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사형제에 대하여

헌법이 보장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모든 기본권의 이념적 기초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여기에 대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사형제도는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존엄하다는 인간을 국가가 법에 의거해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의 현재까지의 답변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96년에는 재판관 7 대 2의 의견으로 사형을 합헌으로 결정했고, 2010년에는 5 대 4의 의견으로 역시 합헌임을 재확인했다.* 


세계적인 추세로 보면 사형제도가 최신 유행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국제앰네스티 기록에 따르면 201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국가 중 오직 20개국에서만 약 600여 건의 사형이 집행됐다. 이는 국제앰네스티가 지난 10년간 기록한 사형집행 통계 중 가장 낮은 수치다. 대부분의 사형집행은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에서 이루어졌다. 


놀라운 변화이긴 하다. 근대 초기까지만 해도 온갖 사소한 이유로 사람이 사형에 처해지곤 했다. 남색, 헛소문, 양배추 훔치기, 안식일에 땔감 줍기, 부모에게 말대꾸하기, 왕궁의 정원을 비판하기 등등. 헨리 8세의 재위 말년에는 런던에서만 매주 10건 이상의 처형이 벌어졌다고 한다.* 근대 계몽주의, 인본주의 사상의 발전이 인류 역사 시초부터 존재했던 사형제도 자체에 대해 단계적인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추세가 어떻든 일단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솔직히 나부터도 사형을 고집하는 것은 야만이다, 사형은 반문명적이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주장에는 반감이 들곤 한다.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 잣대를 들이댈 문제는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리한 칸트는 오히려 인간이 존엄하기 때문에 사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율적 이성을 가졌기에 존엄한데, 그런 인간이 스스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택을 했다면 그의 행위에 걸맞은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그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시민사회의 의무라고까지 했다. 세상이 내일 멸망해서 최후의 일인이 남을지라도 사형은 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살인자를 처형하지 않은 모든 시민들 역시 살인에 동참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볼 정도로 정의의 실현을 중요시했다.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존 로크 역시 사형제도를 긍정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소유물에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는 자연법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이러한 자연법을 위반한 범죄자는 다른 사람에게 저지른 부당한 폭력과 살인으로 전 인류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 셈이기 때문에, 호랑이나 사자처럼 살해되어 마땅하다고 보았다.


반면, 사형폐지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는 형법학자 체사레 베카리아다. 그는 1764년 출간한 저서 『범죄와 형벌』에서 사형은 유용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범죄에 대한 억제력 측면에서 볼 때 사형의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망각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를 박탈당한 채 평생 짐 나르는 짐승처럼 취급받고, 자신의 노동으로 사회에 끼친 손해를 속죄하는 범죄자의 모습을 오래 보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억제책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사형폐지론의 오랜 근거 중 하나다. 사형제도에 흉악범죄를 억제하는 일반예방 효과(형벌을 통한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형을 폐지한 유럽 국가들이 사형을 활발히 집행하고 있는 나라들보다 훨씬 흉악범죄율이 낮다. 사형폐지 후에 범죄율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또한, 확신범이나 우발적인 충동으로 저지르는 범죄의 경우 사형으로 인해 억제된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이는 사형의 위헌성을 주장하는 적절한 논거라고 보기 어렵다. 헌법은 인간을 다른 목적을 위한 한낱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 예방을 위해, 즉 ‘본보기’를 위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다른 이유를 들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 헌법상 보호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다. 헌법상 사형이 인정된다면 그것은 칸트의 주장처럼 범죄자가 스스로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게 하기 위한 것, 즉 응보를 위한 것이지 일반예방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일반예방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의 위헌을 주장하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에 불과할 수 있다.


사형이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형벌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 대체형벌로서 감형이나 가석방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을 주장한다면 모순이라는 반박이 가능하다. 평생 짐 나르는 짐승처럼 취급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범죄 억제책이라는 베카리아의 주장과 자율적 이성을 가진 인간이 스스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택을 했다면 그의 행위에 걸맞은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그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것이라는 칸트의 주장 중에 어느 것이 더 인도적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람을 즉시 처형하는 것은 비인도적이고, 관 속에 넣어 평생 살게 하는 것은 인도적일까? 참고로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감형의 가능성을 배제한 절대적 종신형은 인간 존엄성에 위반된다며 위헌으로 결정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에 반대하는 입장도 유력하다. 아래의 글을 보자.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이외의 어떠한 권위로서도 사람이 이를 박탈할 수는 없다. 사람은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된 신비스러운 존재이며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다음으로 가장 고귀하고 신성한 것이므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일은 창조주만이 가능할 뿐 창조주가 아닌 사람은, 그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서도, 사람이 만든 어떠한 법과 제도를 통하여서도, 불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창조주의 권위보다 더 큰 권위를 찬탈하는 것이 되며 창조주의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목사님의 글이 아니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의 일부다.* 앞에서 말한 1996년 사형 합헌 결정문 중 소수 의견인 조승형 재판관의 위헌 의견이다. 물론 종교인의 신앙은 존중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헌법 제20조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하여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규정하고 있는 나라다. 종교의 교리는 세속의 법정에서 위헌/합헌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만약 사형제 합헌 의견으로 “인생은 번뇌에 가득한 고해苦海일 뿐이니 헛된 육신을 벗는 게 무슨 큰일인고?”라고 쓴다면 어떻겠는가? 


가장 강력한 사형폐지론의 논거는 오판 가능성이다. 미국의 경우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 다시 무죄임이 증명되어 무죄판결을 받은 사형수가 1973년 이후에만도 122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프가 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만 해도 그렇다. 이춘재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행은 사형제가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춘재가 저지른 일이라고 인정한 화성 8차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한 윤모 씨의 경우를 보자. 만약 무기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었다면, 그리고 그후 이춘재가 진범임이 밝혀졌다면 국가는 어떻게 이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도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오판 가능성을 이유로 사형을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은 오판의 여지가 없이 명백히 유죄가 인정되는 사건에는 사형이 가능하다는 것일까?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는 경우도 있고, 객관적 증거와 자백이 모두 갖춰진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완벽한 입증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재판에는 오판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인간은 외부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극단적 불가지론에 가깝다. 이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사형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벌도 재판도 정당화할 수 없다. 똑같이 오판 가능성이 있는데 사형은 불가하지만 무기징역은 가능한가? 생명은 회복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르다고 반박하겠지만, 인간의 삶은? 한평생 억울하게 감옥에서 보내다가 진범이 뒤늦게 밝혀져 죽을 날을 며칠 앞두고 석방되면 그의 일생은 회복 가능한 것인가? 윤모 씨의 20년은 회복 가능한가?


비극적이지만 오판 가능성은 인간이 운영하는 재판제도에 있어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사형의 경우에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오판 가능성은 수사와 재판을 더욱 엄밀하고 신중하게 하고, 피고인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근거가 되지만, 그것만으로 사형이 위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사형폐지론은 과거 시대의 야만과 광기에 대한 인도주의적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계몽과 합리적 이성을 강조하다보니 그만 무시하고 폄하하는 것이 있다. 감정이다. 형법학자들 중에는 죄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는 의미의 응보형은 원시 형벌에서나 타당할 뿐이고 현대 국가에서는 오로지 일반예방과 특별예방(범죄자의 교화 및 재사회화)만이 형벌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살인범을 사형에 처한다고 해도 피해자 가족은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 수 있을 뿐 고통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영화 <밀양>이 생각난다.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유괴범을 면회하러 간 전도연은 유괴범이 교도소에서 하나님을 접하여 거듭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다고 환한 얼굴로 말하자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분노를 터뜨린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구 맘대로 살인자가 용서받을 수 있냐고.  


나는 조두순이 나영이에게 자행한 그 끔찍한 짓들에 대해, 조주빈 일당이 그 많은 여성들에게 저지른 잔인한 짓들에 대해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와 복수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이성적이고 인도적인 아름다운 주장을 하든 신뢰할 수 없다.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 서문에서 “몽매하고 흥분 잘하는 군중과는 거리를 두고, 오직 공공복리의 담당자들을 위해” 썼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군중’의 분노는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인간은 진화과정에서 동족 간 잔혹행위·친족살해·아동성폭행 등 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을 위협하는 행위들에 대한 자동적인 거부감과 분노를 진화시켰다. 이 분노에 기초한 응보형은 여전히 범죄를 벌하는 근본이다. 그걸 부정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그리고 응보의 관점에서 볼 때 사형 외에는 합당한 벌을 찾을 수 없는 범죄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유영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사형 외에 도대체 무엇이 합당한 벌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형폐지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한 가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국민을 죽이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사형폐지 여부는 딱 떨어지는 논리로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문제, 또는 위헌/합헌으로 갈리는 문제라기보다 국민의 선택의 문제(이것을 입법정책적인 문제라고 한다)가 아닐까. 국가는 개인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도구다. 말하자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같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많은 일들을 위임했다. 범죄에 대한 정당한 응보인 처벌도 그중 하나다. 인간사회의 한계인 오판 가능성까지 일정 정도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위임의 한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는 우리들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우선은 원칙의 문제다. 국가에게 합법적으로 국민을 살해할 권한이 부여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다를 수밖에 없다. 코로나처럼 예상치 못했던 보건 위기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올 수 있다. 기후변화, 고령화 등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칠 변화도 많다. 응보라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사형을 집행하듯이 공공복리라는 목적으로 일부 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이때 어떤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는 고민해봐야 한다. 


물론 최후의 수단으로 일부의 희생이 부득이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치열하게 이런 결과를 피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는 사회와 신속하게 경제성, 효율성 판단으로 그치는 사회는 다르다. 여기에는 평소 그 사회가 구성원의 생명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는지가 영향을 미친다. 권력에 의한 남용 위험성도 다르다. 형벌 권한을 남용하는 독재자는 언제든, 어디서든 출현할 수 있다. 이때 오랫동안 사형이 금지되어온 나라와 시행되어온 나라의 상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감정의 문제도 있다. 끔찍한 범죄에 대한 우리의 분노 감정이 사형을 정당화한다면, 사형집행에 대한 감정 역시 정확해야 한다. 불편한 것들은 무지의 베일 뒤에 가려두고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무책임하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직접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집행하는지도 잘 모른다. 우리는 교수형을 집행할 때 목에 두꺼운 끈을 두른 사형수의 발밑 바닥이 갑자기 열리며 사형수의 경추가 분리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끈에 대롱대롱 매달린 시신에서 무엇이 흘러나오고 입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 보지 못한다. 게다가 사형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던 바로 그 순간에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평온히 감방에 앉아 있다가 끌려나와 사형 당한다. 그중 일부는 어떤 동기로든 진심으로 회개하고 반성하여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은 극도의 공포에 떨며 형장으로 향한다. 


물론 이런 점들을 모두 감안해도 응보를 위해 사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불편함과 망설임을 느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국민참여재판을 진행해본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평소 포털 댓글에서 보는 국민 여론과 직접 피고인을 눈앞에서 보며 재판한 배심원들의 양형 의견은 많이 달랐다. 우리나라의 배심원들은 판사들보다 낮은 양형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응보 감정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국가에 의한 살인인 사형에 대해 느껴지는 불편함과 두려움의 감정 역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어느 감정이 우세해질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국민을 죽이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렇지 않은가. 


이 질문을 먼저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던져본 후에야 우리는 사형제도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