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과거는 다가올 미래의 서막이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서




형제가 태어났을 때, 산 너머에서 검은 구름이 피어오르더니 문득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반으로 갈랐다.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분명 신령님이 노하신 게야!”

마을 한구석에서 혼자 살고 있던 무당이 사립문을 밀고 나와 외쳤다. 평소와 달리 색동저고리를 입지도 않았고, 머리는 쪽을 찐 듯 만 듯 흐트러진 게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무당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마을에 저주가 내릴 거다!” 

무당은 다시 한번 외쳤다. 실제로, 검은 구름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산 너머에선 뭔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그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거의 신통력을 잃었고 살짝 머리가 돌아버렸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천둥소리가 너무 컸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굉음에 웬만한 소리는 다 파묻히고 말았다. 늙고 머리가 하얗게 센데다 한 번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와 벼룩을 우수수 떨어뜨리는 무당의 말을 들은 사람은 옆집에 살고 있던 백정뿐이었다. 그는 숫돌에 칼을 갈다 말고, 마당으로 걸어나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봤다.

“무슨 변고가 있긴 있는가보군.”

그날 오전 잔치를 벌인 향반의 집에서 돼지를 잡고 온 백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기서 얻어온 돼지 오줌보를 아들에게 그냥 던져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찬모가 종이에 싸준 돼지 내장마저 아무런 조치 없이 아내에게 던져주지 않았던가. 

‘고수레를 했어야 하는데……’

백정은 한숨을 쉬었다. 아내는 신나서 그걸 들고 부엌으로 갔다. 분명 순대라도 만들고 있을 터였다. 부엌이래봤자 마루 옆에 난 작은 봉당에 불과했다. 바로 옆에선 돼지까지 키우고 있어, 엄청난 악취가 코를 찌르는 곳이었다. 어쨌든, 순대 생각을 하자 그 와중에도 입에 침이 고였다. 돼지 피를 넉넉히 넣고 각종 푸성귀를 다져 넣은 아내의 순대는 이런 날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받아와야 할지 말지를 생각하며 그는 한동안 사립문 앞에 서 있었다. 천둥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고, 산 너머에선 마른번개가 한없이 번쩍였다. 무당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불길한 예언을 끝없이 외쳤고, 결국 제풀에 지쳐 암굴 같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 천둥소리가 무엇인지 마을 사람들이 알았을 리는 없다. 그리고 설혹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고 해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어떤 건지 깨달았을 리도 없다. 소리의 정체와 의미를 알기 위해선 우라늄 원자가 어떤 식으로 쪼개져서 연쇄적인 핵분열을 일으키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하긴, 우라늄235의 연쇄 핵분열 메커니즘을 정확히 아는 물리학자라 해도, 섬나라의 어떤 도시에서 솟아난 거대한 버섯구름이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가로질러 지구 전체를 울리는 파장을 만들어낼 거라고 예측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바다를 건너온 버섯구름의 잔해와 엄청나게 큰 천둥소리는 결국 그날 그 순간 마을에서 태어난 두 사내아이의 운명마저 바꿔버릴 만큼 강력했는데, 영문을 모르던 그들의 어머니는 그만 두 눈을 꼭 감은 채 실신하고 말았다. 

깜짝 놀라 두려움에 빠진 건 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십 평생을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왔지만, 실신한 여자의 다리 사이에 놓여 있는 기괴한 생명체를 보고는 자기 자신도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국 산파의 직업정신이 승리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쓰러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엄청난 의지력으로 정신을 추스른 뒤 부엌에서 뜨거운 물을 가져와 그 기괴한 아이들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탯줄을 끊어낸 후 온몸에 묻은 피와 태반 찌꺼기를 씻어내자, 의외로 아이들의 얼굴은 맑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불쌍한 것들. 정말로 이 마을에 무슨 변고가 있으려나보다.”

산파는 그 기이하고도 우울한 생명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옆에 펼쳐둔 무명 이불 위에 눕혔다. 그런 다음엔 실신한 여자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얹었다. 잠시 후 여자는 눈을 떴고, 자신이 기절하기 직전 보았던 장면이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산파의 눈을 지그시 올려다봤다. 여자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산파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제가 본 게 모두 진짜란 말인가요?”

여자가 묻자, 산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무명 이불에 누워 버둥대고 있는 생명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쌍둥이로 태어난 두 명의 아이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세 개의 팔과 세 개의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 이제 어쩌면 좋아요? 애들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저런 괴물을 데리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죠?”

여자는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산파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계속 머리를 저어댈 뿐이었다. “아이들이 살 수는 있을까요?” 여자가 묻자, 산파는 머리 위쪽 허공을 가리켰다. “모든 건 하늘의 뜻에 달렸지. 나도 오십 평생에 이런 일은 처음이니 말이야.” 그러면서 그녀는 흙벽에 걸려 있던 마른 미역을 집어들고 부엌으로 갔다. 기괴한 생명체를 낳았어도, 어쨌든 출산은 출산이었다. 미역국 정도는 끓여주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았다. 여기저기 뜯겨 바람이 새는 창호지 문을 닫고 산파가 나가자, 여자는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옆엔 방금 자신의 몸에서 나온 두 개의―아니 하나라고 해야 하나―생명체가 팔다리를 힘차게 휘젓고 있었다. 각자 분리되어 태어났더라면 여자에게 큰 기쁨을 안겨줬을 사내아이 쌍둥이였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마치 서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하나로 붙어 있었고 그나마도 팔과 다리는 하나씩 부족한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런 애들을 ‘결합쌍생아’ 혹은 ‘샴쌍둥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이상한 노인으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를 받은 것은, 어느 추운 겨울 난방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시립도서관 장서실에서였다. 그때 나는 어깨를 최대한 움츠리고 손을 비비며 책을 읽고 있었는데, 제목은 ‘물리학’이었다. 『물리학』은 최신 물리학 이론을 다룬 책은 당연히 아니었고, 아마도 어느 사립대의 물리학 교재인 것 같았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한물간 구식 이론만을 지루하게 나열한 전형적인 교과서가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펼쳐보고 있던 부분만 해도, 스티븐 호킹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레너드 서스킨드의 새로운 블랙홀 이론이 다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 기이한 노인이 말을 걸어오기 직전 내가 읽고 있던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정보(information)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정보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중에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수첩을 펼치고 문장을 옮겨 적었다. 수첩이라고는 해도 사실은 공책에 가까울 정도로 큼직하고 두툼한 것이었는데, 거기엔 내가 이런 식으로 모아둔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나는 화들짝 놀라며 공책을 가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유행이 한참 지난 중절모를 쓰고 단정한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는 품이, 마치 1930년대 경성 거리에서 튀어나온 댄디 보이 같았다. 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노인의 등이 살짝 굽었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해서 왠지 모르게 수심에 가득차 보였다는 것 정도일까. 

“며칠 동안 자네를 지켜봤네. 보아하니,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가보군. 그리고 정보에도.”

노인은 이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봤다. 자기 말이 틀렸냐고 반문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모자를 벗으며 내 옆으로 와 섰다. 단정한 옷차림과 달리, 모자 속에 감춰진 노인의 흰머리는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눈짓으로 내 공책을 가리켰다. 

“방금 전 보니, 정보에 관한 문장을 옮겨 적고 있던데.”

그러더니 그는 다시 모자를 쓰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마치 오래된 친구 사이기라도 한 듯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그래서 말인데, 잠깐 매점에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자네에게 제안할 것도 있고 말이야.”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밖으로 나가며, 노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멀찍이서 사서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목소릴 높이면 당장이라도 쫓아올 기세였다. 이미 복도로 나간 노인은, 유리문 밖에서 내게 손짓을 하더니 급기야는 문을 툭툭 두드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사서가 드디어 일어섰다. 어깨에 카디건을 걸친 그 중년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노인이 유리문 밖에서 씩 웃었다.


매점은 한산했다. 우리는 바깥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역광 때문인지 노인의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창을 배경으로 보이는 모자의 검은 실루엣뿐이었다.  

“먼저, 사과부터 하겠네. 요 며칠간 자네를 몰래 지켜봐온 것에 대해서 말일세.”

노인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주름과 반점으로 뒤덮인 얼굴과는 달리 희고 깨끗한 손이었다. 분홍빛 손톱은 잘 다듬어져 있고 피부는 마네킹처럼 매끈했다. 하지만 얼떨결에 그 손을 잡았던 나는 깜짝 놀라며 손을 뗐다. 노인은 그런 내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주름진 입술 사이로 듬성듬성한 앞니가 보였다.   

“왜, 놀랐나?”

노인의 손은, 정말로 마네킹처럼 차갑고 딱딱했다. 그러니까, 진짜 마네킹의 손이었다. 그게 내가 나도 모르게 손을 놔버린 이유였다. 노인은 짓궂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다른 쪽 손으로(그 손은 정상인 듯 보였다) 마네킹 같은 자기 손을 빙빙 돌렸다. 끼익끼익, 나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의수義手일세.”

그러더니 그 이상한 노인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번 보겠나? 이거, 분리도 가능하거든.”

그는 어느 틈에 자신의 의수를 빼서 들고 있었다. 분리된 손목의 단면에 나사 구멍이 선명했다.

“아니, 됐습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요.”

나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도대체 누가 난방도 안 되는 엄청나게 추운 도서관 매점 구석에 앉아 남의 의수나 구경하고 싶어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그 기분 나쁜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나마 매점에 사람이 없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고 빙빙 돌리고 있는 백발노인과 마주앉아 있는 추레한 차림의 젊은 남자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그걸 명약관화明若觀火라고 하지.”

“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명약관화라고. 불 보듯 뻔한 일을 뜻하는 사자성어. 왜, 처음 들어보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당황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순간부터 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잔뜩 늘어놓아 나의 혼을 빼놨고, 결국 나는 횡설수설한 끝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방금 전 자네, 매점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누가 보면 나 같은 미친 노인네랑 마주앉아 있는 자네도 동급으로 취급할 게 불 보듯 뻔한 일이라고 여기면서 말일세. 그래서 내가 말한 걸세. ‘불 보듯 뻔한 일’, 그걸 사자성어로 명약관화라고 한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 걱정하지 말게. 자네는 중얼거리지 않았어. 그냥 속으로만 생각한 거야.”

그때 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죠? 저는 또 저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린 줄 알고 걱정했어요. 요즘 자꾸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겨서……”라고 말하다가, 나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네? 뭐라구요? 지금 제 생각을 엿듣기라도 한 거예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이번엔 내 말이 도통 어불성설이라는 걸 깨달았다. 생각을 엿듣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 맞아. 나는 생각을 엿들을 수 있다네. 물론, 자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멈추겠지만 말이야.”

노인이 짓궂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뜬금없이 그가 인자한 맛도 있어 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로 봤군. 사실 난 인자한 사람이지.” 노인은 이번엔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내 혼란스러운 표정을 보니 이 상황이 더 재밌어진 것 같았다. 

“저기,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지금 장난치시는 거죠?”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황당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노인에게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놀라거나 기분 나쁘게 했다면 미안하네. 사실 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을 수 있다고 해야겠지. 그래서 잠시 자네 두뇌에 내 청각의 통로를 열어놨었네. 그저 자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그 통로를 닫았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아무 생각이나 하라고. 지금은 자네 머릿속이 전혀 들리지 않으니까.”

그러면서 노인은 내게 윙크를 했다.

“지금 제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믿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앞으론 믿게 될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지. 왜냐하면, 난 미래도 어느 정도 내다볼 수 있거든.”

그러면서 노인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성한 쪽 손으론 의수를 다시 나사 구멍에 돌려 끼우고 있었다.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 소리는 텅 빈 매점 안에 기분 나쁘게 울려퍼졌다. 

“죄송하지만, 더 할 말 없으시면 저는 그만 장서실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오늘 안에 읽어야 할 책도 있고…… 여하튼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이상해진 노인의 헛소리 같은 걸 계속해서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어떤가?”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든 채 서 있었다. 

“저어 할아버지, 여긴 금연이라고요.”

인상을 쓰며 작게 속삭였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쪽 주머니에서 라이터마저 꺼내드는 것 아닌가. 나는 당황했다. 노인이야 금연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그러나 같이 있던 나까지 덩달아 몰상식한 인간이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때 그가 짓궂게 웃으며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졌다.

“걱정하지 말게나. 진짜로 피우려는 건 아니니까. 그냥 마음으로 피우는 것뿐이야.”

그는 라이터를 공들여 만지작거렸고, 조금 있다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시늉을 했다. 그다음엔 음미하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그윽이 쳐다봤다.

“심안心眼이라고 하지. 마음의 눈 말이야.”

담배를 든 손을 아래로 내리며 노인이 말했다. 그때 나는 기묘한 것을 봤다. 아니, 느꼈다고 해야 할까. 노인의 손에 끼워진 담배 끝이 타들어가며 조금씩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연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담배에선 한 가닥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잠깐, 어떻게 된 거죠? 분명 불은 붙이지 않았는데……”

내 질문에 노인은 대답도 없이 빙긋 웃었다.

“도대체 뭐냐고요? 할아버지, 저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데서 썰렁한 쇼나 보고 있을 시간 따윈 없다고요.”

그러자 노인이 또다시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는 성한 오른손과 의수인 왼손을 내 앞에 내밀더니 손가락을 맞대고 둥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동작들이 마치 삼류 마법사처럼 보여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 보게나.”

마지막으로 노인은 양손을 쫙 펴더니 손바닥이 보이도록 내 앞에 내밀었다. 

“뭐가 보이나?”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빙고! 자네 말이 맞네. 내 손엔 아무것도 없어. 원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단 말일세.”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죠?”

“방금 자넨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보지 않았나.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장면까지.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거기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라 매점 천장을 향해 퍼져나가는 광경까지 봤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못 봤다고 시치미를 떼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망설였다. 적어도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리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노인은 담배에 불을 붙이지도 않았고, 하다못해 라이터를 켜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순간적으로 보였던 그 푸른 연기.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내 앞에 있는 이 늙은이는 그저 심심풀이 삼아 마술을 배우러 다니는 노인대학 학생일지도 모른다. 자기가 배운 기술을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외로운 노인.

“멋지다!”

문득 연민을 느낀 나는 도로 자리에 앉으며 손뼉을 쳤다. 생각해보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다. 이렇게라도 맞장구를 쳐주는 게 좋겠지. 

“마술 같은 거 배우고 계세요? 굉장히 많이 연습하셨나봐요?”

그러자 노인도 다시 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마술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다만 중요한 건, 내가 처음부터 담배나 라이터 같은 건 아예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일세. 믿어지지 않는다면 주머니를 뒤져보게나. 자, 어서.”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양팔을 벌렸다. 

“아니, 됐어요. 사양하겠습니다.”

“자네가 본 건 모두 내가 심안으로 보여준 영상일 뿐이야. 다시 말하지만, 난 담배를 피우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걸 가져 다니지도 않네. 건강에 해롭기도 하거니와, 담배 속의 니코틴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뇌를 혼탁하게 만드니까.”

그러더니 노인은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어떤 글씨를 썼다. 

“이게 무슨 글자인지 알겠나?”

“글쎄요, 뭐라고 쓴 건지도 모르겠거든요?”

내 심드렁한 대답에, 노인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글자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ψ


“……프사이?”

“그래, 역시 읽을 줄 아는군. 방금 난 프사이ψ라고 썼네. 프사이는 자네도 알다시피 그리스 알파벳의 한 글자이기도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 사이에선 좀 다른 뜻으로 쓰이지.”

“다른 뜻이라뇨?”

“자네, 제5의 힘이라고 들어봤나? 어떤 이들은 그 힘을 초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여하튼 중요한 건……”

여기서 노인은 갑자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어깨에 힘을 주더니,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주겠다는 듯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었다.

“내가 바로 그 제5의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세! 온 지구를 통틀어 일억 명 중에 한 명 정도 존재할까 말까 한, 그런 특수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말이지. 어떤가? 정말 놀랍지 않은가?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초능력자를 실제로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어떠냐 이거지.”

하긴, 나는 그때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노인이 진짜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서 매점 문 쪽으로 서둘러 걸어가는데, 뒤에서 그가 외쳤다.

“좋아, 오늘은 이만 가보게. 그리고 내일 이 시간에 장서실로 오게나. 어차피 자네와 나는 함께 일하게 될 운명이니까.”

문을 닫으며 슬쩍 들여다보니, 노인은 듬성듬성 뻗친 백발 위에 낡고 실밥이 여기저기 튀어나온 모자를 눌러쓰는 중이었다.


*


그러나 휠러는 그 사물(물질과 복사)이라는 것이 더욱 근본적인 무언가의 특성을 운반하는 수단에 불과하며, 그 근본적인 것의 정체가 바로 ‘정보’라고 강조했다. 


존 휠러는 천재였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나 천재들은 존재한다. 하지만, 존 휠러 같은 물리학의 천재들이 나올 수 있는 시대는 이제 끝나버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휠러가 활동하던 시기는 물리학에서의 벨 에포크나 마찬가지였다. 그 시절 물리학자들은 우주와 사물의 본질을 규명하는 과정을 통하여 삶의 비밀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때 그들에게 무한한 우주의 영역은 극히 사사로운 인간의 내면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시절에 최고의 물리학자는 최고의 철학자였고, 그런 의미에서 존 휠러 역시 위대한 철학자였다. 특히나 그는, 그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젠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물리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처음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했다. 별과 우주의 죽음을 의미하는 블랙홀이라든가,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인 웜홀 같은 것들이 존 휠러의 두뇌에서 처음 나왔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보bit가 곧 존재it’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노인이 바로 그 존 휠러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휠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고까지 내게 떠벌렸는데, 그 얘기를 하려면 햇살이 대략 45도 각도로 비쳐들던 어느 겨울 오후의 장서실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그 기이한 노인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약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으로. 어쨌든 그날, 물리학 서가에서 존 휠러의 전기를 읽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그 두꺼운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갑자기 눈앞에 허연 형체가 불쑥 나타나더니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존 휠러를 읽고 있군. 어떤가? 재미있지?” 

“어휴, 또 할아버지세요?”

나는 놀라지 않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하면 어서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양반, 진짜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천재였고 말이야.”

노인은 사방으로 뻗친 백발을 긁적이며 설레발을 쳤다. 귀찮아하는 내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게다가 사실 난 휠러 교수를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다고. 그래, 우린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거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책만 읽었다. 짜증이 나서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절대로 고개는 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옆을 힐끗 보니 노인이 레너드 서스킨드의 책을 꺼내 꽤나 흥미로운 척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휠러 교수는 나를 아주 좋아했어. 내가 그의 연구에 영감을 주는 존재라나 뭐라나.”

이 대목에서 내가 웃고 말았다는 걸 밝혀둔다.  

존 휠러는 현대물리학의 거성巨星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리처드 파인먼이나 킵 손 같은 이들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그런 그에게, 물리학 근처에도 못 가본 것 같은 이런 이상한 노인이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니. 어쩌면 이 불쌍한 할아버지는 허언증을 앓으며 현실과 거짓조차 제대로 구별 못하는 애처로운 인간일지도 몰랐다. 문득 동정심 같은 게 밀려왔다.

그때 노인이 내 곁에 바짝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자네, 약속을 안 지켰더군. 지난번 헤어질 때 우리 다시 만나기로 하지 않았던가? 나는 자네가 나올 거라 믿고 다음날 오후 내내 기다렸다고.”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쳐다봤다. 우리라니. 대체 내가 언제 약속을 했단 말이에요, 라고 외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며칠 사이에 노인의 얼굴은 수척하게 변해 있었다. 오래 앓고 일어나기라도 한 듯 눈 밑엔 검은 그림자까지 드리워졌다. 

“그건 할아버지의 일방적인 얘기였잖아요. 전 동의한 적 없어요.”

내가 작게 말하자, 노인이 빙긋 웃었다. 쭈글쭈글한 얼굴이 쓸쓸하게 일그러졌다. 

“알아. 그냥 자네를 보니 반가워서.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도서관에 나올 거라 믿고 있었지. 그래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았어.”

결국 나는 또다시 노인과 함께 매점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신세가 되었다. 하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원래 노인들이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이용해 나 같은 젊은이들을 마음껏 조종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 아닌가. 장서실의 그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점에서 얘기를 나누자는 제안에 뜨악한 반응을 보이자, 엄청나게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제발. 시간이 없다네. 정말로, 시간이 너무 없어.”

그 말을 어찌나 우울한 어조로 내뱉던지, 갑자기 마음속에 이상한 회한 같은 것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래, 곧 돌아가실 노인네야. 얘기할 상대도 없어 쓸쓸한 분인데, 좀 들어준다고 큰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아마도 이런 생각들이 줄줄이 떠올랐던 것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우린 캔 커피를 하나씩 든 채 지난번 그 자리에 마주앉아 있었다.

“휠러 교수는 프사이, 일명 제5의 힘에 관심이 많았다네.”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속으로 대꾸했지만, 겉으론 그저 캔을 손으로 감싸 쥔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래전 휠러 교수와 나는 거의 두 달간 매일 만났어. 집에 내 비망록이 있는데 거기에 모든 걸 꼼꼼히 적어뒀으니까, 나중에 한번 보여주겠네. 어쨌든 그는 내가 가진 프사이에 관심이 많았어. 대체 그런 괴이한 현상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 건지 과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지. 우린 교수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실험을 했는데, 그래, 그때 난 내 동생도 처음 만났지. 아, 내가 얘기 안 했던가? 나에겐 동생이 하나 있다네. 정확히는 쌍둥이 형제라고 해야 옳겠지만. 그나저나 젊은이, 자네에게도 형제가 있겠지?”

대체 이 노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그의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누나가 하나 있어요. 뭐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요. 오늘 아침에도 저한테 온갖 잔소리를 퍼부었으니까요.”

그러자 노인은 성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커피 캔을 내려놓으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뭐랄까, 그리움에 가득찬 얼굴이라고나 할까. 

“그런 소리 말게. 형제는 한 나무에서 솟아난 가지와 같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부정할 수 없지. 그래, 나와 내 동생처럼 말일세.”

“음……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건 자네가 아직 젊기 때문이야. 소중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곁에서 떠나가는 나이가 되면, 저절로 깨닫게 될 걸세. 어쨌든 나는 지금 자네가 무척이나 부럽다네. 형제가 가까이에 살아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지. 내 동생은……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곳에 있거든.”

순간 나는 당황했다. 노인이 훌쩍이며 그 딱딱한 의수로 눈물을 훔쳤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동생분은 돌아가신 건가요……?”

문득 노인이 눈물을 닦다 말고 자신의 의수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괜찮아. 이 손, 여기에 내 동생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까 말일세.”

그러면서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낡은 베이지색 코트를 천천히 벗는 것 아닌가. 그는 왼쪽 옷소매를 걷어올리고는 내 앞에서 왼팔을 흔들어 보였다. 놀랍게도 손만이 아니라 팔 전체가 마네킹의 그것처럼 매끄럽고 하얗고 단단했다. 팔 역시 가짜였던 것이다. 팔꿈치엔 인공관절이 선명했고 나사못도 새삼스러웠다. 매점 한쪽 구석에서 바닥을 쓸던 아주머니가 멀찍이서 그런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그 모든 게 어디서나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이긴 했을 것이다. 그만큼 노인의 앙상한 몸에 붙어 있는 인공 팔은 기이하고도 음산했다. 당황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노인은 코트를 다시 입기 시작했다. 그는 몇 번이고 코트의 소매에 자신의 의수를 끼워넣으려다 실패했지만, 내가 도와주려고 하자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혼자서 입을 수 있다네. 평생 해온 일인걸.”

옷을 다 입은 노인이 다시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그의 의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서 사고라도 당하신 건가요? 죄송해요. 이런 거 여쭤봐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그러나 노인은 코트의 단추를 다 채울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수로 옷깃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단춧구멍에 단추를 끼워넣느라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이상한 노인은 생각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알고 보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젊은 사람일지도. 어쨌든, 그는 코트의 단추를 모두 채웠고 그제야 나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완李完일세. 내 이름 말이야. 내가 속한 세계에선 마르탱 게르, 혹은 그냥 엑스X라고들 부르지.”

노인은 새삼 정중하게 말하며 오른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 손을 잡으며 내 이름을 말하고 말았다. 

“김희석입니다. 아직 외국식 이름은 없고요. 아,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엔 영어학원에서 앤드루라고 불렸네요.” 

내 이름을 들은 노인, 아니 자칭 마르탱 게르 혹은 엑스라는 할아버지가 손을 더욱 세게 움켜잡았다.

“반갑네, 희석군. 드디어 통성명까지 하였으니, 이제 우린 진정한 친구가 된 셈이야. 안 그런가?”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살짝 이상해진 외로운 노인네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겠단 생각이 든 것도 그 순간이었다. 

“좋아요. 이제부터 친구 하기로 하죠, 뭐.”

그러자 노인은 듬성듬성한 앞니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럼 이제 자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친구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말하는 거라고들 하니까.”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노인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테이블 아래 숨긴 채 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맹세컨대,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세.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직접 겪은 일들이지. 다만 나는 남들과는 다른 힘, 즉 프사이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내가 그 사건들을 받아들인 방식 역시 다른 이들과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었지. 내게 그 일들은 마치 여러 개의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다중우주처럼 기이하기 그지없게 다가왔다네. 그러니 내 얘길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좋아. 진실과 사실로만 이루어진 이 세상의 이야기라 여겨도 괜찮고, 꿈과 환상, 마법으로 이루어진 다른 차원의 전설 같은 것으로 여겨도 된다, 이거지. 여하튼, 이 모든 건 나와 동생의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네. 아니. 그전에 차라리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는 게 나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