논문 사본의 사본이 한 부 있습니다. 이 가방 속에 소중히 넣어서 가져왔는데, 어떻습니까, 한번 보시겠습니까?” 

엑스는 잠시 말을 멈췄고, 동의를 구하려는 듯 나와 존 휠러 교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손목시계를 힐끗 본 교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엑스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가방을 뒤지더니 얇은 서류 뭉치를 꺼내 우리에게 내밀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들이 녹슨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여길 한번 보세요.” 엑스가 가리킨 것은 사본의 맨 윗부분이었다. 거기엔 한자가 인쇄되어 있었는데, 나와 존 휠러 교수는 읽을 수 없는 글자였다. “여기, 이렇게 적혀 있지 않습니까? 세계 최초 결합쌍생아 분리 수술의 과정과 향후 과제.” 미스터 엑스는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짚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 “자네도 한자를 모르는가?” 존 휠러가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서류 사본을 한 장씩 넘겨봤다. 대략 열 페이지 분량이었는데, 마지막 장까지 넘겨본 교수가 엑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영문 사본은 없습니까?”

그러자 엑스는 문득 엄청나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바로 빙긋이 미소 지으며 싹싹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존경하는 교수님, 아시다시피, 지금 보고 계신 논문은 원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본도 아니에요. 이건 사본의 사본이지요. 제가 깜빡하고 말씀드리는 걸 잊었는데, 사실 『랜싯』의 편집장인 레이턴 경에 의하면(아아, 그분에게 신의 축복이 있길! 왜냐하면 바로 몇 년 전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원본엔 영문판 초록도 첨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런던 교외에 있는 출판사 서고에 따로 보관되어 있었다네요. 본사 도서관엔 일본어판 사본만 보관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1952년, 서고가 있던 런던 외곽 지역에 큰 화재가 일어난 겁니다. 불은 한 블록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서 시작돼 바람을 타고 서고까지 옮겨왔다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손쓸 겨를도 없이 『랜싯』의 서고는 전소됐고, 거기 보관되어 있던 소중한 자료들은 모두 타버리고 말았던 거지요. 따라서 제가 『랜싯』에 논문 사본을 요청했을 땐 이미 그들이 가진 거라곤 본사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일본어 사본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엑스는 나와 존 휠러 교수를 번갈아 보며 덧붙였다.

“물론 원하신다면, 저는 이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네,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곁눈으로 보니 존 휠러 교수는 복잡한 표정으로 동양인 초능력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니, 됐습니다, 미스터 엑스. 당신의 말을 믿기로 하죠. 비록 사본의 사본이지만, 여기 로버트 레이턴 경의 직인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진짜 논문의 원본은 구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계 최초 결합쌍생아 분리 수술의 과정과 향후 과제」의 영역본을 읽지 못했다. 초능력자를 테스트하는 일정이 너무 빡빡한 탓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때 국가에선 소련과 그 추종국들에 대항하기 위한 신무기 개발을 계획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위하여 정보기관(그 이름을 아직은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달라. 지금도 그들은 나를 감시하고 있고 시시각각 나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내가 미국 땅을 떠나 좁고 외진 한반도의 어느 마을 도서관에서 이 원고를 집필할 수밖에 없는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은 전국 각지의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엑스와 같은 초능력자들에 대하여 검증을 의뢰해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검증’이라는 과정 자체도 이미 요식행위에 불과했다는 걸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됐다. 이미 팀이 꾸려지고 천문학적 수치의 예산까지 할당된 상황에서, 그저 의회에 보고할 약간의 과학적 근거가 필요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4. 엑스가 초능력을 보여주고, 저자가 유리 겔러에 대하여 말하다


어쨌거나, 미스터 엑스는 1945년 여름 경성이라는 도시에서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분리 수술에 성공했다는 외과의사가 작성한 논문 사본의 사본을 돌려받은 뒤, 소중하게 접어 비닐 파일에 끼워넣었다. 파일을 넣은 낡은 가죽가방의 지퍼를 꼼꼼히 채우며, 그는 겸연쩍게 웃었다.

“당신들에겐 이런 사본들이 별것 아닌 걸로 보일지 모르지만, 저에겐 정말로 귀중한 자료입니다. 태생에 대한 일종의 증명서 같은 거니까요.” 

그때 존 휠러가 말했다.

“잠시 쉬었다 할까요? 긴 이야기에 모두 지쳐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나도 나가서 손 좀 씻고 커피도 한잔 마신 뒤 돌아오겠습니다.”

교수가 나간 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며 연구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기이한 이야기를 너무 오래 들어서인지 이상한 노곤함이 온몸을 덮쳐왔다. 할 수만 있다면 소파에 모로 누워서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어쩌면 그 상태로 나는 잠깐 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지, 문득 어디선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건너편 소파에 앉은 미스터 엑스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아, 라이터 드릴까요?”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차린 내가 주머니를 뒤지며 말하자 엑스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라이터 같은 건 나에겐 무용지물이지요. 담배에 불 붙이는 것쯤은 이렇게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그는 마치 무대 위의 마술사처럼 현란한 손동작으로 괴상하기 그지없는 곡예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 작자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아마도 이런 의문을 잠시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데 약 십 초 정도 후, 엑스의 왼손 검지 끝에서 갑자기 파란 불꽃이 슈욱, 소릴 내며 피어올랐다. 깜짝 놀라는 내 표정을 보더니 엑스는 의기양양하게 담배에 불을 붙였고 입으로 동그란 연기를 만들어 공중으로 뿜어올렸다.

“훗, 놀라셨습니까? 사실 이건 제 능력 중에서도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속합니다. 그저 가벼운 묘기 정도로만 생각해주셔도 좋고요. 잘 아시겠지만, 세상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런 사람들(이렇게 말하며 그는 방금 휠러 교수가 나간 연구실 문을 턱으로 가리켰다)은 모든 걸 과학으로 규명할 수 있다고 믿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요. 아니, 어쩌면 그건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신을 왜 믿는다고 생각합니까? 바로 그 신이라는 존재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네 과학자들이 갈구하듯 신의 실체가 규명되고 그래서 누구나 신이라는 걸 볼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인간들 중 몇이나 그 믿음을 유지하게 될까요? 우리들의 능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건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세상의 잣대로 규명하고 판단할 수 없다 이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손가락으로 불을 붙이면,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자칭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봅니다. 그들은 나를 제임스 랜디 같은 마술사들과 동급으로 엮으려 합니다. 기이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우린 툭하면 그런 광대 취급을 받는 겁니다. 정말 억울한 일이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얘기를 듣다 말고 난 물었다.

“혹시 유리 겔러라고 아세요? 그 사람도 엄청난 초능력자라던데.”

그때만 해도 유리 겔러는 아직 사기꾼으로 밝혀지지 않았었고, 오히려 이스라엘 출신의 신비로운 초능력자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하튼, 내 질문에 엑스는 거만하게 웃었다.

“그놈은 사기꾼이죠! 조만간 그의 거짓이 밝혀질 거예요. 우리 같은 진짜들은 그런 가짜 따위 한눈에 알아보니까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오른손 검지를 내 앞에 대고 흔들었다.

“진짜는 달라요. 굳이 숟가락 같은 소품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거든요. 방금 보셨다시피 말이에요. 어떻습니까? 한번 더 보여드릴까요? 여기에 이렇게, 온통 정신을 집중하면 불꽃이 일어나거든요. 아주 쉬워요. 원한다면 가르쳐드릴 수도 있지만, 위험하니 아무때나 따라 해선 절대 안 되죠. 자칫하면 집을 완전히 태워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방금 전까지 파란 불꽃이 타오르던 그의 손가락 끝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덴 자국도 없고, 심지어는 뜨겁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걸까? 하긴 그럴지도 몰랐다. 그때 엑스가 말했다.

“역시 날 믿지 않는군요. 잘못 본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정말 이상합니다. 자기들이 눈으로 본 것도 믿지 못하니 말이에요.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공식적인 역사 같은 것들 말입니다―는 잘도 믿으면서, 왜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애써 무시하려고 하는 거죠?”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이 열리며 존 휠러 교수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 의견 3. 

앤드루 김은 이 뒷부분에 유리 겔러에 대한 자신의 경험담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그 내용이 너무 길고 재미도 없는데다 분량도 많기에, 여기엔 짧게 줄여서 요점만 적어둠을 양해 바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기나긴 법정공방이 벌어졌고, 마침내 유리 겔러는 판사와 배심원단 앞에서 숟가락 구부리기를 시연하라고 명령받았다. 겔러측 변호사는 의뢰인의 컨디션이 무척 안 좋다며 몇 번이나 공판을 연기했고, 결국 더는 버틸 수 없게 되었던 어떤 날, 판사와 배심원단 앞에 얼굴이 누렇게 뜬 유리 겔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판사가 직접 챙겨온 다섯 개의 숟가락을 차례대로 문질렀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불이 나도록 문질러대도, 약간이라도 구부러진 숟가락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유리 겔러가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포기하겠습니다! 포기한다고요!” 판사는 유리 겔러의 패소를 선언했고, 그는 자취를 감췄다. 겔러가 다시 나타난 건, 그로부터 십여 년쯤 지난 뒤 독일의 한 케이블 TV 방송에서였다. 거기서 그는 ‘초능력자 유리 겔러’가 아닌, 그저 독일 남부 시골 마을의 맛집 기행을 다니는 한물간 중늙은이 연기자로서의 유리 겔러였는데, 그런 그에게 출연자들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저어, 겔러 씨, 당신의 숟가락 구부리기는 정말로 트릭에 불과했나요?” 그렇게 묻는 그 출연자의 눈빛은 이상한 간절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엔 겔러가 제발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모든 건 초자연적 현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류 과학계의 음모였을 뿐 실제로 자신은 초능력자임이 확실하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사람의 애절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유리 겔러는 그런 그를 힐끗 쳐다봤다. 마침 강에서 잡아올린 오동통한 송어에 남부 지방 특산 소스를 잔뜩 바른 구이 요리를 우물우물 씹고 있던 그 왕년의 초능력자는, 손가락을 한 번 쪽 빨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휴, 그건 다 쇼였어요, 쇼! 형상기억합금이란 걸 아세요? 온도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는 금속의 일종이죠. 제가 구부렸던 건 바로 그런 특수한 재질의 숟가락이었어요. 자꾸 문지르면 온도가 올라가면서 숟가락이 살짝 휘는데, 보통 마술사들이 많이 쓰는 수법이죠. 뭐,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먹고살아야 했으니까요.” 질문을 했던 출연자는 우울한 표정으로 송어를 마저 씹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 같이 낚시터로 우르르 몰려갔다. 이제 송어 낚시를 직접 해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