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생각병/생일병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생각하는 일이 많다. 다 소용이다, 지금은 무용하게 느껴지더라도 결국 이 시간들이 쌓여 내가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 속에서 무언가를 수행하는 와중에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계속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데 생각은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꺼지지 않아서 생각은 점점 무성해지고 무성해지다가 나를 집어삼키고 나는 사라지고 생각만 덩그러니, 흰 방에 남아 빈 의자와 모니터 화면의 푸른빛만 존재하게 되는 생각 속의 생각을 생각에게 의탁하며 생각이 가는 방향도 모른 채 생각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며 생각은 질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며 생각은 그것에 대해 토를 달지 않지만 질병을 가속화시키며 나를 조롱한다. 나는 조난당한 사람처럼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얌전해져 생각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흔들리게 된다. 생각병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설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병의 중단은 죽음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마지막까지, ‘죽을까 말까’가 되는 것. 나는 너무 오래 작동중인 기계 같고 사랑을 라디오처럼 끄고 켤 수 없는 것처럼 나를 끌 수 없다. 나는 그것이 진저리치게 속상하고 가끔은 이러다가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싶지만 또 미쳐지지도 않아서 은근하게 앓으며 생각이란 것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생각은 인간에게 좋은 것일까. 생각 때문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밤이면 몸은 차가워지고 딱딱해진다. 잠이 들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으며 간신히 잠이 들더라도 꿈을 꿀 것이며 꿈속에서도 그것이 꿈인 줄을 알고 꿈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자고 일어나도 몸은 개운하지 않고 피로는 계속되는데 생각을 잠시 멈추는 가장 쉽고 유용한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은 지 꽤 되었고 나에게는 금주가 결과적으로 옳으며 유익할 것이라고 나의 정신과 육체의 건강이라는 것에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고 생각이 생각을 끝없이 불러오기 때문에 


생각이 끝나는 지점은 언제일까. 



파도 그리고 파도


눈먼 짐승들이 날뛰는 밤


돌고 도는 바퀴 


눈먼 짐승들이 울부짖는 밤



어릴 때 그런 생각을 종종 했다. 똥을 먹는 생각을. 그 생각은 갑자기 찾아오고 그러면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서 괴로웠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생각은 더 생생해져서 괴로움만 커졌다. 나는 이 일을 태어나서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그때마다 생각의 볼륨을 낮추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었는데 레모나를 먹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입속에 침이 고이고 나는 계속 상상 속에서 레모나 하나 레모나 둘 레모나 셋 레모나 넷…… 그렇게 레모나를 상상했다. 레모나를 끝없이 생각하다보면 갑자기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었고 그렇게 나는 똥 먹는 생각에서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똥을 좋아한다. 똥이라는 말만 들어도 자지러지게 웃고 하루종일 똥! 똥! 하고 외친다. 아이들의 신비 중 하나다. 어째서 똥에 대해 그토록 집착할까. 어린 나도 그랬던 걸까? 모든 말에 응가를 붙여 말하는 아이. 로봇응가, 얼룩말응가, 엄마응가, 장미응가, 목욕응가……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그건 끝나지 않는 노래 같다.


물을 컵에 담아두고 하루 지나 마시면 물에서는 종이맛이 난다. 


나는 어째서인지 그 맛을 좋아하고 나는 충분한 시간만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고 믿지만 물을 담아두고 일 년이 지난다고 해서 그게 종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증발해서 사라질 뿐이니까. 생각도 증발하면 좋을 텐데 왜 계속 생겨나는 거야. 그렇다면 누군가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생각을 쏟아붓고 있다는 생각. 외계인일까? 그만둬. 나는 누군가가 꾸고 있는 악몽 속 주변인이 아닐까? 일어나. 나는 이미 죽었고 여긴 지옥이고 삶의 가장 나빴던 부분을 영원히 겪으며 살게 된 건 아닐까? 그럼 자살도 아무 소용이 없겠다.


어제는 아이가 “엄마 그림자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 어둠과 빛이 합쳐져서야”라고 말했고 나는 감탄하면서도 얘가 시인이 되면 어떻게 하지 걱정을 했다. 네가 시인이 되어도 행복한 세상이 올 수 있게 엄마가 노력할게. 그래도 시는 좀. 조금만 더 크면 네가 엄마 대신 마감을 해도 되겠구나. 어서 한글을 떼다오.


어제는 친구가 카톡을 보내서 “너는 산문에 매회 전남편이 나오더라. 그렇게 싫어?”라고 물었고 또 생각병이 도져서 곰곰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렇게 싫어서라기보다는 이혼 후의 삶이 지금 내 가장 큰 화두이기도 하고 이혼 여성이 이혼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는 걸 보거나 읽은 적이 없어서 나라도 많이 이야기하고 또 해서 이런 삶도 가능하며 잘살고 있다(?)고 그게 자연스러운 하나의 가정家庭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여러 가지 담론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며칠 전에 산부인과에 갔는데 사전 작성지에는 미혼/기혼이 있고 기혼 밑에 출산 여부를 체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 미혼인가 기혼인가? 미혼모는 어디에 체크해야 하나? 애초에 선택지에 체크할 수도 없는 여러 상황에 놓여 있는 여성들이 분명 있을 것인데.


세상에는 참 여러 모양의 마음과 삶이 있는데 우리는 너무 ‘정상성’만 보고 듣고 배우니까 그게 싫다. 정상이고 비정상이고를 누가 정하는데? 처음부터 그런 게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나무들을 파헤치고 자르고 죽어가는 가지들을 쌓는 것을 베란다에 서서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파도와 파도


불을 머리에 얹고 다니는 여자


다시 파도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다지만 옛말 중에 틀린 거 많고 옛날에도 개소리가 얼마나 많았겠어. 근데 그 세월 견디면서 살아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말들이 지금 우리가 아는 옛말이니까 꽤 그럴싸하게 들리는 거겠지. 내가 싫어하는 속담 중에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이 있는데, 대체로 이건 남성의 경우에 해당되고 세 번 참아서 면할 살인이면 애초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예전에 보았던 어떤 일본 만화에서 주인공은 견딜 수 없이 힘들 때마다 손바닥에 참을 인忍(칼날 아래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이 참는 것이다)을 그려서 먹는 시늉을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참으면서 살아야 되는지, 그런 게 나는 이해가 되지 않고 그런데 나도 참으면서 살긴 하지만 참는 거 너무 싫어. 가장 비참한 지점은 살면서 대부분의 참는 일이 돈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점이다. 돈만 많으면 참을 일이 거의 없을 거 같고 그럼 나는 나쁜 사람이 될까? 갑질하는 사람이 될까? 그러진 않을 거 같은데. 그래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좋은 어른 같은 건 못 되겠지만 개꼰대는 되면 안 되니까.


개학이 또 연기되었고 나는 오늘 학교에 온라인 수업을 하러 간다. 가기 전에 아침에 쓰고 있다. 신천지 이후 코로나의 재점화를 두고 사람들은 춤천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지? 어떻게 그토록 적확하게 꿰뚫어 명사를 지어내지? 참으로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루 지남)


이제 사십 분 후에는 내 생일이고 나는 생일이 대체적으로 싫지만 보통 사람들은 생일을 뭐하고 보낼까? 생일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오래 연락이 없고, 나 또한 연락할 마음을 먹기가 어려워. 누가 집에 갑자기 찾아오는 건 너무 싫지만 네가 오늘만은 제일 먼저 축하해주고 싶었다고 말하며 와인 한 병 들고 무작정 찾아와줬으면 좋겠어. 그럼 나는 또 투덜거리면서 찬장을 열어 잔을 꺼내겠지. 그리고 집의 불을 다 끄고 조용히 숨죽이고 앉아 키득거리며 실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같이 화도 내고 그러면 좋겠어. 그리고 나는 졸리다고 이제 좀 가라고 퉁을 주고 그럼 너는 잘 자라며 자리를 비켜줄 거야. 그게 내가 원하는 내 생일이야. 



파도가 친다


섬을 멀리서 보면 바다는 봉우리 같고


파도는 파도의 형상으로 파도



생일은 지나갔고 나는 자리에 앉아 나의 개같은 생일날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일단 일어나니 아이가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큼직큼직하게 썬 오이와 호박을 계란과 함께 아무 간도 없이 볶은 요리였는데 호박은 아삭아삭하고 오이도 아삭아삭했다. 아이는 그걸 계란칩이라 명명했고, 나는 요리의 맛보다 아이의 정성에 감격하며 정말 맛있다고 열심히 먹었다. 감격스러웠다. 아이가 커서 벌써 이렇게 생일선물을 해준다. 문제는 너무 맛있다고 말했더니 매일매일 해주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다행히 집에 계란이 떨어졌다. 


저녁에는 생일이니 집에 오라고, 재난지원금으로 맛있는 걸 사주신다고 부모가 나를 불렀고 우리는 다 같이 초밥집에 갔다. 아이는 출발하기 전부터 가기 싫다고 집에 있자고 떼를 썼는데 오늘은 엄마 생일이니까 가자고, 한 번만 엄마 말 들어달라고 어르고 달래서 나온 길이었다. 아이는 단호하게 초밥을 먹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였고 나는 기분이다 싶어 편의점에 데려가 간식을 사주었는데, 식당에서 자꾸만 음식을 흘리면서 먹고 의자에 서 있는 등 산만함을 선보였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아빠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나는 생일이라고 기프티콘을 많이 선물 받았기에 우리는 근처 스타벅스로 갔다. 각자의 음료를 시키고 아이에게는 케이크를 시켜주었는데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인간이 자꾸 아이에게 한입만 달라고 했고 아이는 역시 이번에도 아주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고(굳세다 내 아가) 그렇게 둘은 한창 실랑이를 벌였다. 아, 여기서부터 뭔가 잘못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은 집에 돌아와서 한 것이고 그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성은 아이의 긴 머리를 지적하며 “성정체성이 잘못될 것, 남자가 보기 흉하게, 아무 철학적 근거도 없이 머리를 기르고 진짜 꼴 보기 싫다”는 등의 말을 아이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반박하며 네가 아이에게 네 의견을 얘기할 수는 있지만 아이의 신체 결정권은 아이 스스로에게 있으며 세상에 잘못된 성정체성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울먹거리며 “할아버지 미워!” 외치며 그의 다리를 주먹으로 때렸고 그는 아이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어 비튼 뒤 팔을 꺾어버렸다. 아이는 카페가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하며 아프다고 울기 시작했고 엄마와 나는 정색, 경악, 분노가 뒤섞인 난감함 속에서 여섯 살짜리 애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고 해도 폭력을 사용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이렇게 나대는 애들은 행동으로 보여줘야 된다. 너는 내가 보아하니 애를 잘못 키우고 있다. 다른 데서 나대다 얻어맞기 전에 내가 물리적 계도를 해주는 것뿐이다. 나는 옳다”고 큰 소리로 역정을 내며 말했다. 나는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나서 주 양육자는 나다,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며 너는 그럴 권리도 없다, 어떤 말을 해도 절대 폭력은 합리화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인간은 “얘가 먼저 자기를 때렸다”고 소리쳤다. ‘네가, 어, 네가 여섯 살이야???’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시끄러워, 하고 카페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집에 오는 내내 아이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는데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 “엄마, 할아버지가 죽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도 그렇지?”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생각했다. 절대로 내 아이는 폭력 속에서 자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도록 키우겠다는 내 다짐은 이렇게 쉽게 무너질 수 있으며, 그것에서 아이를 보호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지면과 SNS에서 페미니스트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뭐해. 현실에서는 자기 애도 하나 못 지키는 병신인데. 내가 키보드 워리어랑 뭐가 달라. 그런 자괴감도 함께 나를 찾아왔다. 

“엄마가 지금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집에 가서 약 먹고 우리 따듯한 물 받아서 욕조에서 입욕제 풀고 같이 놀고 푹 자자. 그러면 나아질 거야.” 달래며 액셀을 밟아 집으로 왔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는 마스크를 쓴 채 오늘 먹은 것을 토했다. 주차장에, 엘리베이터 앞에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나는 황급히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 욕실에서 옷을 모두 벗기고 따듯한 물을 받아 아이를 앉혀놓은 뒤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물티슈 한 팩과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시피 하며 닦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한참 지하 주차장을 닦고 엘리베이터 앞을 닦고 있으니 눈물이 났다. 씨발, 나 오늘 생일인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하니 자기한테 뭐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지금 내가 너 대신 거기 가서 닦아줄 수도 없는 거 아니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게. 엄마가 진작에 이혼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토 닦고 있을 일도 없을 거 아니야.’ 나는 울면서 화를 냈다. 이젠 그 남자에게보다 엄마에게 더 화가 났다. 매번 언니와 내가 맞을 때마다 가만히 있던 엄마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던 엄마가. 너무 미워서 눈물이 났다.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정하는 건데?

그리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러쉬 우주 입욕제를 풀어 한참을 놀고 보고 싶은 거 실컷 보자고 만화를 세 개 연달아 보고 그리고 책을 읽다 같이 잠들었다. 

후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인간을 가장 잘 알아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줄 것 같은 존재) 사건을 설명했더니 언니는 내게 말했다. “그러게 멍청하게 거길 왜 가? 엄마가 아빠 바뀌었다고 많이 달라졌다고 하는 거 믿었니? 너 왜 그렇게 사람이 순진하니? 머리를 써야지.” 이해해 줄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파도


개 같은 파도



오늘은 수업을 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아이가 할아버지를 그렸다며 그림을 보여줬다. 어떤 할아버지? 물으니 “엄마의 아빠”란다. 왜 그렸냐고 물으니 유치원에서 미술 선생님이 그리라고 했단다. “마음 아프고 힘들지 않았어?” 하니 “너무 힘들어서 미술 선생님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말을 못했어.” 아마 가정의 달이라고, 할아버지를 그리는 시간을 가진 것 같은데 이런 수업들이 아이들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유치원에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걸까? 작년 5월에도 가정의 달 행사에 가서 쇼윈도 부부 행세하느라 눈물이 났는데, 올해도 또 가족사진 내라고 하고 부모 불러서 엄마 아빠 사랑해요, 함께해서 행복해요, 그런 노래에 춤추게 할까? 그런 사건은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얼마나 많이 일어날 것이며 그때마다 아이는 어떤 내상을 입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가슴에 난 큰 구멍으로 심장이 줄줄 새는 것 같다. 파도처럼.  


오늘도 나는 생각병에 빠져 생각이란 것을 한다.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은 인간과 나무는 겉은 달라도 분자구조로 보면 동일하며 모든 생명의 기원은 하나라고 했는데. 나는 왜 나무의 마음을 가질 수가 없는 걸까. 나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둠 속에 서 있을까. 



바다의 자식들


파도를 헤쳐나온 존재들


숫자를 세며 눈물 흘리는 



생각을 하다보면 나는 생각을 한다. 이 지긋지긋한 삶의 끝에 인류는 결국 망해버릴 거라고 생각을 한다. 땅은 모두 바다에 잠기고 결국 우리는 모두 단세포로 돌아가리라. 태양은 마침내 꺼지고 그다음은 삼백억 광년 후가 될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는 또 같은 것을 반복할 거다. 이미 천억 광년 전에 이 같은 일은 이미 일어났던 일일 것이다. 파도가 치듯. 이 개같은 파도가. 



아이가 그린 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