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지구를 지켜라

여태 쓴 글을 실수로 한 번 날렸다. 실수로 삭제를 눌렀는데 정말 삭제되어버렸다. 바보 바보. 글을 날려먹은 건 정말 오랜만이라 당혹스럽다. 


여태 썼던 글에는 수업이 시작되기 전의 느슨한 침묵이 가득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또 색들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다시 쓰기 귀찮지만 한 번 썼던 것이니 더 잘 쓸 수 있다고 나를 다독여본다. 


수업시간 전에는 늘 침묵이 가득하다는 이야기. 그 침묵이 공간에 흐르는 순간의 따듯하고 창백한 찰나에 대해. 모두가 모여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나는 그 침묵을 즐기며 강의실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본다. 나는 그 순간의 서늘함이 좋고. 날이 서지 않은 물렁한 침묵이 좋다. 침묵 속으로 창밖의 소리들이 번지며 들어오고, 매미 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킨다. 나는 그것이 좋은데,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깨는 사람은 늘 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 우리 한 시간 동안 침묵 놀이 해볼래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들어요. 그런 시간을 제안해보고 싶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수업은 언젠가 시작해야 하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떼고 가벼운 인사와 근황 이야기로 사람들의 입과 귀를 부드럽게 만든다. 글을 쓰는 데에도 예열이 필요하듯 수업이라는 공동의 시간이 열리는 데에도 예열이 필요한 것 같다. 나는 모래성을 쌓듯 허물어질 가루 같은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나의 주말과 이번주 내가 본 것 읽은 것 느낀 것들을 이야기하며 학생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대부분 사는 게 재미있지 않고 세상만사를 걱정한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고 책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좋다.


나는 최근에 매기 넬슨의 『블루엣』을 읽었다. 나는 평소 파랑(그림 속 짙은 파랑을 빼고)에 매혹된 적이 별로 없다. 파란 옷도 파란 물건도 거의 없다. 나는 초록과 검정을 정말 좋아하는데 매기 넬슨이 초록이 끔찍하다고 하는 순간, 나는 어쩐지 내 초록 물건들이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속상해졌다. 어떤 사람의 글에는 왜 그렇게 쉽게 감정이 전이되는 걸까. 왜 그렇게 많은 예술가가 파랑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히곤 하는 걸까. ‘blue’가 우울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애초에 왜 파랑이 우울이라는 감정과 연결되는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말 우울한 색은 노랑이라고 난 항상 생각한다. 나는 노란색을 싫어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싫었다. 


나는 이혼 전에 너무 답답해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근데 이 얘기 전에 썼나? 헷갈린다) 그때 사주를 봐주시는 분이 내게는 파랑이 좋은 색이라고 하였다. 그건 내 사주에 불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뒤로 나는 파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파랑은 나를 보호하고 나에게 좋은 일을 가져다줄 거야, 하고 생각하곤 했다(그러면서도 맨날 빨간 옷 입고 다닌다). 그래도 다음에 차를 사면 테슬라 파란색 사고 싶다. 아니, 볼보도 사고 싶은데 뭐 사지. 그는 아이의 사주는 금이며 오행이 전부 있다고 복을 타고난 아이라고 했다. 마음이 놓였다. 불이 금을 낳는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이치에 맞게 느껴지기도 한다. 빛 속에 파란 것들을 잔뜩 늘어놓은 매기 넬슨의 테이블을 상상한다. 어떤 색 안에 함몰되기로 작정한다는 건 대체 어떤 마음일지. 그걸로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건 얼마나 긴 꿈과도 같을지. 문득 부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매기 넬슨의 이백사십 개의 단상들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이런 책을 써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인쇄할 때 파란색으로 글씨 색을 넣는 것이 좋아 보여서 따라 하고 싶어졌다. 이건 데버라 리비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읽을 때도 했던 생각이다! 파란 글씨로 쓰인 것은 검은 글씨로 쓰인 것과 다르게 보인다. 좀더 쉽게 휘발될 것만 같고 공중에 손가락으로 쓴 글씨 같다. 나는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시집을 파란 글씨로 내면 어떨까? 이 산문을 파란색으로 실으면 어떨까? 그런 상상들을.


방금 내 책상을 둘러봤는데 파랑은 물 뚜껑하고 스파이스맛 피시 스낵이라 쓰인 봉지뿐이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무채색에 가깝다. 왜 나는 이런 색들을 가까이하는 인간이 된 거죠? 


오늘 여자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가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백인 남자도 아프리카계 남자도 한국 남자도 희망이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남자가 괜찮은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그가 안전한지에 대해(디폴트값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에 일단 좌절하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안전하다는 표식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안전한 사람 중에 골라서 만나면 되잖아.” 나는 생각했다. 일단 성병검사 받고 인성검사 받고 범죄 경력 조회하고 주변 지인들 다섯 명 이상의 인증을 받은 남성에게 바코드 칩을 내장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바코드는 삼 개월마다 갱신해야 한다. 그럼 그를 만나는 사람은 간단히 핸드폰 스캐너로 그가 안전한 남성인지 아닌지 대강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남성들의 반발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인증이 없으면 사회에서 도태되며 연애 근처도 못 간다는 걸 알고 결국 남자들은 너도나도 스스로 인증을 받으려고 안달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게 실제로 있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인간이란 늘 비리가 있고 제도를 통해 이익을 보는 나쁜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인증에 통과하지 못했는데 돈을 주고 칩을 이식받거나 칩을 위조하는 블랙마켓이 생기거나 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에 이득을 볼 업체 같은 곳에서 비리를 저지를지도 모르고 많은 사람의 개인정보가 유출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길고 지난한 시간과 노력을 통해 남자 사람을 만나고, 그 남자 사람의 사상을 검증하고, 그 사람이 얼마나 안전할지를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입증하고 믿어야만(속기 쉽다) 한다. 취향은 그다음 문제이다. 문화를 잘 이해한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좋아한다거나 한 권의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지를 비롯하며 외모까지. 이렇게 수고롭다보니 남성을 만나기로 시도한다는 것이 도통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연애를 하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가끔 서늘한 여름밤을 들으며 서밤님은 어떻게 모리아티님을 만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물론 스윙 댄스 배우다 만난 건 아는데 그 희박한 확률로 제 짝을 만났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잘 지내는 모든 커플이 부러웠다. 나는 혼자 바르게 서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런 것은 그만 부러워하기로 했는데. 나는 어쩜 이렇게 약한 건지. 


내가 늘 원했던 건 이해받는 것이었는데, 나도 나를 잘 이해 못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할 것인가 싶었다. 나는 지금 외롭다. 그리고 외로움으로부터 연애 상대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 사고의 뻔한 흐름 또한 너무 싫다. 어쨌든 남자 만나면 개고생인 거 빤히 알면서. 왜 이러냐고. 정신 차려 제발. 어차피 널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2030년에 세상이 망하면 좋겠어. 


목욕물에 잠겨 물놀이를 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2030년에 세상이 멸망한대.”

“왜?”

“사람들이 지구를 사랑하지 않아서. 지구가 병들어서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대.”

“난 어른 돼서 엄마랑 결혼하고 카레집도 해야 되는데? 어른이 못 된다고?”

아이가 울먹거리며 물었다. 

“응” 

며칠 전 본 그레타 툰베리의 영상이 생각났다. 너는 인생을 온통 학교만 다니다가 끝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이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우리, 네가 초등학교 가면 카레집 할까?”

울음이 가득한 얼굴로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는 늘 장래희망을 나와 함께 카레집을 여는 것이라 하는데 어쩌면 그날이 좀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다들 먹으러 오세요. 꼭. 저는 카레의 천재입니다. 진짜로요(맛없으면 환불해드림).


아이는 어쩌면 로봇 과학자도 못 되고 우주도 못 가고 혼자 여행을 가보지도 못하고 첫 연애도 첫 데이트도 해보지 못할지 모른다. 이런 지구를 만든 것은 우리 어른들이다(혹은 우리의 부모님들과 그 부모님들의 책임이 더 크겠지만 어쩌겠어 이제는 우리가 어른인걸).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노력하기에 이제는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전 세계인이 함께 힘을 기울인다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막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그래서 인터넷도 찾아보고 고민하다가 아이와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을 몇 가지 정해 지켜보기로 했다. 


1. 쓰레기 덜 만들기. 일회용품 사용 덜 하기. 

2. 물 조금만 쓰기. 목욕 일주일에 한 번 주말에 하고 평일에는 샤워하기. 

3. (이건 나 혼자 하기로 결심한 건데) 옷 사지 않기. 사게 되어도 굿윌이나 아름다운 가게 등의 빈티지 의류 사기(이미 나는 죽을 때까지 입을 만큼 옷이 많다).

4. 재활용품 잘 분리해서 버리기. 

5. 음식 남기지 않기. 안 먹을 것 사지 않기.


우선 이 다섯 가지만 잘 지켜보려고 한다. 나는 빨리 죽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구를 더럽혀도 될 자격을 얻는 건 아니니까. 그런 마음이라면 빨리 죽어주는 게 지구에 이득일 테니까.


코로나가 지나가면(지나갈까?) 아이와 남은 시간을 더 알뜰하게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도 집도 사고 차도 사서 아이와 더 행복하게 살려는 이유에서인데 십 년밖에 못 산다면 집이고 차고 다 무슨 소용이람. 이제 목표는 카레집 얻기다. 집 사기보다 어려울 것 같아서 걱정된다(집은 1억 모은 다음 남은 금액 삼십 년 상환으로 대출받으려고 했는데 엉엉).


처음 아이를 낳고 나서 아이를 보며 이 아이는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여행도 많이 다니며 살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코로나 19가 시작된 뒤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전보다 더 해외로 가 살거나 자유롭게 여행할 기회가 많아질 것 같지가 않다. 어쩌면 인류는 이제 끝나가는 종족일지 모른다. 


그리고 가슴 아프지만 그게 옳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집에 앉아 잠시 쓴다. 오늘은 입시 설명회 날이라 학부모님들께서 학교에 오신다. 그러니 엄청 선생님같이 입고 꾸며야 한다. 우리 안의 선생이란 이미지는 대체 뭘까? 원피스에 재킷을 입고 학교에 가면 타과 학생들도 인사를 한다.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가면 아무도 인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사를 받고 싶은 게 아니고요. 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는 남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이 모두 인사를 한다. 그런 게 가끔 좀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내가 어려 보여서 학생인 줄 알았나보다. 그런 생각과 여러 생각이 동시에 들어서 좀 씁쓸하다. 코르셋은 언제 다 벗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이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어서 씻으러 가야지. 


지금은 학교다. 아이들은 모의 실기를 보고 있다. 오늘의 시제는 ‘밀가루’다. 나는 시험 감독을 하며 잠시 메모장을 켜 이것을 적고 있다. 아이들이 ‘눈’이나 ‘하얀 세상’ 같은 것(쉽게 도출될 수 있는 형태적 유사성에 기인한 인식)을 쓰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쓰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무엇을 쓸까, 골몰하고 있는 이 집중의 순간이 가져오는 침묵은 수업시간 전의 침묵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갖고 있다. 팽팽하고 날이 서 있고 숨쉴 때 허파가 아픈 느낌의 침묵이다. 고산병에 걸릴 것 같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빽빽하고 시끄러운 침묵이기도 하다. 나는 희박한 공기 속에서 얕은 숨을 쉰다. 궁금해하면서, 걱정하면서, 기대하면서.


모의 실기도 끝났고 입시 설명회도 끝났다.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우고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주로 앉아 있거나 안내하거나 설명하는 일 외에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는데, 평소보다 힘들다. 기 빨린다는 말이 딱 맞는다. 왜 이렇게 기운이 나지 않는 걸까? 나는 내가 자주 한심하곤 한데, 오늘은 복도에서 다른 반 아이들이 내 산문을 읽고 눈물이 찔끔했다고 말하며 나를 조금 놀렸다. 부끄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이들이 내 산문을 읽고 부모님께는 절대 안 보여드렸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잘릴까봐 가끔 겁이 난다. 선생답지 않다는 말을 들을까봐서.


빛은 못 가는 곳이 없는데 바람은 높은 곳에도 훨훨 날아오르는데 나는 점점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나는 무엇이 되려고 이렇게 계속 존재하고 있는 걸까? 언젠가 아이가 내게 했던 질문이 가끔 생각난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웃으며 “엄마는 이제 다 컸어 뭐가 못 돼.” 그렇게 대답했지만 내 인생이 정말 십 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앞으로 나는 두 권의 시집을 더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것 말고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문득 오늘 태어난 아기들은 열 살 때 세상이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우리는 커서 무엇이 될까요? 환경을 지키며 조금씩 자라나고 싶어요. 앞으로는 고기도 조금만 먹을 거예요. 사랑하는 것들에게 사랑한다고 더 자주 얘기하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얘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습관적으로 메일 말미에 쓰던 말 ‘평안하고 무탈하시기를 기원합니다’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요즘은 매일매일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있다. 평안하고 무탈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것은 고요한 행복의 편안함이 아니다. 투지를 불태우며 투쟁해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안다. 


모두 함께 단결합시다. 전 세계의 동지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