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이름을 부르면 계속해서 태어나는

이름이란 좋은 것이다. 부를 수 있고 불릴 수 있으니까. 사람에게 이름은 고유함과 내밀함을 훼손하지 않는 마지막 것, 동명이인이 있다 해도 바뀌지 않는 것, 그런 이름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아닌 타자에 의해 부여받는 것은 참 신비스러우면서도 비극적인 면이 있다.


나는 백은선이다. 내 이름을 줄곧 싫어했다. 숨기 좋은 이름이 아니니까. 같은 이름을 찾기 힘드니까. 내가 등단하면 학교 다닐 때 알던 애들이 “어, 걔 왕따였는데” 하면서 내 얘기를 퍼트릴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다. 자의식 과잉이었다. 애들은 시에 노관심이라서 아직 팔 년 동안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다. 있어도 이젠 상관없는데. 등단할 때는 그게 무서워서 필명으로 투고했었다. 내가 『문학과사회』로 등단할 때 내 이름은 윤서윤이었다. 회문으로 된 이름을 갖고 싶었고, 그 당시 남자친구(현재는 전남편)가 윤씨여서 그렇게 지었다. 지금은 막판에 전화를 걸어 “필명 안 쓸래요” 하고 말한 걸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젠 내 이름이 흔하지 않은 점이 좋다. 그 외엔 크게 상관하지 않지만 난 내 이름의 성 ‘백’(생물학적 아버지에게서 받은 낙인 같은 성, 참고로 주민등록번호 마지막 자리는 아빠 언니 나 모두 666이라 어릴 때 나는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고 자주 상상했다)과 마지막 글자인 ‘선’을 정말 싫어하는데, 착할 선이기 때문이다. 이름의 뜻은 ‘하느님의 은혜로 착하게 태어났다’이다. 은혜도 싫긴 싫지만. 그 시절 이름에 ‘은’이 들어가는 아이들은 모두 은혜의 영향 아래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치고. 엄마는 은진이고 언니는 은미인데 나는 은선이라 난 내심 은미가 내 이름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다. 진미선은 이상하니까. 진선미가 보통의 순서니까. 늘 착하다는 말을 싫어했다. 근데 착했다. 호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착했다기보다는 거절을 잘 못했고 잘 끌려다녔던 거 같다.)


태어나기도 전에 악마와 천사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말하면 과장이겠지(과장이다).


착한 내가 싫어서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 나쁜 나로 몇 년 살았는데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어. 결국 천성대로 살기로 했어. 우스꽝스럽고 광대 같고 잘 웃으며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그런 애. 이상하고 엉뚱하고 착한 애. 백은선.


착하다기보다 걱정이 많은 것 같고 착한 거 빼면 진짜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될 것 같아서 열심히 착함을 훈련한 거 같다. 자기연민 너무 심해서 이 문장 진짜 지우고 싶다. 


나한테는 매듭모가 꽤 많은 편인데 머리가 길어서 매듭이 지어진 건지 첨부터 매듭모로 생긴 건지 종종 궁금하다. 


이 많은 매듭들은 왜 생겨난 거죠?

볼 때마다 이로 끊어서 잘라내는데 그게 종종 재미있다. 


당장 아무하고나 만나고 싶다. 만나서 재롱도 부리고 많은 헛된 얘기를 쏟아내고 후회하면서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그럼 그 사람은 은선아 은선아 하고 잘 들어갔어? 하고 카톡하고 그럴 텐데. 뛰쳐나가고 싶다. 소리지르고 싶다.


만날 사람도 없지만 만나러 갈 자유도 없어.


괴롭다. 살아 있는 게 싫고 내일은 일요일이라서 좋은데 그다음은 월요일인 게 싫다. 어제 김혜순 선생님의 『죽음의 자서전』 완독회를 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팠다. 두 시간 걷는 건 좋은데 가만히 두 시간 서 있는 건 진짜 힘들고 목마른데 물 마시면 시 읽다가 트림 나올까봐 무서워서 물도 한 모금 안 마셨다. 근데 마지막에 시가 너무 슬퍼서 조금 울었다. 선생님은 너무 존잘님이고 만렙이어서 범접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 한 구성원으로 시 읽는 게 얼떨떨하고 행복했다. 읽다가 틀릴까봐 걱정되어서 집에서 엄청 낭독하고 갔다. 내 낭독회 때도 리허설 한 번 한 적이 없는데 혼자 방에서 계속 선생님 시 소리 내서 읽고 또 읽고 틀리면 밑줄 쳐놓고. 시하고 친해지는 것과 멀어지는 건 이런 거구나 전 세계의 신호등에 동시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걸 달에서 보는 것 같은 기분. 안 틀리고 읽긴 했지만 별로 나답게 못 읽은 거 같아서 약간 아쉽고 그랬다. 황인찬은 낭독을 잘해서 황인찬 다음 순서가 아닌 거에 안도했다.


멋진 척하는 건 진짜 어려운 일인 거 같다.


이름 얘기하다가 왜 여기까지 왔지. 제목 정해놓고 쓰니까 그 안에서만 얘기해야 하는 거 같아서 힘들다. 그리고 이 글에 ‘너무’라는 강조 부사가 너무 많은 거 같다. 괜히 막 이름과 낭독회 연결해서 막 그럴듯한 얘기 해야 될 거 같고 그렇지만 그냥 내가 그 자리에서 함께 낭독을 해서 나 좀 짱이다 너무 좋다, 그런 얘기고 굳이 이름하고 연결하면 김혜순이라는 이름에 대해 그 이름이 가진 아우라와 무게에 대해 그 순간에 함께 있던 것의 감동에 대해 막 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다 아는 얘기니까 그냥 ㅇㅇ하고 넘어가도 될 거 같고.


옛날에는 누가 “백은선!” 하고 부르는 거 싫었는데 이제는 좋다. 


그건 엄마가 되고 나서 더 그렇게 된 것 같은데 나라는 백은선이라는 존재가 너무 쉽게 휘발되고 누구 엄마로 삶을 살다보니 자아가 굉장히 희미해지는 순간을 본 것 같고. 전 시어머니는 내가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나를 ‘껍데기’ ‘밥통’으로 불렀다. 살아 숨 쉬는 젖 기계가 된 거 같고, 진짜 애 낳아서 나는 껍데기만 남은 거 같고 그 말이 너무 싫고 슬퍼서 생각만 해도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껍데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너무너무 끔찍하다. 내가 시인이라서 망정이다. 확실히 나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숨이 막힐 때 내 이름이 적힌 책등을 들여다볼 수 있고 내가 발표한 지면들도 볼 수 있다. 진짜 보진 않지만…… 그만큼 아이와는 독립된 영토를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의 친구 엄마들의 이름을 대부분 모른다. 그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 누구 엄마, 누구 엄마, 그게 다다. 나는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이렇게 되어버리는 게 진저리나게 싫다.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칠 년 정도 했는데 나는 항상 ㅇㅇ이 여자친구였다. 언제나 ㅇㅇ이 여자친구고 내 이름을 물어보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예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부속이 된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ㅇㅇ은 음악을 했고 무대에 서는 일이 많았고 나는 청중들 속에서 무대 위의 그를 바라보면서 좀 많이 주눅이 들곤 했다. 공연이 끝나면 이어지는 뒤풀이 자리에서도 나는 당당하려고 시크하고 쿨하고 도도하고 너네한테 아무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려 애를 많이 썼지만 사실 속마음은 자격지심에 타들어갔다. 나는 빨리 등단하고 싶었다. 등단하면서 내 이름을 되찾고 싶었다. 근데 등단을 해도 별로 그런 느낌이 안 들었다. 약간 들었다. 그래서 빨리 첫 시집을 내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태어날 거 같았다. 근데 또 그게 만족스러울 정도는 아니었고 초조하고 짜증도 났던 거 같다. 시집이 나오고 ㅇㅇ의 공연에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갔을 때 ㅇㅇ의 동료가 “너 시인이라며 근데 니 시집은 어디서 팔아?”라는 말을 했다. 당연히 메이저 서점에는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묻는 투의 질문이었다. 속이 쓰렸다. 태어날 줄 알았는데. 지금은 그냥 별생각 없다. 별생각 없다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사실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지금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러주면 참 좋겠다. 이름은 좋은 거니까. 그러나 이름은 늘 내게 모난 테두리를 만든다. 바깥을 볼 수 없다. 


수많은 접속사를 전부 지워버리고 싶다.


*


모나미 볼펜의 이름은 왜 153일까? 나흘 전에 넘긴 다음 시집 원고에는 ‘이름’이라는 말이 총 스물세 번 등장한다. 한 권에 그 정도면 굉장히 높은 빈도 같다. 나는 왜 그렇게 이름에 집착할까? 이름은 정말 끔찍한 형식 같다. 구별하고 독립시키면서 대를 잇는다. 테두리를 만들고 각인한다. 새로운 별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종을 발견하면 학자들은 자기 이름을 붙이잖아? 이름을 붙이고 싶어서 새로운 걸 찾거나 만드는 사람들도 있지. 사람도 만들잖아. 자기 성을 주려고. 


혼인신고서에 애초에 부모 중 누구 성을 따를 건지 명시해야 혼인신고 가능한 거 아세요? 임신 출산 육아도 안 하는 남자의 성을 내 아이한테 주는 거 이상해.


아이폰 유저이긴 하지만 ‘애플’이라는 거 너무 상징적이라서 무섭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고 그렇잖아. 파평은 파주에 있는 파평면이래요. 가본 적 없는 땅의 이름이 가장 먼저 주어지는 거. 이름이라는 거.


종종 이름이 참 시인 같다는 얘길 들으면 또 기분이 묘하다? 애초에 내가 원했던 대로 내가 백은미였으면 나는 다른 시를 썼을 것 같고 다른 인생 살았을 것 같고. 왜 『베르세르크』 보면 나오잖아 “도망친 곳에 파라다이스는 없다”. 애초에 이름을 갖고 도망친다는 게 가능한가? 근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진짜 이름을 잊으면 도망칠 수가 없잖아. ‘치히로’는 헤아릴 수 없게 깊다는 뜻이고. 요물이야. 이름이란 건.


눈 코 입 근데 다 다르게 생긴 얼굴처럼 


개명한 친구가 그런 얘길 해준 적 있다. 개명하고 나서 타인이 자기 이름을 만 번 불러줘야 그때 진짜 자기 이름이 되는 거라고. 누군가가 잘못해서 예전 이름을 부르면 다시 0으로 돌아간다고. 나는 실수로 자꾸 예전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자꾸 걔를 0으로 돌아 세웠다. 테이프에 녹음해놓고 반복 재생하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 되는 건 아닌 거 같다. 끝내 인간이 못 되고 죽는 사람도 있겠지? 나도 그렇고. 우리 언제 태어나는 걸까? 나 만 번은 불린 거 같은데.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백은선. 징그러워. 이젠 이게 내 이름처럼 보이지도 않아. 계속 적으면 미칠 수도 있다고 느껴.


이름이란 정말 좋은 것일까? 장미는 장미라고 부르지 않아도 장미인데. 왜 우리는 누군가가 불러줘야만 태어났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 내가 너에게로 가서 꽃이 되고 싶지 않으면 나는 무엇으로 호명될 수 있을까?


이름이란 아름다운 동시에 대상화의 가장 첫 단어인 것 같아서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비극의 성질을 가진 것 같다고. 꽃이 피고 봄이 오는데요. 사람들은 전부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고요. 물이 마른 폭포를 보러 다녀왔고 가끔은 마스크가 얼굴을 가려준다는 게 그걸 쓰고 돌아다니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좋아요.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왕따 당할 때 비 오는 날을 좋아했었다. 우산 속에 숨을 수 있어서. 숨고 싶고 드러나고 싶은 이 기분은. 나는 요즘 내가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원할 때만 쓸 수 있는 투명 망토가 있으면 참 좋겠다.