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인간은 왜 존엄한 것일까

인간은 왜 존엄한 것일까? 


이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자니 영 뻘쭘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자라고 이런 심오하고 거창한 주제에 대해 얘기할 수 있나 싶어서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 자체도 난센스다. 인간의 존엄성은 헌법을 최상위로 하는 우리나라 법 체계의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핵심 가치라고 앞선 글에서 분명하게 얘기했다. 법은 우리 사회 모든 시민의 삶과 직결된 것이다. 그런데 그 출발점이자 핵심 가치에 대해서는 대단한 철학자나 되어야 감히 논할 수 있다?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치가 우리 삶 속에 체화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일 수 있다. 깊이 생각해본 적 없거나, 그냥 위선적이고 공허한 소리일 뿐이라고 냉소하거나,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당연한 얘기로 치부하거나.


인간이 진짜로 존엄하긴 한가?


이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 같다. 우리는 진짜로 인간이 존엄하다고 생각하고 있나? 이번 코로나 위기로 쏟아진 말들을 생각해보자. 노인 사망률이 높고 젊은이들은 걸려봤자 심각한 문제가 없으니 차라리 빨리 전 국민이 전부 걸려서 집단면역이 생기는 게 낫지 않냐, 고령화로 인한 복지예산 때문에 국가재정도 힘든데 어쩌면 잘된 건지도 모른다, 스웨덴이나 영국 같은 유럽 선진국들도 내심 이걸 바라는 것 같다.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자. 쓰레기 같은 인간, 개 같은 인간, 개만도 못한 인간, 살 가치가 없는 인간… 뭔가 개가 기준인 것 같긴 한데 여하튼 인간은 다양하게 평가받고 있다. 다른 맥락에서 인간을 타박하는 말들도 있다. 인간이야말로 지구를 좀먹는 바이러스다, 인간이 없으면 지구가 살아난다. 


현실을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강대국이자 헌법의 위력이 가장 강력한 나라에서, 경찰관이 저항하지 않는 시민의 목을 8분 46초간 무릎으로 짓눌러 죽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시민은 숨을 쉴 수가 없다, 살려달라 애원했고 행인들조차 경찰관에게 목을 누르지 말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이건 공개적인 도살이나 다를 바 없다. 여기에 어떤 존엄성이 있단 말인가.


현실에 대한 회의를 잠시 접어두고 우선 헌법에서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보자. 헌법 교과서에 나오는 설명은 거의 비슷하다. ‘인격성 내지 인격 주체성’ ‘인격의 내용을 이루는 윤리적 가치’ ‘인간의 인격과 평가’ ‘독자적 인격체로서 그의 인격을 근거로 지니는 고유한 가치’ 등이다. 무슨 소리인지 와닿는 것이 있나? 짜증이 나더라도 인격자답게 참기 바란다. 교과서라는 게 원래 그런 법이다. 좀더 풀어 설명하면, 인간은 이성에 바탕을 둔 자율적이고 윤리적인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얘기다. 이성․자율성․윤리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볼 수 있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이해되지만 여전히 의문이 들기는 한다. 무슨 성인군자만 존엄한 인간이라는 소리야? 도덕 교과서 같은 고리타분한 얘기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거슬러올라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서구에서 발전한 인간 존엄성이라는 이념의 뿌리는 기독교 사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장 27절)라는 성경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신과 닮은 존재이기에 존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Image of God”이란 비주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금발에 푸른 눈이라서 이를 닮은 백인이 존엄하다, 이런 저질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놀랍게도 이런 식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신봉하는 인종주의자들도 있다) 신이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과 달리 지적 도덕적 품성을 부여했기에 존엄하다는 뜻이다. 헌법 교과서에서 말하는 이성․자율성․윤리성과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물론 종교적으로는 영성을 더욱 강조하겠지만 기본적인 접근은 비슷하다.


이러한 서구의 사상 전통을 철학적으로 총정리한 이가 철학자 칸트다. 칸트는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도덕적 자율성에 두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독자적으로 양심에 따른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는 존재이므로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존중되어야 하고,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이 헌법이 말하는 인간 존엄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간이 국가 행위의 단순한 객체가 된다면 인간 존엄성에 위반된다’는 ‘국가행위 객체설Objekttheorie’을 인간 존엄성 침해 여부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뉴욕에서 벌어진 9․11 테러의 공포를 배경으로 2005년 독일 의회는 다수인의 생명에 대한 위협을 달리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경우에는 테러범에 의해 납치된 항공기를 격추시킬 수 있도록 항공안전법을 제정했다. 납치된 항공기가 다수의 사람이 있는 빌딩 등으로 돌진하여 수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해 소수인 승객들을 희생시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국가가 납치된 승객을 타인의 보호를 위한 국가적 조치의 단순한 객체로 만드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위헌으로 판단했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 역시 ‘구치소 내 과밀수용행위 위헌확인 사건’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모든 인간을 그 자체로서 목적으로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인간을 다른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하는바, 이는 특히 국가의 형벌권 행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하면서 일인당 사용가능한 면적이 일 평방미터 남짓밖에 안 되는 비좁은 구치소에 사람을 수용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없도록 만든 행위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해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다.*


헌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앞의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나오듯 ‘모든 인간’에게 인정되는 것이다. 평소 늘 도덕적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을 골라서 존엄하다는 것이 아니다. 신이 부여한 특성이든 진화의 결과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최소한 이성에 따라 양심에 따른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능력이 있음에도 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벌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은 보편적 인권의 근거가 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기에 그의 인종․성별․종교․지능․재산 등과 관계없이, 또한 그가 선한지 악한지, 성인군자인지 범죄자인지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고존엄’이라는 말은 코미디다. 존엄이란 비교급이나 최상급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존엄하고 최고로 존엄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 외의 모두는 존엄하지 않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마치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나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말처럼.


훌륭한 얘기다. 헌법이 말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도, 그 역사적 사상적 배경도, 실천적 의미도. 그렇긴 한데, 여전히 머리 한 구석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 인간 존엄성의 주요 근거가 이성이라는데,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인간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지적 능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면 그 또한 존엄성이 인정되는 걸까? 그렇다면 ‘인간’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이외의 이성적 존재로서 존엄성이 인정되는 것일까. 


동물에게도 자의식이 있지 않느냐는 연구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과천 서울대공원에 있는 오랑우탄 ‘보람’은 거울 앞에 앉아 치렁치렁한 긴 비닐조각들을 자기 머리 위에 가발처럼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정돈해 중심까지 잡고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고래, 코끼리 등도 이러한 거울 실험mirror self-recognition test을 통과했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자의식, 이타성 등 인간이 독보적으로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특성을 공유하는 일부 동물 종들을 비인간인격체nonhuman person로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인간에게는 양심에 따라 도덕적 결정을 내릴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소시오패스는 어떨까? 소시오패스는 충동적이고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지 못하며, 무엇보다 타인을 해치는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교수 마사 스타우트에 따르면 교정이 불가능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수의 대략 4퍼센트라고 한다. 소시오패스만 문제일까? 유명한 ‘밀그램 실험’에 따르면 연구 목적임을 가장하여 상대방에게 (가짜)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하자 실험 참가자 중 60퍼센트 이상이 최고 전압에 이르기까지 스위치를 계속 누름으로써 잘못된 지시에 순종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을 하다보면 유발 하라리가 제일 솔직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라리는 인본주의도 기독교나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만들어낸 믿음, 종교에 불과하다고 본다. 인간들끼리 서로 인간이 존귀하다, 존엄하다 해주다보니 그게 자연법칙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어 그게 실체를 가지고 인간사회를 규율하게 되는 이른바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정확한 말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생각해보면 주관적이고 독단적이며 배타적이다. 동물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인간만이 존엄할까? 현생 인류에 의해 멸종된 네안데르탈인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결국 우리가 인간이니까 인간이 존엄하다고 우리끼리 약속한 것 아닐까?


그렇다고 그 약속은 무의미할까? 인간의 존엄성은 사기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는 잔혹과 폭력의 역사였다. 선사시대 발굴된 인간 유골에는 타살의 흔적과 이빨 자국, 즉 식인의 흔적이 흔했다고 한다. 인간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어서는 안 되기는커녕 말 그대로 식사 대상이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인류는 자기 무리, 부족 이외의 인간은 자신과 다른 동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 자체가 없었다는 얘기다. 문명이 시작된 후에도 존엄한 것은 신 또는 그의 대리인인 왕 또는 특정 계급이지 보편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중세까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신의 나라를 끝내고 인간의 나라가 시작된 것 자체가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싸워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인류는 오랜 역사 끝에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인간을 존엄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회계약을 이루어낸 것이고, 이것이 문명국가의 헌법이다. 신이 어떤 특성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어떠한 본성적인 특징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의 존엄함을 인정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를 기초로 하는 사회가 성립된 것이고, 이러한 약속은 비록 현실에서 완전히 실천되고 있지는 못하다고 해도 여전히 소중한 것이다.


이 약속은 잠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미래에 과학기술 발전에 따라 인간을 넘어선 존재까지 포괄한 새로운 약속이 성립될 수도 있다. 또는 인간 이외에 지구에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에게도 조금씩 조금씩 그 존엄성을 인정하며 외연을 넓혀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는 사회계약의 기초는 우선 우리 동료 인간들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만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이 진짜로 존엄하긴 한가  하는 절망과 회의를 반복하게 되지 않나.


약속이란 혼자 할 수 없다.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다. 칸트의 말씀도 헌법 교과서의 설명도 자꾸만 고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이 갖는 어떤 고유하고 추상적인 특성으로 설명하니까 어렵게만 느껴진다. 인간의 존엄 역시 관계 속에서 찾을 때 더 피부에 와닿을지 모르겠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그의 아름다운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인간과 사람이라는 개념을 구분하면서 사람이란 구성원들의 환대를 통해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지만,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포스러운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숱하게 죽어나가는 순간에 집에 갇힌 이탈리아 사람들은 발코니에 나와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가격리중인 가족을 위해 담당 공무원은 햇반, 김, 참치 캔이 든 상자를 두고 가고, 이웃 부부는 맥주에 치킨을, 그 따님의 친구는 붕어빵과 계란빵을 종류별로 사서는 현관 문고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격리되었던 이는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따스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상냥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인간은 존엄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