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우리가 바라는 공정한 지옥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것이 뭘까? 린다G에게 물어보면 화려한 조명이 비를 감싸는 모습이라고 할 것 같긴 한데, 가장 보편적인 답을 찾자면 ‘날로 먹는 꼴’ 아닐까? 분노 버튼을 가장 빨리 누르는 이야기 중 하나가 조별 과제 무임승차자 스토리다. 나 혼자 끙끙대며 잘해보려고 아이디어 내고 과제 분담하자고 해도 열심히 함께하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 미꾸라지같이 요리조리 힘든 일은 안 맡으려고 빼는 얌체들은 어디나 존재한다. 이런 얘기와 거기 달리는 댓글들을 읽어보면 무임승차자에 대한 살의는 거의 연쇄살인범에 대한 그것에 못지않은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 전체가 조별 과제와 비슷하게 돌아가는 것 아닐까? 나만 빼고 모두가 날로 먹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렇게 생고생하는데! 공채시험 합격이니 정규직이니 관리자 승진이니 하다못해 직장 선배나 고참이니 뭔가 감투 하나를 먼저 꿰찬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궂은일을 떠넘기고 웰빙을 즐기는 것 같다. 일단 성벽 안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더이상 노력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새로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이 사회가 아닌가 하는 분노의 소리가 드높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잉여인력과 무임승차자투성이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 다섯 명씩 일하며 월급 루팡, 나이 먹어서 생산성도 젊은 후배들보다 떨어지는 주제에 나이가 벼슬이라고 높은 연봉 받는 부장들의 꼰대질 등등. 


‘날로 먹는’ 행위를 고급지게 표현하면 ‘지대地代 추구 행위’가 된다. 지대란 땅을 빌려주고 받는 돈이다. 여기서 비롯되어 어떤 기득권에 기반해서 불로소득을 얻으려는 행위를 지대 추구 행위라고 부른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 중 상당 부분은 이러한 지대 추구 행위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다. 모두가 목숨 걸고 생존경쟁을 하는 각박한 현실에서 경쟁하지 않고 이득을 얻으려는 시도는 분노를 자아낸다. 무임승차나 지대 추구 행위에 대한 분노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협력해서 맹수와 싸우고 먹이를 구해야 했던 원시인 시절부터 진화되어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운 분노 감정이 반칙, 특혜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넘어 무한 경쟁 자체를 신성시하는 근본주의로 치닫게 만들기도 한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시험 하나 붙었다고 날로 먹지 못하는, 공무원이라고 날로 먹지 못하는, 정규직이라고 날로 먹지 못하는, 부장이라고 날로 먹지 못하는, 선배라고 또는 고참이라고 날로 먹지 못하는 그런 공정한 세상. 이 세상에서는 철저히 성과에 따른 객관적인 평가만을 기준으로 보상이 주어지고 일자리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당신은 단 하루도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입사 경쟁을 뚫은 후에도 끊임없이 실적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는 가차 없이 해고되어 성과를 낼 새로운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의다. 능력이 탁월하지 못하면 밤을 새든 주말을 반납하든 죽어라 노력해서 어떻게든 성과를 내야 한다. 가장 열심히 일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져야 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게으름 피우는 사람은 응징당해야 한다. 


필요한 노동력의 수는 당연히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산정되어야 한다. 잉여인력은 죄악이다. 정규직이란 있을 수 없다. 노조도 있을 수 없다. 이는 모두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는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해고는 자유로워야 한다. 열심히 일할 의지가 있는데 일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이들이 100퍼센트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해도 바깥에 120퍼센트 일할 의지가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평가야말로 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조금이라도 특혜나 반칙, 연줄이 작용하지 않도록 평가 기준은 극도로 세분화되어야 하고 평가는 1년 365일, 평생 이루어져야 한다. 무임승차자는 단 1분 1초도 조직에 남아 있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얼마나 회사를 위해 공로를 세웠든, 얼마나 오래 봉직했든 지금 이 순간 경쟁자보다 실적을 못 내면 즉시 해고하는 게 맞다.


어떤가. 완벽하게 공정하지 않은가? 어떠한 특혜도 반칙도 기득권도 불로소득도 없다. 

…그런데 이런 사회에 살고 싶은가? 취향은 존중하지만 나는 일단 이런 사회는 사양이다.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다. 경쟁에 기반한 공정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지에 대한 사고실험을 해본 것이다. 이상하다. 분명히 공정한 경쟁은 좋은 것인데, 끝까지 밀어붙이니 왠지 숨이 막힌다. 이유가 뭘까?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최고의 지성이란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는 지성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지 기준으로 일관하는 것이 명쾌하다.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들은 상반된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하는 경우가 많으니 차근차근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헌법을 근거로 생각해보자. 공정성은 평등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평등 원칙의 근거는 무엇일까? 평등은 그 자체가 목적일까?


여러 번 강조했듯이, 헌법이 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 가치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이다. 자유도 평등도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수단이다. 공정성 역시 마찬가지다. 개개인에게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평등하게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공정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저해한다면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무한한 경쟁을 통해 쉴 틈 없이 낙오의 공포 속에 사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공정한 경쟁도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일 뿐인데 거꾸로 경쟁 자체가 목적이고 인간은 그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것은 노예의 삶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경쟁을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장치들이 발전한 것이다. 헌법이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대 민주국가의 헌법은 18세기,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무한 자유경쟁을 보장하지 않는다. 초기 자본주의 시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에 의한 가격 결정은 자연법칙과도 같이 정당한 것이었다. 노동의 값인 임금도 상품인 이상 마찬가지다. 상품 제공자들이 담합하여 자기 몸값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행위는 시장 원칙을 저해하는 불공정한 행위였다. 노동시장의 무한 자유경쟁이 낳는 비참한 결과가 오래도록 계속된 후에야 비로소 노동3권이 보장되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되고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해고가 제한되는 일련의 발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 투쟁으로 힘겹게 이룩된 것이다. 경쟁은 필요하되,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경쟁하도록 사회가 발전해왔다. 해고의 제한은 특히 의미가 크다. 일정한 경쟁을 통해 일단 일자리를 갖게 되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숨을 돌릴 여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규직’이라고 불리는 노동자의 권리들이 형성되었다.


어떠한 시스템이 구축되면 반사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시스템에 안주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부작용도 생긴다. 그렇다고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 자체를 해체하려는 발상은 더 큰 위험을 낳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가 심각하다고 정규직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이며 없애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 노조가 기득권화되어 신규 취업을 가로막는다며 노조를 무력화해야 한다는 주장, 조직 내 무임승차자를 없애기 위해 근무성적평가를 대폭 강화하고 해고를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진짜 강자는 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저 구름 위에 있기에 눈에 잘 띄는 대상부터 먼저 공격하기 쉽다.


저성장사회로 접어들면서 기회의 문이 좁아지고 경쟁은 가혹해진다. 그러다보면 어떠한 작은 기득권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강퍅한 주장이 득세하게 된다. 하지만 기득권이란 말 그대로 사람들이 지금 갖고 있는 권리다. 모든 기득권이 죄악은 아니다. 노력의 결과로 얻어낸 기득권도 있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권리로 보장되는 기득권도 있다.


물론 소수에게 과도한 기득권이 독점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거친 풍랑 속 작은 판자조각 하나에 가까스로 몸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일체의 기득권을 부정하고 무한 경쟁만을 정의로 숭배하는 것이 맞을까? 오히려 좀 ‘날로 먹을’ 기회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장하는 것이 발전 아닐까? 왜 인간은 죽어라 경쟁하고 일만 해야 하는 걸까? 좀 놀면 안 되나? 


역사를 보면 사실 인간 사회는 그렇게 발전해왔다. 자기 개인 시간을 아예 소유할 수 없었던 노예제에서 시작하여 노동시간은 계속하여 감소하였고 휴일은 증가했다. 주5일제에서 주4일제에 이어 언젠가는 하루 걸러 일하게 될지도 모른다. 세 명이면 충분한 부서에 다섯 명씩 일하는 것은 무임승차자 두 명을 낳는 불합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섯 명이 일하면 더 여유롭고 인간답게 살 수 있으므로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공공 부문에서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도 기업의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품고 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론 사회의 경제력 수준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가능한 범위에서는 계속하여 일자리 확대와 노동시간 감소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생산력 발전의 과실을 구성원 전체에게 분배하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고양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인류 대부분이 잉여인력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시대가 닥쳐오고 있다. 무한 경쟁을 통한 공정한 지옥이 우리가 지향할 방향일까,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더 적게 일하면서 행복을 추구할 인간으로서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사회가 나은 방향일까. 지금 당장의 불공정을 시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자칫 무한 경쟁만이 정의라고 착각하는 것은 곤란하다.


…누구 좋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